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 보는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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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그림만 잘 그리면 된다고? 법, 모르면 당한다!

웹툰 보는 변호사 – 만화를 만드는 사람과 읽는 사람이 알아야 할 법 이야기 1화

2024-06-09 서아람

작가는 그림만 잘 그리면 된다고? , 모르면 당한다!

  “안녕하세요, 전직 검사, 현직 변호사 겸 작가 서아람입니다.”

  제가 저 자신을 소개할 때 가장 먼저 하는 말입니다. 제 소개말을 들으면 많은 이들, 특히 출판사, 제작사, 에이전시, 플랫폼 관계자들이나 작가 지망생들, 현직 작가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감탄하고는 합니다.

  “세상에, 작가님한테는 누구도 허튼짓 못 하겠네요!”

  “우리 계약서 좀 갖고 와 봐! 다시 살펴봐야 하는 거 아니야?”

  물론 농담, 넉살, 그리고 인사치레가 섞여 있겠지만, 실제 믿음이 있기도 합니다. 변호사라면 어디 가서도 부당한 일을 당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 그러나 믿어주시는 분들께 죄송하게도 실상은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저도 막상 제 일이 되면 속되게 말해 댕청해지는현상을 겪습니다. 마찬가지로 변호사가 직업인 남편은 저에게 계약서를 읽지도 않고 도장을 찍어댄다며, ‘호구 중에서도 상호구라고 타박하기도 합니다.

  변호사로서 제2의 본능이나 다름없는 따지는 기술, 의심하는 기술’. 이걸 왜 작가로서는 발휘하지 못하는 걸까? 그건, 작가로서의 저와 변호사로서의 제가 업계에서의 위치가 상당히 다르다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변호사로서는 어느덧 12년 차에 접어든 중견 법조인이고 어딜 가서도 기죽지 않는 경력을 갖추게 되었지만, 작가로서는 걸음마는커녕 이제 겨우 요람을 벗어나 기기 시작한 애송이나 다름없으니까요.

  서아람 변호사를 찾는 전화에는 위풍당당하게, 때로는 도도하게 응대할 수 있지만, 서아람 작가를 찾는 전화에는 아무래도 태도가 달라집니다. 스팸 전화인가, 아니면 자비 출판 광고? 온라인 클래스 수강 권유? 요즘 작가 전속계약 체결하자고 하면서 컨설팅비 내라는 사기 업체들이 판친다는데, 이것도 혹시 그런 거 아닐까?

  “ooo에 쓰신 작가님 글을 봤는데요. 저희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계약을 하고 싶어서 연락..”

  “좋습니다.”

  “? 아직 어떤 계약인지도, 조건에 대해서도 말씀드리지 않았는데요.”

  “돈은 중요치 않습니다(아무 데도 못 팔고 노트북 속에서 썩어가는 것보단 낫겠죠). 제 글의 진가를 알아봐 주시는 곳이라면(설마 다른 작가와 헷갈린 건 아니겠지?). 일단 만나서 도장부터 찍으실까요(맘 바꾸기만 해 봐라)!”

  작가적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이런 상황이라고나 할까요. 아마 이 글을 읽으시는 신인 작가들이나 작가 지망생 분들은 어느 정도 공감하실 수 있을 겁니다.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어라”,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라는데, ‘내 글을 세상으로 내보내 빛을 보게 해 줄 고맙고 황송한출판사, 플랫폼을 찾아야 하는 무명작가로서는 계약이 이렇다 저렇다 말하기가 어려울 수밖에요.

  저는 작년쯤 문체부 권장 표준계약서에 제가 몇 가지 조항을 더하고 뺀 저만의 계약서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는데요. 이 계약서를 만들기 위해 이전 계약서들을 살펴보다가, 작가로 데뷔할 무렵 체결한 계약서들을 보고 깜짝 놀란 기억이 있습니다. 어떻게 여기에 사인을 했지 싶을 만큼 편파적이거나, 허술하거나, 엉망인 것들이 종종 있었거든요. 한 번은 예전에 함께 일한 출판사에서 전화가 왔는데, 기존의 표준계약서를 대대적으로 수정하기로 했다면서 제 계약서도 원하면 수정해 준다는 겁니다.

  그래요? 제 계약에 무슨 내용이 있었죠? 오래 되어 기억이 잘 안 나네요.”

  “.. 사실 그게 요즘 작가님들이 흔히 독소조항이라고 표현하시는 그런 건데요. 저희는 원래 그런 의도로 집어넣었던 문장은 아니었고요.. 오해의 여지가 있었던 것 같아요.”

  “독소조항이요? 에이, 설마, 2차적저작물작성권은 자동으로 출판사가 가져간다, 뭐 그런 건 아니죠? 하하하하... 편집장님? 왜 아무 말씀 없으신..?”

  “아니요, 그게 진짜 저희가 가져간다는 의미는 아니고요..”

  “제가 그런 계약서에 진짜 도장을 찍었다고요?! 오 마이 갓!”

 안타깝게도 위 대화에는, 작가적으로 과장된 부분이 전혀 없습니다. 저 통화를 할 즈음에 저는 유명 언론사의 교육센터에서 현직 작가들을 상대로 계약법 특강을 하고 있었는데, 독소조항에 동의하느니 차라리 계약서를 찢어버리라고 목청껏 부르짖던 제가 어이없게도 최악의 독소조항에 아무 이의도 없이 계약을 해버린 전력이 있었던 겁니다.

  제 자신을 위한 변명을 좀 하자면, 당시 정식 출간작이 없었던 저에게 업계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그 출판사는 꿈의 다리였고, 보잘것없는 제 소설의 2차적 저작물은 아예 만들어질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으며, 문제의 조항을 뺀 나머지 조건들은 무명 작가들에게 제시되는 평균 조건보다 훨씬 좋았다는 겁니다. 그 계약을 통해 출간한 소설은 대박은 아니지만 무난하게 중박 정도는 쳤고, 다행히도(?) 판권은 팔리지 않았으니, 출판사와 계약 내용을 가지고 싸울 일 없이 무사히 해피엔딩을 맞았죠.

  그렇습니다. 웹툰이나 웹소설 등 창작물 관련 계약이 천 건이 이루어진다고 하면 그중 구백 건 정도는 아무런 문제나 갈등 없이 지나가기 마련입니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에이, 내 작품이 벌어봤자 얼마나 벌겠어.’, ‘이 조항이 적용될 일이 생기기나 할까?’하면서 미심쩍은 부분들을 넘겨 버립니다. 그리고 계약서상 기재된 선인세와 플랫폼의 미리보기 금액을 떠올리면서, 그냥 몇 마디 듣는 대가로는 너무 비싼 것 같은 변호사 상담을 포기하고 맙니다. ‘보다는 관행이 앞서는 업계이다 보니, 독소조항의 폐해가 수면으로 올라오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나 그게 표면화될 때쯤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커다란 피해가 수많은 작가들에게 생긴 다음입니다. 어떤 식의 피해인지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사례1.

  A작가는 2000년대부터 종이 만화를 그려오던 중견 만화가입니다. 어시스턴트도 없이 혼자 골방에 처박혀 밤새워 그린 만화로 단행본을 출판해 왔는데, 그래봤자 받는 인세는 단행본 가격의 10%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다가 우후죽순 들어선 만화책 대여점으로 인하여 시장이 어려워졌고, 출판사에서는 완결까지 아직 먼 작품을 계속 출간해주는 대신 매절계약으로 바꿀 것을 요구했습니다. A작가는 생계 유지를 위해, 그리고 작품을 계속 내기 위해 이를 승낙할 수밖에 없었고, 헐값에 작품에 대한 권리를 몽땅 넘겼습니다. 출판사는 두 권을 더 낸 후 더 이상 수익성이 나지 않는다며 출간을 멈췄고, A작가의 작품은 미완결인 채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펜을 꺾고 보험사 영업사원이 된 A작가는 지금도 가끔 온라인 서점에서 폐간으로 나오는, 중고나라에 권당 500원으로 올라오는 자신의 만화책을 보며 씁쓸해하곤 합니다.

  #사례2. 

  B작가는 오랫동안 개발해 온 비장의 아이템으로 웹툰계의 한 획을 그을 데뷔작을 만들어 보려고 하던 신인 웹툰 작가입니다. 카카오, 네이버, 레진 등 알아주는 메인 플랫폼들을 뚫어보려 했지만 신인에게는 좀처럼 기회가 오지 않았습니다. 지인을 통해 현재 오픈 준비 중인 신생 플랫폼을 소개받게 된 B작가는, 다른 플랫폼보다 파격적으로 높은 수익 분배율과 적극적인 담당자의 태도, 그리고 중국 자본이 들어와 플랫폼을 밀어줄 거라는 말에 녜로구나하고 덜컥 전속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담당자는 B작가의 작품을 메인으로 밀어주겠다면서 연재 시작 전 20화를 먼저 축적하자고 했고, B작가가 그려서 보내는 원고를 다시, 또 다시, 또또 다시 수십 번씩 수정을 요구했습니다. 결국 B작가는 한 푼도 받지 못한 채 수정 작업에만 매달리다가 1년을 보냈고, 문제의 플랫폼은 투자 철회로 오픈도 해 보지 못한 채 끝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B작가는 그동안 자신의 노력은 누가 보상해 주냐며 억울해 했지만, 담당자는 연락두절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위 두 사례는 제가 실제로 아는 지인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럼 계약에 있어서만 조심하면 될까요? 좋은 회사, 좋은 플랫폼을 만나기만 하면 만사 오케이일까요?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사례3.

  C작가는 오랜 무명 생활 끝에 네이버 공모전 수상을 통해 공식 데뷔하게 된 경력직 신인 웹툰 작가입니다. 너라면 해낼 줄 알았다는 주변의 축하와 함께,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죠. 몇달 간 준비 과정을 거쳐 드디어 정식 연재에 들어갔는데, 첫 베댓이 심상치 않습니다. C작가의 작품이 다른 플랫폼에서 무료 연재되어 오던 웹소설의 내용을 그대로 베꼈다는 것입니다. C작가는 그 웹소설을 들어본 적도 없었기에 그냥 넘어갔지만, 표절 지적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회차마다 악플이 달리고, 별점 테러를 당하고, 심지어 C작가를 표절 작가로 매도하는 익명의 SNS계정과 유튜브 채널까지 생겼습니다. C작가는 고발 계정에서 비슷하다고 지적된 부분들을 열심히 살펴본 후, 그 장면들은 해당 장르의 특성상 클리셰라고 입장문을 올렸지만, 안티들은 C작가의 입장문을 한 줄 한 줄 뜯어서 조롱하고 박제했으며, 심지어 어떻게 알았는지 개인 휴대폰 번호와 주소까지 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C작가는 우울증과 공황장애 증상으로 연재를 무기한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권리를 구체적으로 알고 있는 작가들, 적극적으로 나서서 이를 확보하고 지키기 위해 싸우는 싸우는 작가들의 숫자가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작가라는 예술계 직업의 특성상 그런 속물적인것보다는 집필 활동, 저작 활동에 더 에너지를 쏟고 싶어 하고, 번거롭고 부담스럽게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평화주의를 추구하는, 안정적이고 조용한 세팅에서 작업에 전념하기를 원하는 작가들은 분쟁자체를 싫어해서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원칙을 지키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막상 진짜 심각한 상황이 터지면 그땐 깨닫게 됩니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원칙은, 사실 무원칙이나 다름없다는 것. 좋은 건 사실 좋은 게 아니고,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말은 요즘 시대에는 욕이 되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작가뿐만 아니라, 모든 직업인에게 있어서, 나의 권리와 의무를 명확히 알고 보호하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법적 지식은 지루하고 골치 아프지만, 가장 어렵고 힘든 순간 나의 강력한 무기가 되어 줍니다. 그래서 저는 앞으로 6개월간에 걸쳐 여러분에게, 만화를 만드는, 만화를 읽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법률 이야기를 들려 드리고자 합니다. 나를 위한 변호사가 될 준비, 이제 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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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아람

필자 서아람은 전직 검사이자 현직 변호사로서, 카카오페이지 추미스 공모전 2회 수상으로 웹소설 작가로 데뷔한 후 에세이, 웹소설, 동화 등 다양한 장르의 글을 써서 출간하고 있습니다. 변호사로서 주로 다루는 분야는 사기, 성범죄, 보이스피싱 등 형사사건과 학교폭력, 저작권 관련 분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