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에 들어와 인터넷이 만화 발표의 무대가 되면서, 굳이 오프라인을 통해 데뷔해야 할 이유가 사라졌다. 강풀, 심승현, 정철연 등 최근 몇 년 사이에 독자들의 뇌리 속에 각인된 유명 만화가들도 상당수가 온라인을 통해 데뷔한 작가들이다. 하지만, 20세기에는 잡지와 신문 등 지면만이 만화를 발표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고, 김박 역시 잡지를 통해 처음으로 독자들과 소통하며 데뷔한 우리 만화 1세대의 작가다.
1950년대에도 오늘날처럼 유명한 대중문화잡지가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아리랑>(삼중당 발행)를 들 수 있다. 소설이나 만화가 주로 실렸던 이 잡지에서 1959년에 만화공모전을 열었는데, 김박은 여기서 카툰부문에 당선하여 데뷔하게 된 것이다. 그 뒤 그는 「평화신문」의 기자로 재직하면서 만평과 4단 만화를 전담했었으니 이때부터 이미 만화가로서 활동해나갔던 것. 군대에서도 그림 그리는 일을 맡았다고 하니, 그와 그림의 관계는 실과 바늘처럼 평생을 함께 해나갈 동반자였던 셈이다. 제대 후에는 어린이 잡지 「어깨동무」에서 만화와 함께 일러스트 작업도 병행했다. 그러니, 그는 카툰, 만평, 시사만화 그리고 일러스트까지 그야말로 만화에 대해서는 올라운드 플레이어였던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영역을 통해 나타났던 그의 왕성한 활동력은 작품 내용으로도 이어져 유쾌하고 즐거운 그림으로 표현되었던 것이 특징이다. 이에 대해 손상익은 “경쾌하면서도 짜임새 있는 그림틀로 언제나 유머가 가득한 내용을 작품에 담았다.”고 평가한 바 있다.
1971년부터 1978년까지 「어깨동무」에 재직하는 동안 열정적인 활동을 통해 그는 1976년 한국잡지 기자상까지 수상한 바 있다. 이후 「소년조선일보」(1975~1998), 「스포츠서울」(1985~2004) 등에 고정적으로 연재하면서 최근까지도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해오고 있다. 특히, 「소년조선일보」을 통해서는 1975년부터 무려 30년 넘게 작품을 선보임으로써 세대를 이으며 독자층을 형성해왔다. 주요 캐릭터로는 ‘떠벌이’, ‘불쑥이’, ‘몽치’ 등이 있다.
만화뿐만 아니라 그는 일러스트에서도 활동이 두드러졌는데, 1981년에 결성된 한국 최초의 일러스트레이터 모임 ‘한국 무지개 일러스트회’ 회원으로 활동해오고 있다. 또 야구를 좋아했던 취미(1979년에 개최된 제1회 문화예술인 야구대회에서 타격상까지 수상한 바 있다.)를 살려 최근에는 <알기 쉬운 일러스트 야구규칙>(조해연 지음, 2001)에서 일러스트를 담당하기도 했다. 반세기에 가까운 창작활동의 역량은 1997년부터 2001년까지 동아?LG국제만화 페스티벌 심사위원 활동을 통해 다음 세대에게 용기를 돋우는 것으로 이어진 바 있다.
* 참고자료 : <한국만화인명사전>, http://rainbowillust.com
2006년 10월 vol. 44호
글 : 김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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