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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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와 출판만화를 넘나들다 : 〈신도시〉, 〈두경〉의 김인엽 작가

최근 인디 음악계와 힙스터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작가가 있다. 밴드 혁오의 싱글 ‘판다베어’ 커버는 물론 장기하와 얼굴들의 새 앨범에 만화를 그린 김인엽 작가가 그 주인공이다.

2016-09-05 송경원
최근 인디 음악계와 힙스터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작가가 있다. 밴드 혁오의 싱글 ‘판다베어’ 커버는 물론 장기하와 얼굴들의 새 앨범에 만화를 그린 김인엽 작가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인디 밴드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일러스트레이터이자 독립출판 만화책 〈신도시〉를 5권이나 출간한 독특한 이력의 출판인이다. 동시에 장편만화 〈두경〉을 선보인 신인 만화가이기도 하다. 자신의 SNS에 연재 중인 4컷 만화로 독자들의 공감을 넓혀가고 있는 그를 어떻게 소개하면 좋을지 한참을 고민했다. 짧은 인터뷰를 마친 뒤 그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명확해졌다. 김인엽은 작가다.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그린다”며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는 그의 발언에서 최근 들은 그 어떤 선언보다도 단호한 작가적 욕망을 읽을 수 있었다고 하면 과장일까. 그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그래서 어떤 미사여구보다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한 사람분의 경험을 제대로 전달할 방법을 고민한다는 것, 내가 몸담고 있는 시대를 외면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며 앞으로 꽤 오랫동안 김인엽 작가의 이름을 들을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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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인엽 작가
 

Q. 만화를 그리게 된 과정이 꽤 독특했다고 들었다.
A. 무언가 이야기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어렸을 때는 음악을 하고 싶었지만, 재능이 없었다. 그때 함께 하던 친구들은 다들 음악을 하고 있다. (웃음) 다음으론 소설을 쓰고 싶었는데 글을 잘 못 쓴다. 내 안에 이야기는 있는데 표현을 잘 못 하겠더라. 원래 그림 그리는 거나 만화를 좋아하긴 했다. 하지만 진지하게 도전해봐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는데, 음악도 글도 막히고 보니 선택권이 없었다고 할까. (웃음)

Q. 첫 데뷔가 출판만화다. 〈신도시〉는 독립출판계에서도 이례적인 사례로 주목을 받았는데.  
A. 경제학과를 다니다가 이건 아니다 싶어 시각디자인학과를 들어갔다. 근데 막상 들어가 보니 애매한 건 마찬가지였다. 남들보다 특출나게 기술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그림을 잘 그리는 것도 아니다. 그나마 남다른 게 하나 있다면 이야기를 구성하는 능력, 말하는 능력이었던 것 같다. 군대에서 말년에 다들 하는 진로에 대한 고민을 나도 했고 일단 그려보자는 생각으로 무작정 그렸다. 그렇게 만들어진 게 〈신도시〉 1권이다. 당시 판매 가격은 1000원이었는데 큰 의미가 있어서 책으로 낸 건 아니다. 그냥 그땐 만화는 당연히 책으로 내야 하는 줄 알았다. 그렇게 시작한 〈신도시〉가 현재 5권까지 이어졌고 1만2000원짜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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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도시5〉의 포스터

Q. 〈신도시〉는 경기도 군포시 산본을 배경으로 한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았다. 이유가 무엇인지.
A.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결국 내 이야기다. 나고 자란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자연스레 내가 보고 겪은 일들이 녹아 들어가고 크게는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표현된다. 나를 둘러싼 세상, 내 안의 이야기를 표현할만한 매체를 찾다가 만화를 발견하게 된 거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접근이었다. 8페이지짜리였던 〈신도시〉 1권은 군대에서 프린트를 해서 책으로 묶었다. 한편으론 만화를 그린다는 마음보다 ‘책을 낸다’는 의미가 더 컸던 것도 같다. 채색 없이 검은 펜 한 자루로 그림을 그렸는데, 하다 보니 어느새 그게 스타일로 자리 잡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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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도시5〉 내지 중 일부

Q. 출판만화나 웹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림체가 아니다. 굳이 따지면 고전 한국만화나 미국식 카툰의 느낌이 난다.
A. 정확히 그렇다. 미국의 카투니스트 아트 슈피겔만이나 로버트 크럼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유럽작품들이 감성적이고 시적인 표현이 많다면 미국 쪽은 시니컬하면서도 직설적이다. 사회를 날카롭게 해부하는 시선도 좋고. 어린 시절엔 충격에 머물러 있었지만 점점 내가 해보고 싶어서 만화를 출구로 삼은 것 같다. 그림체는 완벽히 그들의 카피라고 생각한다. 거기에 대해 부끄럽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내가 동경하는 작품들의 스타일에 영향을 받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고, 거기에 내 색깔을 더해 다음 걸음으로 나아가는 게 중요하다.  

Q. 접근 통로는 다양하지만 ‘나를 표현한다’는 큰 명제는 흔들리지 않은 것 같다. 굳이 순서를 따지자면 음악, 글, 그림 순인가.  
A. 그런 셈이다. 그림도 아직은 한참 모자라 배우고 연습하는 단계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그리는 능력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생각을 녹여내어 스토리로 구성하는 능력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그래도 셋 중엔 가장 낫다고 생각한다. (웃음) 특정 방식에 매달린다기보다는 나를 둘러싼 세상, 내 안의 이야기를 표현할 수 있으면 좋겠다. 24살 즈음에 시작해 이제 2년 반 정도다. 슬슬 알아봐 주는 분들도 계시고 여기저기서 의뢰가 들어오기도 한다. 처음엔 장난처럼 시작했지만 걸으면 걸을수록 내 길이라는 느낌이 든다. 되도록 오래 이 길을 걷고 싶다.  

Q. 첫 장편만화 〈두경〉이 그 좋은 예라고 생각한다. 〈신도시〉와 비슷하면서도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좀 더 대중적으로 풀어냈다. 독자에게 한 발 더 나가서는 느낌이다. 
A. 그렇게 보셨다면 감사하다. 〈신도시〉가 내 감정과 경험을 1차원적으로 풀어냈다면 〈두경〉은 그런 부분들을 좀 더 이야기답게 다듬어내려 노력했다. 자기가 보기 위해 쓰는 일기와 공개되는 이야기는 달라야 한다고 느꼈다. 〈두경〉은 내가 아니라 읽어줄 독자들을 상상하면서 그렸다. 물론 그게 아직 잘 안 돼서 불만족스럽다. 아직은 이런저런 것들을 배워나가는 과정이다.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가 있다면 ‘솔직함’이다. 적어도 없는 이야기, 내 안에서 나오지 않는 이야기를 꾸며내고 싶진 않다. 동시에 막연히 공감을 얻기 위해 감정을 토해내는 차원의 솔직함은 경계하려 한다. 내가 모르는 이야기는 하고 싶지도 않다. 자신의 위치와 수준까지 바라볼 수 있는 성찰이 필요하다. 만약 내가 모르는 걸 이야기를 하고 싶으면 그만큼 공부가 필요하다.   

Q. 출판만화는 물론 SNS를 통해 네 컷 만화도 꾸준히 선보이고 있다.
A. 솔직하게 고백하면 만화보단 만화‘책’이 좋다. 웹툰도 분명 매력 있고 하고 싶은 분야지만 아직은 내가 뭐라 평가할 만큼 잘 알지 못한다. 특히 일대 다수로 창작자와 소통하는 부분은 긍정적인 면만큼 악영향도 크다고 생각한다. 웹툰은 주목받는 것도 빠르고 소비되는 속도도 빠른데 작가의 성장 속도마저 빠르다. 반론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내면 깊숙이 들어가기 도리어 까다롭다. 그런 면에서 책은 작가가 독자에게 설득되지 않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도피처가 아닐까 싶다. 불과 10, 15년 전만 해도 만화가들도 평생을 정진하고 40대에야 제대로 된 작품을 선보여 빛을 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건 최근에 내 작업들이 스스로 불만족스러운 가장 큰 이유다. 동경하던 작가들에 비하면 퀄리티가 현저하게 떨어지는 게 보이니까 매번 그릴 때마다 괴로움이 있다. 좀 더 느리고 긴 호흡이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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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출판만화와 SNS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게 쉽지 않을 텐데. 
A. 주목받는 게 좋고 신기하지만 언제든 빠르게 식을 수 있다고 본다. 그것도 상관없다. 내가 준비만 되어 있다면 언제든 다시 뜨거워질 수도 있을 테니까. 결국, 선보이는 작품이 얼마나 완성도 있는지의 문제인 것 같다. 지금 당장 반응이 있다고 해서 거기에 휩쓸려 내 속도를 잃고 싶진 않다. 현재는 뭐든 배우고 익힌다는 의미에서 다작이 필요한 시기라 판단해 SNS에 올리는 만화에 좀 더 신경을 쓰고 있다. 솔직히 아직은 만화를 그리는 것 자체와 사람들의 반응을 보는 게 즐겁고 그릴 때도 편하다. 하지만 최근에 슬슬 다음 단계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걸 느낀다. 넓게 보면 아마 비중은 출판만화가 9, 온라인이 1 정도가 될 것 같다. 기본기를 좀 더 쌓고 고민이 더해지다 보면 서른 살 쯤의 나는 좀 더 나아지지 않을까. 늦게 시작했지만 조급해하지 않고 하나씩 제대로 해나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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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자신의 세계를 풀어내는 방식들을 끊임없이 고민한다는 측면에서 젊은 만화작가라고 부르고 싶다. 앞으로 ‘작가’로써 어떤 작품을 목표로 하는지.
A. 내가 문학작품에서 받았던 감동들을 내 작품을 통해 전할 수 있으면 좋겠다. 궁극적으로는 그럴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싶다. 그림이라는 시각적인 요소를 사용해서 고전 명작이라 평가받는 소설들과 비교해도 손색없는 감동을 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가령 남미 환상문학은 두껍지 않지만, 충분히 깊이와 재미가 있다. 문학의 서사를 해체하고 시간을 뒤섞은 이야기들은 어쩌면 텍스트보다 만화로 표현됐을 때 정말 멋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느꼈다. 그런 의미에서 기억될만한 ‘책’을 남기고 싶은 게 나름의 지향점이다. 만약 내가 하지 못해도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하는 작가들이 한두 명씩 늘어난다면 언젠가는 가능하리라 믿는다. 개인적으론 큰 세계관 안에서 연결되는 이야기들을 짜보고 싶다. 예를 들면 산본을 무대로 한 청춘들의 이야기? 그 조각들을 펼치고 짜 맞출 수 있으면 좋겠다. 군포시는 좋아하지 않는 것 같지만. (웃음) 단기적인 목표는 하루하루 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사는 거다. 장기적으로는 내가 내뱉은 말을 배신하지 않는 작가가 되려 한다. 내가 별로 안 변했으면 좋겠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