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판기에서 내가 가장 원하는 게 나온다면?’ 이런 엉뚱한 상상에 미스터리 스릴러의 감성을 입혀 웹툰 독자들 사이에 인기를 얻고 있는 작품이 있습니다. 바로 <자판귀>입니다.
지난해 한국만화영상진흥원과 네이버가 공동주최한 웹툰 최강자전에서 최종 3위(우수상)를 차지하고 올해 3월 정식으로 독자들과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작품에는 빨간 색의 묘한 자판기 하나가 등장합니다. 동전을 넣고 ‘이용 시작’ 버튼을 누르면 이용자가 무의식 속에서 가장 원하고 있던 무엇인가가 나옵니다. 그것은 물건일 수도, 물건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용자당 딱 한 번, 최대 일주일간 이용할 수 있고, ‘이용 마침’ 버튼을 누름과 자판기에서 나왔던 것은 자동회수 됩니다. 그리고 한 번 이용한 사람은 더 이상 자판기를 볼 수가 없습니다.<자판귀>는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이 자판기를 이용하며 펼쳐지는 이야기를 아이돌 연습생 도영이를 연결고리 삼아 에피소드 별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에피소드 마다 흥미로운 소재와 반전, 또 어떤 에피소드에서는 가슴 뭉클한 감동까지 전달합니다. 이야기의 결말은 어떻게 될까 미리 상상하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2019년이 더욱 기대되는 신진 작가 중 한 명으로 <자판귀>의 윤정민 작가를 만나봤습니다. 아래는 엉뚱 발랄하고 유쾌한 윤 작가와의 일문일답입니다.
Q. <자판귀> 작품에 대한 아이디어는 어떻게 떠올리게 됐나요.
A. 지난해 최강자전 공고가 나고 어떤 작품을 그릴까 고민이 많았어요. 그러다가 무심코 들여다 본 인터넷에서 세계의 다양한 자판기를 다룬 기사를 흥미롭게 읽었는데, 그것을 보면서 내가 원하는 게 나오는 자판기가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Q. 최강자전 도전은 지난해가 처음이었나요.
A. 최강자전이 기존에는 대학생 대상이었다가 지난해부터 일반인까지 참가 자격이 확대되어 도전하게 됐습니다. 그 이전에는 베스트 도전, 도전 만화 등에 작품을 올려본 적이 있어요. 베스트 도전에서는 양녕대군을 주인공으로 한 사극물 한 편과 학원물 한 편을 완결 지었죠. 개인적으로 완결하지 못한 작품도 대여섯 개 있고요. 만화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카페 알바를 하면서 줄곧 웹툰을 그렸습니다.
Q. 대학에서 만화 애니메이션을 전공하셨나요?
A. 원래 애니 관련 학과를 갔었는데 그 당시에는 다른 걸 배우고 만화는 혼자 해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자퇴를 하고 인문계열 전공으로 다시 입학했어요.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그때 관련 학과를 꾸준히 다녔어도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는 해요.
Q. 다시 선택한 전공은 웹툰에 도움이 되는?
A. 그렇지는 않고요(웃음). 일본어 학과를 갔는데, 이유가 사실 단순해요. 제가 일본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을 정말 좋아하는데 어느 날 미야자키 감독이 제 꿈에 나온 거예요. 꿈속에서 미야자키 감독에게 ‘나는 당신을 정말 좋아한다, 당신처럼 장치 큰 만화가가 될 거다’ 하고 말을 건네고 싶었는데 일본어를 몰라 한마디도 못하고 잠에서 깼어요. 그래서 일본어를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죠.(하하)
Q. 작가명은 필명이 아니라 본명인 것이지요?
A. 베스트 도전에서 연재할 때는 필명을 썼어요. 그러다가 정식 데뷔를 하면서 본명을 사용했지요. 제 이름을 널리 알리고 싶었거든요.
Q. 에피소드를 구상할 때 큰 주제를 먼저 잡나요, 아니면 구체적인 이야기를 먼저 떠올리나요
A. 에피소드 마다 조금씩 다른 데 대개 자판기에서 나오는 아이템을 먼저 생각해요. 그리고 거기에서 생겨날 수 있는 스토리를 만들어 내죠.
Q. 이야기를 끌고 가는 중심으로 아이돌 지망생을 택하게 된 배경이 있을까요.
A. 최강자전 때 원래 설정은 아이돌 지망생이 아니고 힙합 래퍼 지망생이었어요. 그런데 독자들이 아이돌 지망생으로 보더라고요. 분위기가 그렇게 흘러가니까 자연스럽게 굳어진 것 같아요. 아이돌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가 많지 않아서 인터넷이나 유튜브 등을 통해 아이돌에 대해 공부하고 더 알아보려고 하고 있지요. 최강자전 때는 도영이가 비중이 없었어요. 정식 연재를 하면서 중심인물로 세우려고 캐릭터 비중을 크게 키웠지요. 프롤로그에 도영이에 대한 이야기도 추가하기도 하고요. 최강자전 때는 자판기 외형도 단순했는데 미스터리 장르라 아무래도 있어 보여야 하지 않을까 해서 외형도 많이 수정했습니다.
Q. 아무래도 에피소드 마다 반전에 대한 고민도 많을 것 같습니다. 영화나 소설 등 다른 장르를 통해 공부도 하는지요. 혹시 생각나는 작품이 있다면.
A. 미스터리를 잘하려고 공부해야지 이런 생각은 아니고요. 평소에 엉뚱한 상상을 많이 하는 데 그런 것이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초등학교 때부터 만화를 그려서 친구에게 보여줄 정도로 그리는 것은 정말 좋아해도, 만화책을 자주 보는 편은 아니에요. 그런데 일본 만화 ‘라이어 게임’은 정말 정말 재미있게 봐서 기억에 남아요. 닮고 싶은 작가가 있다면 ‘라이어 게임’을 그린 카이타니 시노부가 아닐까 합니다.
Q. 독자 반응을 보면 이야기가 살짝 불친절하다는 반응도 있습니다. 너무 열린 결말이라고요.
A. 저 스스로 명확한 결말보다는 좀 더 상상할 수 있는 결말을 좋아해요. 팽이가 돌아가다가 살짝 흔들리는 장면으로 끝나는 영화 <인셉션>의 결말처럼요. 그런 결말이 너무 좋아요. ‘1은 1, 2는 2’ 이렇게 알려주면 이야기가 끝나고 나서 생각할 게 없다고 봐요. 보고 나서 끝없이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걸 좋아하는 성향이 작품에 반영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독자 분들이 결말이 너무 열려 있다고, 좀 닫아달라고 하더라고요(웃음). 너무 친절하면 이야기가 어설퍼질 수 있어서 스타일을 고수하려고 하지만 독자 여러분 의견도 수렴해서 너무 답답하지는 않게 해보겠습니다! 그런데 추리하면 재미있는 않으신가요? 작가 입장에서는 독자 분들이 각자의 시선으로 해설해주는 댓글을 보는 재미도 있어요. 제 의도와는 다르지만 제가 생각하지 못했던 방향도 있어 이런 것도 좋네, 하고 감탄하기도 합니다.
Q. 연재 초반에는 ‘작가의 말’을 통해 독자와 적극 소통하려는 모습을 보였는데요, 차차 잦아든 느낌입니다.
A. 그게 약간, 독자들이 작품을 심각하게 봤는데 작가가 떠들고 있으면 독자들이 작품에 몰입하는 데 방해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자제하고 있지요. 대신 인스타그램(bohejm)을 통해 소통하려고 해요. 인스타에 많이 와주셨으면 합니다!
Q. 그림은 독학한 것인지요?
A. 학창 시절에 전문적으로 배우진 않았어요. 고3 때 입시미술을 잠깐 하기는 했었는데 그 당시에는 말 안 듣는 학생이라 열심히 안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그리고 싶은 데로 그리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예를 들자면 굉장히 어려운 구도로 컷을 연출해야 하는 장면을 편하게 그리는 식이에요. 앞으로 많이 익히고 공부해야죠.
Q. <자판귀>는 단순히 재미만 추구하는 작품은 아닌 것 같습니다. 금전만능주의나 외모지상주의, 학교 폭력 등을 비판하기도 합니다. 권선징악 느낌도 있습니다만. 또 어떤 이야기가 준비되어 있을까요.
A. 일부러 만화를 통해 독자들에게 교훈을 준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절대 아니에요. 일단 재미있는 작품을 그리고 싶은 게 가장 커요. 나쁜 사람은 벌을 받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 데 그런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반영되어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 같기도 하지요. 다음 이야기는…머릿속에 여러 아이디어가 들어 있는데 어떤 것을 먼저 깨낼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어요. 차차 풀어낼 생각입니다.
Q. 만화가에 대한 꿈을 키우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A. 그냥 자연스럽게 갖게 됐던 것 같아요. 어렸을 때 TV를 보는 데 미야자키 감독의 <미래소년 코난>이 나오는 거예요. 그때는 그 작품이 <미래소년 코난>이라는 것도 몰랐어요. 낭떠러지에서 곧 떨어질 것처럼 버티고 있던 한 소녀(라나)가 손에 힘이 빠져 결국 떨어지는데 한 남자애(코난)가 날아와서 탁 받아요. 그 장면을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에 수첩에다가 낭떠러지에서 소녀를 구해주는 남자아이의 모습을 계속 그렸어요. 그렇게 시작했던 것 같아요. 그게 조금씩 발전해서 수첩 한 페이지마다 한 장면씩, 나름의 이야기를 그리려고 했지요.
Q. 최강자전 이전과 이후가 얼마나 달라졌을까요.
A. 정말 많이 달라졌죠. 주변 친구들이 취업하고 평범한 삶을 살 때 저는 만화를 계속 꿈꿨으니까 취업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무조건 만화가로 데뷔한다는 생각으로 알바를 하면서 만화를 혼자 그렸죠. 주변 사람들에게는 당당하게 알바 한다고 말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그래서 알바도 (아는 사람이 없을 법한 동네로) 멀리 다니고 친구들과 연락도 잘 안 해서 잠수를 탔다고 여길 정도였지요. ‘이런 작품을 정식 연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때 세상에 나타나자!’ 그런 생각이었어요. 그렇게 살았는데 최강자전에서 입상하고, 주변 사람들이 먼저 연락하고 축하해줬지요. 정말 고마웠어요. 최강자전 이후로 사람다운 삶을 살게 됐다고 할까요. 그동안 엄마가 응원을 많이 해줬어요. 집에서 만화만 그리고 있는 저에게 그냥 취업해서 평범하게 월급 받으며 살면 안 되겠냐고 말씀하신 적도 있기는 해요. 그래도 저를 믿고 기다려주시고 응원해주셨어요. 솔직히 부모님이 저에게 집에만 있지 말고 당장 나가서 돈 벌어오라고 했다면 작업을 못했을 것 같아요. 엄마가 응원하고 기다려줘서 (최강자전도) 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Q. 고등학교에 진로 고민 일일 강사로 초대받은 적이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주셨나요.
A. 거창한 건 아니에요. 고1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눴는데요, 제가 고1 때 그렸던 만화도 보여주며 이야기를 나눴죠. 저는 댄스 동아리도 했었는데요, 그리고 싶은 거 그리고, 춤추고 싶은 거 춤추며 생활했는데 지금 돌이키면 그렇게 나빴던 것 같지는 않다. 하고 싶은 게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도전했으면 좋겠다는 그런 이야기를 해줬습니다.
Q. 장편에 대한 꿈도 있을 것 같습니다.
A. 당연히 기회가 생기면 장편에 도전할 생각이에요. 사극 만화에 매력을 느껴요. 베스트 도전에서 했었던 양녕대군 관련 작품을 제대로 다시 그려보고 싶은 생각도 있습니다. 어릴 때 양녕대군과 관련한 책을 워낙 강렬하게 봐서 언젠가 만화로 그려야 겠다 생각했었죠. 학생 때 돈도 없고 해서 책방에서 열 시간 동안 양녕대군에 대한 책을 읽고 집에 가기도 했었는데 막상 만화를 그리니까 그런 지식이 잘 안 들어가더라고요(웃음). 하지만 일단은 <자판귀>를 오래해보고 싶어요. 지금은 어떻게 하면 <자판귀>를 재미있게 그릴 것인가 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답니다.
Q. 10년 뒤에는 어떤 작가가 되고 싶으세요?
A. ‘윤정민 만화’하면 독자들이 믿고 보는, 그런 작가가 되고 싶어요. ‘이 작가의 차기작은 꼭 봐야지’ 그런 느낌을 주는 작가요. 윤정민 브랜드라고 할까요. 윤정민의 만화는 재미있다!
Q. 마지막 질문입니다. 만약 작가님이 <자판귀>에 나오는 자판기에 동전을 넣는다면 어떤 아이템이 나올 것 같나요?
A. 음…, 제 경우는… 제가 만약 자판기를 이용하게 되면 살아오면서 정말 행복했던 순간들을 한 번 더 겪어보는 기회가 있었으면 해요. 미래보다는 과거를 보고 싶어요. 미래를 알면 살아가는 게 재미없을 지도 모르니까요. 과거에서 최고로 행복했던 순간을 꼽자면 아무래도 최강자전 입상인 것 같아요. 4강전에서 3등이 거의 확실시 된 날, 4강전 종료 하루 전이었는데 제 깊은 곳에서 감정이 폭발해서 방문을 닫고 정말 많이 울었어요. 힘들었던 지난날이 생각나서 그랬던 것 같아요. 행복한 눈물을 그 때 처음 느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