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안녕하세요, 이무기작가님. 소개부탁드립니다.
A. 「곱게 자란 자식」을 마친 뒤, 재활운동과 차기작 준비로 청빈한 삶을 보내고 있는 이무기입니다. 귀한 지면을 통해 독자님들과 만나게 되어서 너무나 반갑습니다.
Q. 웹툰 「곱게 자란 자식」으로 2019년 부천만화대상을 수상하셨습니다. 수상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A. 저의 작가 필명이 이무기인데 굉장히 용된 기분입니다. '부천만화대상후보작에 「곱게 자란 자식」이 오른 줄 미리 알았다면 머리를 빡빡 밀지 않았을텐데...' 라는 자책과 수상 자체로써는 대단한 영광이라 기쁘면서도 내가 자격이 되나? 라는 민망한 마음이 훨씬 앞섭니다.
Q. 「곱게 자란 자식」은 작가님의 전작들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른데요, 처음에 소재는 어떻게 선정하셨나요?
A. 「곱게 자란 자식」을 만들기 이전까지는 작가라고 불리는 것 자체가 부끄러울 정도로 만화에 소홀하여 뭔가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끼던 와중, 위안부와 강제 노역 등 가해국의 뻔뻔한 행태는 안 그래도 피해의식만 쌓여있던 제 삐딱한 심사를 뒤틀어 놓기에 차고 넘쳤으며 불만의 끝은 모두 그곳으로 집중되었습니다.
「남이 지나가면서 우리 애들을 걷어찬다.우리 애들을 개처럼 끌고 가는 데도 나는 가만히 있는다. 왜냐하면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는 시절이니까.」
저의 애들을 통해 감정이입되다보니 열이 받아 얼마 간은 컨디션이 다운되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이 기분을 나만 당할 수 없다. 웃고 있는 너도 느껴봐라. 이런 못된 의도가 있던 것도 사실입니다.
상당히 조심스럽고 민감한 소재라 처음으로 만화 작업에 진지하게 임했고 관련 자료를 모아 여러 차례 검토하다보니 분노도 단련이 되는건지 이야기를 냉정하게 풀어낼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Q. 이 퀄리티와 호흡으로 주간 연재를 하려면 사전 준비가 굉장히 많이 필요했을 거 같습니다. 작품을 준비하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셨나요? 준비기간엔 주로 어떤 준비를 하셨나요?
A. 머릿속은 온통 '일본군에게 머리채를 잡혀 끌려가는 깐난과 눈이 뒤집혀 도끼질을 하는 계춘'의 이미지만 가득찼던 터라 긴 고민끝에 준비하던 차기작을 엎고 약 8개월의 기간을 거쳐 「곱게 자란 자식」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2013년 8월 첫 예고편이 나간 날, 손에 일이 잡히지 않을 정도로 긴장한 걸로 기억합니다. 무거운 소재가 과연 독자님들께 통할까? 표준어를 쓰지 않아서 악영향이 있지는 않을까? 진지한 상황에서 개그쳤다가 욕만 먹는게 아닐까? 만화반응을 다 떠나 역사에 누만 끼치지 않으면 성공이다.
연재 당시, 알아서 조심하지 않으면 밉보일 것만 같았던 분위기의 시기라 더욱 외줄을 타는 심정이었고 곤두선 신경 탓인지 매주 마감 때마다 집안이 살얼음판이었다고 나중에서야 집사람이 전해주더군요.
애초 20화 분량을 예상했다가 회차가 늘어남에 따라 휴재도 많아졌는데 독자님들께 항상 죄송한 마음입니다.
Q. 자료 조사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료가 있다면?
A. 나쁜 외지인도 있는 반면 분명 좋은 외지인도 있었을텐테 너무 안 좋은 쪽으로만 치우쳐 표현하고 있는 게 아닐까? 공정성을 두고 흔들린 적도 있었지만 총검에 간난아기를 꽂고 히히덕거리는 일본군들 사진을 보며 "그래. 이제 절대 안 흔들린다"고 다시 굳게 마음을 다 잡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버마 에피소드 중 위안부가 하루에 80여 명의 군인을 상대한다는 내용은 일본군으로 전쟁에 참전한 미즈키 시게루 작가님의 만화에서 차용하였습니다.
Q. 만약 작가님이 일제강점기에 살았다면 어떤 삶을 사셨을 것 같은가요? 작품을 읽고 저라면 어땠을까 생각하니 전 너무 막막하더라구요.
A. 원고할 때마다 수 만 번 들었던 생각입니다. 내가 고문의자에 앉혀져 동료를 불어야 할 상황이라면 어땠을까?
"잠시만요. 왜 이리 급하세요? 전 말씀드릴 준비가 돼있거든요? 위험한 도구 좀 치우세요."
술술 불었을 게 눈에 뻔하여 적당히 비겁하고 타협적인 제가 독립군, 독립운동에 관한 내용은 감히 건드릴 생각조차 할 수 없었고 「곱게 자란 자식」에서도 다루지 못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Q. 처음 제목을 들었을 때 든 생각이 “왜 ‘곱게 기른 자식’이 아니라 ‘곱게 자란 자식’이지?”였습니다. 제목 ‘곱게 자란 자식’은 어떻게 짓게 되셨나요?
A. 곱게 기른 자식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아마도 "기른"은 부모 시점의 단어라 '자란'이 주인공 깐난의 성장기와 어울리는 제목이지 않나...
제목을 정할 당시 「곱게 자란 자식」과 「소락빼기(성질을 내며 큰소리를 칠 경우에 쓰는 말)」를 두고 골머리를 싸고 있었는데 제 담당이셨던 박정서PD님께서 「곱게 자란 자식」을 추천하여 확정하게 되었습니다.
Q. 여러 인물 군상 중 어린 여자아이인 깐난이를 주인공으로 삼은 이유가 있으셨나요?
A. 남성향의 전작만 해온 제가 깐난을 주인공으로 삼은 것은 쉽지 않은 선택이었습니다.
당시 시대상의 가장 나약한 아이이자 가장 낮은 계층의 여성, 아무 것도 모르는 시골무지랭이 깐난과 역사에 무지한 제가 같은 시선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면 독자님들도 어렵지 않게 참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했는데 그게 잘 통했던 것 같습니다.
Q. 작품을 보다 보면 복선이 잘 깔려있는 거 같습니다. 작품을 만드시면서 복선 부분을 많이 신경쓰셨나요? 반대로 의도치 않았는데 복선이 된 장면은 없으셨나요?
A. 첫화, 깐난이가 곳간에 갇힌 장면이 있는데 원래는 깐난의 부모님이 숨겨두었다는 설정을 잡았다가 두 분이 전부 돌아가시는 바람에 이걸 어떻게 박계춘과 극적으로 연결되게 만들지? 긴 시간 고민하던 중 의도치 않게 배신의 아이콘 청승댁을 끼워넣었고 청승댁이 숟가락으로 문을 걸어 잠궈 박출세에게 일러바치며 결국 일본군까지 끌여들여 박계춘과 얽히고 설킨 상황에서 깐난을 구출한다는 내용으로 대폭 수정되었습니다.
Q. 「곱게 자란 자식」은 한 편의 문학소설을 보는 느낌을 들게 합니다. 평소 책을 많이 읽으시나요? 스토리구성에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 점은 무엇인가요?
A. 책과는 거리가 멀어 거의 접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만화책은 만화가에게 교과서이 듯 재미있으면 몇 십 권이 됐든 잠을 자지 않고 읽을 정도라 「곱게 자란 자식」을 준비할 당시 연출이나 스토리구상은 허영만 화백님의 만화를 수 십 번 반복하며 제 것으로 만들려고 연구했습니다. 지면을 빌어 허영만 화백님께 감사 인사 전합니다.
2014년 오늘의 우리만화상 시상식날 허영만 화백님께서 자리에 참석하셨으나 너무나 긴장되어 인사 못 드렸는데 그때 싸인을 받아놓지 못한 점이 아직도 후회로 남습니다. 제게 언제나 원탑 작가이시며 귀감이 되어주신 허영만 화백님, 존경하고 항상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Q. 「곱게 자란 자식」은 분명 어려운 이야기인데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게 하는 작품입니다. 힘든 이야기를 계속 읽을 수 있게 하는 저력은 무엇일까요?
A. 아무래도 민족성에서 공감되는 공분 포인트에 있고 극한으로 내몰리는 깐난을 측은한 마음으로 봐 주신 게 아닌가 생각 듭니다. 아침드라마 못지 않게 이런 대사까지 써도 되나 싶을 정도의 악역들이 독자님들의 뒷골을 잡게 한 점 고개숙여 사과드립니다.
Q.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A. 「곱게 자란 자식」이 휴재가 많았습니다만 그 중 깐난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내용에서 나비가 머무르다 날아가는 장면은 마감에 맞춰 급하게 표현하고 싶지 않아 피디님을 설득하여 휴재한 게 기억납니다.
그리고 막둥이가 외삼촌을 따라 부락을 떠나던 내용은 신파적이고 전형적이라 생각되어 원고를 넘기면서도 '아, 망했다, 망했어' 라며 저 스스로를 자책했는데 반대의 반응들이 나오자 '이게 무슨 일이지?'라며 댓글들을 일일이 확인하였고 오히려 제가 독자님들께 감동을 받은 에피소드입니다.
Q. 「곱게 자란 자식」에는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 중 작가님이 가장 애정을 갖고 있는 캐릭터와 그 이유는?
A. 작중 깐난과 주변인물들은 피해받는 입장이다 보니 표현에 힘이 들고 스트레스가 많았는데 차라리 악역들, 그 중에서도 두드러기가 대사와 행동이 일관되어서 작업할 때 편하드라구요.
또한 시대상 고문실 장면은 꼭 필요하다고 판단되어 등장인물 중 누구를 선택하나 막막하던 중, 반대로 생각을 뒤집어 ‘악역인 박출세가 고문 당한다면 어떨까?' 순간 무릎을 탁 치며 무거웠던 부담이 눈 씻듯 사라졌고 그렇게 군시설 지하에 머물면서 비타민D가 부족했던 우울한 고문관이 만들어졌던 게 생각납니다.
Q. 예고편에서 ‘평범한 시골 소녀 이야기, 소녀만 평범한 이야기’라고 했죠. 실제로 웹툰에서는 긍정적인 인간상보다는 부정적인 인간상이 다수 부각되어 등장합니다. 읽다보면 “세상에 그나마 믿을 건 혈육뿐인가” 싶을 정도. 긍정적인 인물보다 부정적인 인물을 많이 등장시킨 데는 어떤 의도가 있으셨나요?
A. ‘몰라. 됐어. 아님말고.’식의 삐딱한 제 성향이 가차없는 시대상에 반영되어 부정적인 인물이 많이 등장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피해자보다 가해자를 표현했을 때 좀 더 수월했지 않았나 생각듭니다.
Q. 깐난이는 결국 살아 남아 유일하게 동무들이 꿈 꾸던 ‘엄마’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 근현대사의 굴곡을 생각해 보면 깐난이의 앞 날이 결코 평탄치 않으리란 생각이 들어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깐난이는 작품이 끝난 뒤로 어떻게 살았을까요?
A. '깐난이 삼곡면을 떠나고 끌려갔던 용석이 해방되어 돌아온다.’로 마무리하자는 저의 생각은 절대 변함 없었지만 막상 최종화를 남겨두고 나니 갈등이 생겼습니다. 자신의 아기를 안은 깐난의 이미지가 갑자기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가정을 이룬 깐난의 모습을 추가하자. vs 안돼. 처음 의도대로 끝내야 깔끔해.
긴 시간 고민 끝에 추가분을 선택한 결정적인 이유는 이야기 내내 고생만 한 깐난과 독자님들께 작가인 제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드리는 선물이라 생각 들어서입니다.
마지막에서 또 다시 불어닥칠 비극을 예고한 듯 깐난의 담담한 표정은 아직도 끝난 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웃을 수 없다라는 의미로 해석해봤는데...방금 생각한 것치곤 멋진 것 같습니다. 멋진 척 할 수있는 질문 감사합니다.
Q. 작품과 함께 작가도 독자도 성장하지요, 특히 곱게 자란 자식처럼 생각할 거리가 많은 작품은 작가님께도 큰 영향을 끼쳤을 거 같습니다. 작품을 그리기 전후로 작가님의 가장 큰 변화가 있다면?
A. 「곱게 자란 자식」을 알아봐주시는 분들이 많이 계셔서 무척 기쁘고 감사한 일이지만 작품과 작가를 동일시하여 과대포장된 측면이 크기 때문에 예전보다는 보여질 수 있는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럽습니다. 전 인생이 장난처럼 사는 사람으로 역사나 사회상식수준이 「곱게 자란 자식」을 만들기 이전과 전혀 달라진 게 없기 때문에 앞으로도 의식있는 척 해야하는 자리는 부지런히 피할 것입니다.
Q. 작가님께 있어 「곱게 자란 자식」은 어떤 의미를 가진 작품일까요?
A. 빛과 빚을 함께 얻은 작품. 앞으로 역사물은 절대 손 대고 싶지 않을 정도로, 가깝고도 먼나라에 대한 제 느낌은 '질리고 지긋지긋하고 진절머리난다' 입니다.
「폭염에, 땀에 쩔어 눈 앞에 보이는 그늘로 한발한발 힘겹게 향하는 데 뒤쳐진 애가 자빠지면서 제 발목을 꽉 잡더니 "너도 그늘로 가지마!!!" 바락바락악을 지르며 뒤엉켜버린 느낌」 입니다.
일제강점기 관련 문제는 끊임없이 치열하게 거론되어야 할 숙제이므로 역사무지랭이나 다름없던 저의 일개 만화보다 더욱 값지고 의식높은 수준의 컨텐츠들이 나오길 기대합니다.
Q. 차기작품을 준비 중이시라고 들었습니다. 차기작에 관해 살짝만 귀뜸해주신다면? 언제쯤 작가님을 다시 만나 뵐 수 있을까요?
A. 「곱게 자란 자식」에서 가졌던 부담을 모두 내리고 올해 안에 SF스릴러 장르로 예정하고 있으며 미래를 알아버린 아이들의 선택과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밝지 않게 전개되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곱게 자란 자식」보다는 매우 밝을 것이라 자부합니다.
Q. 마지막으로 오랫동안 「곱게 자란 자식」과함께해온 독자분들께 한 말씀부탁드립니다.
A. '하느님, 부처님, 의느님 위에 독자님들이다' 라고 늘 생각합니다. 의지가 부족해서 하루에도 수 십번씩 원고를 포기할까를 반복했고 그리면서도 수 백번씩 욕을 쏟았으며 욕하다가 성질머리만 더욱 괴팍해진 것 같습니다. 독자님들 응원이 없었다면 「곱게 자란 자식」은 절대 끝내지 못 했을 게 당연합니다.
"독자님들 앞에서 만큼은 겸손하겠다"는 점을 항상 되새기며 다시 한 번 「곱게 자란 자식」과 함께 완주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십쇼. 건강해야 제 차기작에 응원도 해 주시고 매질도 해 주실 수 있죠.
기타: 감사한 분 들
연재 내내 고생하시고 제 징징거리는 소리 다 받아주셨던 다음 웹툰 박정서 PD님.
저의 징징거리는 소리에, 함께 징징거려주셨던 신세계 영화사 한우용 대표님.
제가 나약해져 징징거릴 때 "죽어도 해!" 라며 일침주셨던 나홍진 감독님.
「곱게 자란 자식」 단행본을 너무도 잘 엮어주신 영컴출판사 신승환 대표님과 직원 분들.
「곱게 자란 자식」을 응원해주시고 명절 때 김 보내드렸던 유병재 작가님.
그리고 만나면 서로 징징거리는
<부활남> 김재한 작가님, <일상날개짓> 나유진 작가님, <노동본색> 지뚱 작가님,
<윈드브레이커> 조용석 작가님, <까락> 서강용 작가님 등 모두모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