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의 놀라운 기록자, 박건웅 작가
그래픽 노블 작가 중에는 한 가지 주제를 깊이 파고들어 놀라운 성과를 보여주는 작가가 있다. 외국 작가로는 '조 사코'가 있는데, 그는 '코믹 저널리즘'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작가다. 주로 팔레스타인과 중동 문제를 다루는데, 보스니아 내전을 그린 <안전지대 고라즈데>, 팔레스타인의 현실을 다룬 <팔레스타인>, 1956년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서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학살한 사건을 다룬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비망록> 같은 작품은 어떤 역사책, 사회과학책보다 독자의 심장을 강하게 울린다.
한국에서는 그래픽노블 작가는 물론, 전체 만화가 중에서도 거의 유일하게 한국의 근현대사를 깊게 파고드는 작가가 있다. 흑백 판화 이미지로 유명한 박건웅 작가다. 박건웅의 작품은 대개 충격적이고 놀랍다. 그가 한국 현대사에서 발생한 중요한 사건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만화가가 유독 한국 현대사의 핵심만을 다루는 것은 보기 드문 경우다.
박건웅의 작품은 미학적으로도 뛰어나다. 그의 그림과 표현 방식은 많은 경우 판화적 표현 기법을 활용하는데, 흑백 판화는 표현의 강렬함과 함께 이미지가 드러내는 상징성이 탁월한 기법이다. '흑과 백'은 '선과 악'의 구도이자 '적과 아군'을 상징한다. '생과 사'를 드러내는가 하면, '옳음과 그름'을 판단하게 하고, '지옥과 천국'을 상징하기도 한다. 흑백 그림은 잔혹하고 처참한 사실적 묘사를 지우는 대신, 역사와 진실에 더 주목할 수 있도록 만든다.

아트 슈피겔만 <쥐>, 조 사코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비망록>이나 파올로 코시 <메즈 예게른>처럼 엄청난 학살을 다룬 작품이 없는 건 아니지만, 한국 근현대사는 세계 어떤 나라에서 일어난 투쟁과 비극보다 더 드라마틱하고 충격적인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 소설은 <여명의 눈동자>, <태백산맥>, <토지> 같은 작품들이 근현대사를 긴 호흡으로 보여주고 있지만, 박건웅 작가가 등장하기 전까지 현대사를 깊이 파고들어 만화로 창작하는 작가는 없었다(고 알고 있다).
박건웅 작가는 일제강점기부터 1980년대를 거쳐 현재까지 한국 현대사에서 일어난 가장 끔찍하고 어두운 역사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작업을 하고 있다. 독자들도 한 페이지를 넘기는 게 힘들고 괴로울 정도의 내용을 박건웅 작가는 많은 시간을 들여 고민하고, 연구하면서 한 컷, 한 컷 정성을 다해 완성도를 높이는데, 그가 이렇게 비극과 고통의 역사를 마주하는 힘에 관해 MANAGA 2호 인터뷰에서 한 말이 있다.
"고교 시절, 학교 옆의 통합병원에서 사망한 군인의 시신을 처리하는 할아버지를 만난 적이 있어요. 그 일을 하는 게 무섭지 않냐고 여쭈니, 불쌍한 젊은이들을 잘 씻기고 좋은 곳으로 보내주는데 뭐가 무섭냐며 이들이 나에게 고맙다고 할 거라고 무심히 말하더군요."
이 원고를 쓰면서 박건웅 작가와 서면 인터뷰를 통해 그가 한국 근현대사에 천착하는 이유, 만화 형식을 주로 흑백 판화처럼 그리는 이유에 관해 물었다.

Q : 박건웅 작가님은 데뷔작 <꽃>에서 시작해 최근작 <낙원>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작품의 소재나 주제가 한국의 현대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작가님이 한국 현대사에 천착하는 이유와 동기는 무엇입니까?
A : 처음 한국 현대사에 관심을 가진 것은 대학 시절이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역사라는 것이 학문의 하나일 뿐이고 그저 남의 일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91년 대학 신입생 시절 같은 신입생이던 명지대 강경대라는 친구가 경찰의 쇠 파이프에 맞아 숨진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 후에도 계속해서 수많은 젊은이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걸까’ 하며 궁금증이 쌓여만 갔습니다. 그러다 그 모든 것이 청산되지 못한 독재의 산물. 한국 사회의 여러 모순으로 인해 일어났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학교 도서관에 가면 미학책을 찾는 것이 아닌 역사책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리고 5‧18 등 고등학교 때는 몰랐던 숨겨진 역사를 알게 되고 적잖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당시 사건의 끔찍하고 비참한 상황보다, 여태껏 이러한 큰 일들이 일어났던 것을 모르고 살아왔다는 것이 더 큰 충격이었습니다. 왜라는 궁금증들은 쌓여만 갔고 그 후 한국 현대사의 숨겨진 이야기들을 그림으로 그려보자고 마음먹었습니다. 당시 그림으로는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전부 담아낼 수 없었고 결국 나는 만화라는 매체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막연하게 시작했지만 <노근리 이야기>, <짐승의 시간>, <그해 봄> 등 작품들이 쌓여갈수록 한국 현대사의 거대한 벽화를 그리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누군가로부터 “한국 현대사라는 땅을 파보면 숨겨진 보물과도 같은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온다”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야기는 역사책보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오래 남아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잊지 않아야 할 역사를 기억하기의 방식으로 만화라는 매체를 선택했고, 만화는 생각했던 것보다 그 이상의 힘이 있었습니다.
Q : 박건웅 작가님의 작품은 대부분 강렬한 흑백으로 마치 판화 느낌이 듭니다. 그림 형식을 판화처럼 단순하고 강렬하게 결정한 작가의 의도가 궁금합니다.
A : 처음부터 판화 형식의 그림을 고집한 것은 아니며 내가 하고자 하는 만화에 어울리는 그림체를 찾다 보니 판화 형식의 이미지들이 나온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고정된 그림체를 고집하지 않으며 각각의 이야기에 가장 어울리는 그림체를 찾아 표현합니다.) 특히 민중미술의 끝자락 세대로서 선배님들의 칼로 새긴 듯한 목판화 그림들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마치 어둠에서 빛을 파내는 작업과도 같다고 여겨졌습니다. 그 후 다색목판화 같은 <꽃>을 제외하곤 흑백 스타일의 작품을 계속 만든 것은, 어떤 특별한 철학적인 이유라기보다는 제작비를 적게 들이려 선택한 것입니다.
저의 작품이 보통 600페이지가 넘어가는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기 때문에 컬러 작업으로는 막대한 제작비를 출판사가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에 비해 흑백은 다소 부담이 적은 제작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흑백으로 제작하면 할수록, 컬러에 비해 독자들의 상상력을 높일 수도 있으며 작가 역시 컬러 배치에 쓰일 노력을 인물의 감정선이나, 칸 분할, 다양한 연출에 쏟을 수 있다는 장점을 발견하였고 짧은 제작 과정도 효과적이었습니다.
특히 독자들의 상상력을 높일 수 있다는 말은 작가가 지정한 여러 가지의 색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흑백 안에서 독자들이 스스로 컬러를 상상하며 찾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누군가 <노근리 이야기>에 대해서 “만약 이 책이 컬러였다면 책을 다 보지 못하고 덮어버렸을 것이다”라고 하는 평을 봤는데 이것이 바로 흑백만화만이 할 수 있는 힘을 보여줍니다.
작가도 마찬가지입니다. 흑백 작업은, 어쩔 수 없이 한국 현대사의 비참한 상황을 그려야 하는 작가 역시 표현의 부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그래픽 노블 작가에게는 강하고 깊은 서사와 함께 개성 있는 그림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문자나 기호보다는 이미지가 그래픽 노블의 주제를 더 잘 드러내는 것은 물론이고, 이미지가 핵심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런 점에서 박건웅 작가의 그림은 다른 그래픽 노블 작가들과 분명한 변별을 보인다. 강렬한 흑백의 이미지와 판화 같은 날카로운 선이 있는가 하면, <바람이 불 때>처럼 무채색 유화의 분위기가 나는 그림도 있다. 전체적으로 흑백의 강렬함 속에서 날카로운 풍자를 드러내는 작가의 작품은, 작품의 주제와 이미지의 형식이 완벽하게 결합한 보기 드문 경우에 속한다.
박건웅 작가가 소재로 삼는 작품들 가운데는 읽기 불편하고, 힘든 작품이 꽤 많다. 이건 물론 작가의 책임이 아니라, 한국에서 발생한 역사적 사건의 진실을 아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현대사의 끔찍한 비극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참혹하고 잔악하며, 끔찍하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고통스럽다. 작가는 그런 역사의 비극을 이미지로 그려야 하므로, 독자보다 더 큰 트라우마를 겪기도 한다.
박건웅 작가는 첫 작품 <꽃>에서 한국 현대사를 상징적으로 그리기 시작한다. 일제강점기로 시작하는 역사 속 한 노인의 삶은 강제노역, 학도병, 종군위안부, 해방 분단, 이념 대립, 빨치산 활동 등 비극적 역사를 압축해 강렬한 인상을 준다.

이후 <아리랑>에서는 독립운동가 김산의 일생과 함께 이름을 남기지 못하고 스러진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삶을 다시 들여다보는 작업을 했고, <경성을 쏘다>는 독립운동가 김상옥 열사의 무장투쟁을 그리고 있다. 무장투쟁은 주로 한반도 북부나 중국 연변 등지에서 벌어진 것으로 알려졌지만, 국내에서 드물게 무장투쟁을 벌인 김상옥 열사의 이야기는 널리 알려지지 않아 박건웅 작가의 작품은 더욱 의미가 있다.
독립운동가를 다룬 또 다른 작품들로는 <제시 이야기>와 <옌안송>이 있다. <제시 이야기>는 상해 임시정부에서 김구 선생의 주례로 결혼한 양우조와 최선화가 1938년 ‘제시’를 낳아 기르는 이야기로, 1945년 해방을 맞아 부산에 도착할 때까지의 육아일기와 독립운동 이야기가 함께 그려진 귀한 작품이다.
<옌안송>은 독립운동가이자 유명한 작곡가인 정율성의 일대기를 다루는 작품으로, 한국보다 오히려 중국의 독립운동사에서 더 유명한 인물이다. 그는 중국에서 국가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중국인민해방군 행진곡’을 작곡하는 등 항일 투쟁을 위한 음악을 많이 작곡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가 작품의 한 줄기라면, 해방 이후 이승만 독재 정권에서 벌어진 학살 사건도 박건웅 작가에게 주요한 의미가 있다. <홍이 이야기>는 제주 4·3 당시 정부군과 경찰 토벌대, 서북청년단 등에 의해 제주 사람들이 학살당하는 내용을 그리고 있다.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 역시 이승만 정권에서 벌어진 최대의 학살 사건인 ‘보도연맹 학살 사건’을 다룬 작품이다.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 국군, 헌병, 반공단체 등이 ‘국민보도연맹원’이나 양심수 등을 포함해 10만 명에서 최대 120만 명으로 추산되는 민간인을 학살한 사건인데, 국가가 저지른 범죄의 진상이 아직도 명확하게 드러나지 못한 현실이다.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이 보도연맹 학살 사건의 극히 일부를 드러내는 작품이라면, <악마의 일기>는 ‘보도연맹’ 학살 사건을 매우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 이승만 정부는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였다. 남한에서 좌익 활동을 했던 사람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목적으로 '보도연맹'이 조직된다. 보도연맹을 기획·관리한 이들은 한때 좌익 활동을 하다 전향한 배신자들과 극우, 친일 매국노, 북한에서 내려온 개신교 단체인 '서북청년단' 등이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권은 보도연맹 가입자들을 '예비 검속'이라는 명목으로 불법 체포해 감옥, 큰 건물, 동굴 등에 몰아넣어 '체계적'으로 학살했다.
‘한국전쟁’ 때 이승만 정권이 국민을 학살한 사건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황금동 사람들>은 북한군에 부역했다는 누명을 씌워 군인들이 일산 일대 주민 150여 명을 금정굴에서 학살한 사건을 그리고 있다.
국군이 저지른 사건은 아니지만, 동맹군으로 여겨졌던 미군이 피난하던 사람들을 노근리 철길 아래 굴다리에서 400명 넘게 학살한 사건을 다룬 <노근리 이야기> 역시 한국전쟁 당시 미군(그리고 이승만 정권)의 전쟁 범죄를 다룬 작품이다.
1970년대, 박정희 독재정권 때 벌어진 야만적 사건을 다룬 작품으로 <그해 봄>과 <짐승의 시간>이 있다. <그해 봄>은 1975년 ‘인혁당 사건’의 희생자 여덟 명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짐승의 시간>은 1980년 군부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한 전두환 독재 시절, 민주화 투쟁의 선봉에 섰던 김근태 민청련 의장이 치안본부 대공분실(남영동)로 끌려가 고문을 당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어느 혁명가의 삶>은 감옥에서 36년을 복역한 비전향 장기수 허영철의 삶을 그린 작품이다. 일제강점기 때는 노동자로, 해방 이후에는 남로당 인민위원장으로, 전쟁 이후 분단 시기 북한에서 공작원으로 남한에 파견되었다가 체포되어 36년간 수감된 이야기를 그린다.

2025년 6월에 출간한 새 작품 <낙원>은 박건웅 작가의 작품으로는 최초로 우주 SF 형식을 선보인다. 미래와 우주 공간이라는 배경과 형식을 가져와 한국에서 가장 비극적 사건인 '세월호 참사'를 다루는 내용으로, 작가는 '기억'과 '시간'을 강조하고 있다.
비극을 다룰 때, 작가가 비극에 몰입하면 오히려 독자는 감정에 쉽게 빠져들지 못한다. 온전한 창작이 아닌 역사적 사건을 다룰 때, 특히 독자들이 대부분 그 사건을 알고 있으면, 작가는 오히려 작품의 소재로 인한 어려움을 겪는다.
그렇기에 박건웅 작가는 '세월호 참사'를 한 발 떨어져 바라본다. 희생자와 가족의 슬픔과 억울함을 직접 말하는 건 오히려 그 비극의 깊이를 훼손할 수 있다는 걸 알기에, 단지 그들의 절실함을 드러내면서 시간과 기억을 중요한 모티프로 삼는다.
미래의 시간과 공간, 우주, 고도로 발달한 과학기술, 우주선의 대중화, 시공간의 확장, 공간 이동과 같은 내용은 SF 작품에서 당연하게 나오는 소재지만, 이 작품에서는 실종된 '별바다호'의 실종자를 찾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동한다.
그건 현실에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기억'과 '시간'의 간극이기에, 작가는 미래와 SF라는 장르를 통해 희생자와 가족이 만나고, 억울하게 죽을 수밖에 없었던 참사 희생자가 죽지 않고 동면 상태에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작가뿐 아니라 '세월호 참사'를 지켜본 모든 국민의 한결같은 바람이고, 지금도 우리 마음에는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이 여전히 살아 있기에 작가의 상상력은 독자의 바람과 일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