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온도’, 이웃과의 거리 그리고 K의 감성을 만나다
글_ 김영민 시각 아티스트
지난 7월 10일, 반가운 얼굴들이 한국만화박물관을 찾았다. 1층 기획전시실에서 열린 「이웃의 온도」 전시 개막 행사를 작가들이 소중한 작품과 따뜻한 외출로 채워준 것이다.

「이웃의 온도」는 <그대를 사랑합니다>(강풀)를 비롯해 2024 월드웹툰어워즈 본상 수상작 <더 그레이트>(광진 글, 지민 그림), <안녕 커뮤니티>(다드래기), <제철동 사람들>(이종철), <정순애 식당>(아르몽) 등 친근한 만화 웹툰으로 “우리는 누구나, 누군가의 이웃입니다”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전시다.
전시장을 찾은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 앞에서 수줍지만 따뜻하고 진솔하게 관람객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만화가 및 관계자들과 전시를 둘러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비대면이 일상화된 디지털의 시대, 만남과 소통을 통해 온기를 느낀다는 전시의 의미가 그대로 담기는 시간을 만들어준 것이다.
전시가 더욱 특별했던 이유는, 더위에 지친 한여름에 ‘온도’를 소재로 한다는 점과 바로 그 자리에서 얼마 전까지 이탈리아 만화전이 열렸다는 점 때문이었다. 전시를 봤던 이들은 느꼈겠지만, 이탈리아의 만화들은 생생하고, 사회의 첨예한 모순을 날카롭게 드러내는 사실적인 그림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 현실적인 만화들은 이제 따뜻한 밥 한 그릇, 소박한 우체통, 그리고 이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공중전화로 채워졌다. 어쩌면 그 시선의 다름, 한여름에도 ‘온도’를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감성이 바로 우리 ‘K’의 힘이자 웹툰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는 게 아닐지 생각하게 된다. 그 시선의 차이, 우리의 다름을 찾아 「이웃의 온도」 속으로 들어가 본다.
폭염과 온기 사이의 색온도
전시장 입구에 새겨진 서문의 중간에 이런 질문이 있다.
“이웃의 온도는 얼마나 될까요?”
참으로 ‘온도’에 민감한 시기이다. 6월부터 몰아친 높은 습도와 타는 듯한 폭염이 일상을 너무도 힘들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한낮의 외출과 만남에 인색해지는 건 누구나 마찬가지일 듯하다.
문득 한 양심수의 편지가 떠오른다.
정치법의 탄압이 빈번하던 시절, 신영복 교수가 20년 20개월 동안 복역하며 쓴 편지와 글들을 엮어 만든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속 한 구절이다.
1985년 8월 28일. 대전에서 ‘여름 징역살이’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여름 징역의 열 가지, 스무 가지 장점을 일시에 무색케 해버리는 결정적인 사실 - 여름 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 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 사람을 단지 37도의 열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번 여름의 힘겨움이 어쩌면 뜨거움 때문만이 아닌 우리 일상의 버거움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함께 떠올랐다. 그리고 높은 ‘온도’가 주는 불편함을 단지 피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생각하게 됐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빛이 있고, 또 거기에는 항상 온도가 함께 있기 마련이다. 빛과 온도는 우리가 보는 세상의 색을 구성한다.
‘색온도’란 빛의 색깔을 온도로 나타내는 지표로, 단위는 켈빈(K)을 사용한다. 색온도가 낮을수록 붉은색을 띠고, 높을수록 푸른색을 띤다. 일반적으로 따뜻한 느낌은 색온도가 낮다. 대략 2,000K~3,000K의 색온도는 붉은색, 노란색 계열로 따뜻하고 아늑한 느낌을 준다. 주로 저녁노을, 촛불, 백열등에서 볼 수 있다. 낮아서 더 다가가기 쉬운 온도일지 모르겠다.
가정이나 사무실에서 흔히 사용되는 전구색이나 주백색 조명은 3,000K와 5,000K 사이의 중간 색온도를 이룬다. 주황색, 노란색, 흰색이 섞인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그리고 5,000K 이상 높은 색온도는 푸른색, 흰색 계열로 차갑고 밝은 느낌을 준다. 주로 야외의 맑은 날씨나 형광등에서 볼 수 있다.
결국 우리가 온도를 피하고 싶더라도, 우리의 일상은 그 온도 사이에 존재한다. 그러다 보니 우리 역시 색에서 온도와 감성을 찾고, 그 거리와 표현을 달리하는 데 익숙하기도 하다. 차가운 블루부터 화끈한 레드, 그 사이 노란색 백열등의 따뜻한 온기와 같은 감성과 콘텐츠가 바로 우리의 상상과 함께하는 데 익숙한 색온도라 할 수 있다.
사실 한여름에도 밤에 피운 모닥불에서 멀어지면 아쉬움을 느끼는 게 인간이다. 온기는 뜨거움에서 조금 멀어졌다가도 따뜻함을 잊지 못해 다시 가까워지기를 반복하게 만든다. 그 온기를 느끼게 해주는 적절한 온도는 결국 적당한 거리에서 비롯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 거리를 맞추는 게 참으로 어려운, 그리고 의도적으로 만남을 멀리하고, 거리를 넓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거리는 관심에서 비롯된다. 당신이 경험하고 느끼는 당신 세상의 온도는 어떤가? 그건 당신과 세상 사이의 거리, 그리고 세상이 당신에게 보이는 관심을 알려주는 척도가 될지도 모른다. 우리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해답이 이번 전시에 담겨 있을 수도 있다.
우리 시간의 파노라마, 「이웃의 온도」

전시의 시작, 여정의 첫 만남은 하얀 벽 위에 단정하게 새겨진 전시 서문이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이웃의 존재를 잊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높은 담장과 굳게 닫힌 문 너머로 스며드는 것은 때로 무관심이고, 때로는 경계심입니다.
하지만 그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따뜻한 빛과 정겨운 소리들은 여전히 우리 곁에 있는 이웃들의 온기를 말해줍니다.
만화는 우리가 놓치고 있던 이웃의 이야기를 섬세하게 포착해 냅니다. 너무 늦기 전에 손을 내미는 사람들 말없이 곁을 지키는 존재들, 편견과 오해를 넘어 다가서는 용기의 순간들 이 모든 일상의 장면들이 사실은 우리를 연결하는 소중한 실이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_ <이웃의 온도> 전시 서문
서문을 읽다 보면 그 옆에 누군가 노려보는 듯한 시선이 느껴진다. 고개를 돌려보면 노년의 신사가 묘한 미소를 띠고 바라보고 있다. 그 뒤에 “이 구역의 꼰대는 나다!”라는 자극적이고 웃음이 절로 나오는 겁박과 함께 <안녕 커뮤니티>의 캐릭터들이 올망졸망 모여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다드래기 작가의 2020년 작품인 <안녕 커뮤니티>는 작은 동네 문안동에서 매일 안부를 묻는 ‘고독사 방지 모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초고령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고독사’는 만나기 힘든 사연이 아니다. 홀로 남은 노인들, 아무도 찾지 않는 동네, 그리고 아직도 가부장제의 권위를 내세우는 세대 갈등은 우리의 오늘이기도 하다.
어렵고 힘들 법한 일상이지만, 그곳의 노인들은 개성 만점에 용기백배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들에게서는 쉽게 지지 않을 듯한 생명력과 그들이 거쳐온 삶의 여정이 보인다. 재미있는 캐릭터들 사이로 엄마와 딸이 담긴 가족사진도 보인다. 오늘의 노인은 어제의 청장년이었고, 딸의 내일이기도 하다.
<안녕 커뮤니티>의 코믹한 캐릭터와 인상적인 사진 너머로는 젊고 건강한 작업자들이 살짝 보인다. 한적한 오늘의 마을 뒤편에는 쇳가루가 구수하게 느껴지고 땀내가 물씬 나는, 분주한 과거 공단 산업역군의 일상이 그려져 있다. <까대기>의 이종철 작가가 자신의 고향인 포항을 일곱 살 꼬마의 시선으로 그린 자전적 스토리, <제철동 사람들>(보리, 2022.8)이다.

“손님으로 가득 찬 식당에는 늘 음식 냄새와 함께 쇳가루 냄새가 났다. 그 냄새가 싫지 않았다.”
중간에는 작가의 콘티가 크게 전시되어 있다. 거친 선과 흔들리는 형태는 억세고 질긴 산업의 시대를 파란만장하게 살아온 그들, 우리 부모와 문안동 어르신의 어제가 그대로 새겨져 있는 듯하다.

거친 시간 속 따뜻한 풍경과 기억의 앞에는 든든한 집밥이 그려져 있다.
아르몽 작가의 <정순애 식당>(2019~2021)이 맛깔스러운 한식 메뉴와 함께 다음 여정으로 준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식당을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는 적지 않다. 대부분 일상의 힘겨움을 이겨내는 소소한 힐링을 다루고 있는데, 그건 음식이 주는 따뜻함과 밥 한 끼에 담긴 마음 때문일 것이다. 특히 한국 사람들은 ‘밥심’으로 살아간다는 말을 자주 한다. 끼니를 걱정하던 어머니의 마음과 손님을 제대로 대접하려는 우리의 전통이 바로 그 말에 새겨져 있다. 어쩌면 현재의 ‘먹방’은 그 전통의 변주가 아닐까 싶다.
한 끼의 추억을 만끽한 후 고개를 돌려보면 넓고 찬란한 전시를 만나게 된다. 평범한 나날의 ‘찬란함’을 깨닫게 해주는 광진, 지민 작가의 <더 그레이트> (23.8~24.10)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일상의 가치, 가족의 소중함, 이웃의 따뜻함을 잊고 살아간다. 그리고 일상이 더해지면서 만들어지는 위대한 이야기에도 둔감할 때가 많다. 이제 시선을 맞추고, 거리를 좁혀야 할 때다.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어제부터 오늘은, 소녀에서 어머니로의 여정은 빠르게 흘러간다. <더 그레이트>는 소녀, 여자 그리고 엄마로의 그 ‘찬란한 여정’과, 그 속 보통의 일상이 가진 위대함과 소중함을 절절하게 보여준다.
그렇지만 시간이 흘렀다고 모든 게 끝나는 건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사랑과 온기를 꿈꾸고 있고, 인생은 항상 새로운 출발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인생의 또 다른 시작을 보여주듯 <정순애식당>과 <더 그레이트> 사이로 작은 입구가 있다. 거기에는 강풀 작가의 <그대를 사랑합니다>(2007.4~9)가 기다리고 있다.
<순정만화>, <이웃사람>, <조명가게> 등 우리 일상을 다르게 보고, 자신만의 언어와 애정으로 표현하는 강풀 작가는 <그대를 사랑합니다>에서 70대 후반의 삶과 사랑을 담아냈다.
비록 몸은 늙고, 정신은 예전 같지 않을지라도 감정마저 늙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길고 힘겨운 삶의 여정에서 다듬어지고 넓어질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잔잔하고 쉽게 꺼지지 않는 따뜻한 온기를 찾는 데 더욱 세심하고 적극적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기와 그 거리를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그대를 사랑합니다>의 영상을 보고 나오는 길에 작고 소박한 우체통을 만나게 된다. 관람객이 직접 엽서를 작성하는 ‘느린 우체통’이다. 이웃이나 소중한 사람에게 편지를 써 전시장 내 우체통에 넣으면, 박물관이 이를 실제로 발송하는 아날로그 감성 이벤트라고 한다. 한번 주변을 둘러보고, 희미해진 온기를 찾아 오늘의 친구, 내일의 가족, 그리고 어제의 나에게 한번 편지를 써보는 것이 어떨까?
길지 않은 전시의 여정은 한국의 근현대사와 함께 개인의 여정과 감성을 파노라마처럼 펼쳐놓았다. 만화와 함께 마치 동네 마실을 다녀오듯 만난 일상은 가슴 속에 색다른 온기가, 머릿속에는 잊고 있던 추억의 상상이 떠오르게 할지도 모른다.
어찌 보면 인간이 사랑했던 한여름 모닥불의 온기는 우리 일상을 버텨내는 삶의 힘이고, ‘K’라는 이름으로 세계를 누비는 우리만의 감성이 아닐까 싶다. 이번 전시는 우리만의 감성과 스토리, 그 찬란함과 질긴 생명력을 선물로 가득 전해주는 듯하다.
「이웃의 온도」는 2026년 5월 10일까지 한국만화박물관에서 전시된다. 지친 여름, 무료하고 외로운 시간이 생긴다면 잊힌 온기를 찾아 한번 여행을 떠나봄이 어떨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