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작가들에게 그림 그리는 것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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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시대적 의무 (下) - 폭력의 순간을 이야기하는 방법

만화(웹툰) 작가들에게 그림을 그리는 것이란? 10화

2025-03-30 문종필

작가의 시대적 의무 () - 폭력의 순간을 이야기하는 방법

  용산참사는 경찰지휘부가 위험을 충분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강제 진압한 사건이다. 이 과정에서 살기 위해 망루에 올랐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진압 대상자인 경찰 특공대 역시 죽게 되었으니 지휘부의 잘못된 판단으로 양쪽 모두 가슴 아픈 비극을 피할 수 없었다. 경찰들은 당시 재판과정에서 자기변호만을 위해 애를 썼다. 자신(경찰)의 잘못이 아니라, 망루에 올랐던 철거민이 잘못했다고 말했다. 이들은 화재가 망루에서 어떻게 발생했는지 정확히 따지지 않았으며 강제 진압을 지휘했던 경찰지휘부는 당시 정당한 처벌을 받지 않았다. 충분한 고민 없이 강제 진압한 사실 자체도 부당한데, 용산참사 이후 벌어지는 재판 과정도 부조리했으니 힘 있는 자들이 힘이 없는 사람들을 무참히 밟은 한국현대사의 뼈아픈 상흔 중에 하나다. 그래서 이 사건을 우리는 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폭력을 만화가들은 어떻게 그려냈을까. 영화나 문학, 미술, 등 수많은 예술 장르에서 국가의 폭력을 다루게 되는데, 만화가들은 강압적인 폭력의 순간을 어떻게 바라볼까.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어떤 시선이 특별하다고 볼 수 있을까이다. 앞장에서도 그런 장면을 짚어 봤지만, 연장선상에서 이번 장에서는 이 순간들을 만화가들이 뜻을 모아 공동 작업한 내가 살던 용산잃어버린 고향을 그린 만화가 유승하 편을 논하는 과정에서 조금 더 논의해보고자 한다.

 내가 살던 용산, 유승하의 잃어버린 고향편 첫 페이지

  〈내가 살던 용산의 여러 이야기 중에 고 한대성 씨의 이야기를 맡은 만화가 유승하의 작품 잃어버린 고향이 오래 기억나는 이유는 국가의 부조리한 폭력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기보다는 자신이 사는 지역 수원을 떠나 용산에서 안타까운 죽음을 맞은 한대성 씨의 삶을 아무런 폭력 없이 그려냈기 때문이다. 이런 형식은 국가의 폭력을 더욱더 잔인하게 만든다. 독자들은 국가 폭력의 현장에서 그려진 이 만화가 어떻게 국가의 폭력을 담아내지 않고 국가의 폭력을 이야기할 수 있느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만화가 유승하가 국가 폭력에 저항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라, 국가 폭력을 응시하는 과정에서 폭력 자체를 직접 고발하기보다는 한대성 씨의 사연에 귀를 기울이는 과정에서 오히려 국가 폭력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는 말이다. 그가 서울 용산에 올라가 자신과 비슷한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 곁에서 망루를 지켰다는 사실 자체에 집중함으로서 한대성 씨의 삶에 주목하는 것이 국가적 폭력에 저항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대성 씨는 어떤 사람일까. 그는 무슨 이유로 지하철로 2시간 이상 걸리는 이곳에 발을 내밀어 망루를 지켰던 것일까.

  그는 고향 강원도를 떠나 20년을 수원에서 살았다. 하지만 자신이 살던 땅에 새로운 전철이 깔리고 아파트가 들어선다는 이유로 이사 가야만 했다. 이사라고 적었지만, 강제적으로 자신이 살던 공간과 장소를 떠나야만 했다. 그에게는 버틸 능력과 힘이 없다. 만화가 유승하는 이런 순간을 등장인물의 목소리를 빌려 다음과 같이 적는다.

  “국가가 추진하는 개발이란 사회의 가장 약자들에게 싸움을 걸어 이들을 밖으로 밀어내는 것이랬어. 우린 말없이 시키는 대로 비켜주고, 피해 가고 물러나 주는 것 뿐이지, 우리가 다른 걸 선택할 수 없는 거야. 하지만 우리가 살아온 나날도 어디 견줄 데 없이 소중한 것인데...”

  이처럼 힘없이 자신의 공간을 내어준다는 것은 억울한 일이다. 한 지역에서 오래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개발을 위해 자리를 비켜주어야 한다는 것은 속상한 일이다. 하지만 이 말도 안 되는 것이 폭력적으로 이뤄지는 것이 2009년 용산의 모습이었다. 한대성 씨는 이런 아픔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2009년 일어난 용산의 일을 외면할 수 없었다. 자신과는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수원을 등지고 몸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뜨거운 연대의 마음 없이는 불가능했다. 그는 그 누구보다도 용기 있게 몸으로 실천했고 만화가는 그의 사연에 집중함으로써 거친 국가 폭력에 맞서는 만화 형식을 완성했다. 그 형식은 개인을 온전히 내비쳐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용산개 방실이처럼 구체적인 생활 이야기를 연출하는 방식도, 파란집처럼 강력한 선과 색의 판화적 연출 방식도, 잃어버린 고향처럼 한 개인의 삶을 주목하는 방식도, 제 삶의 터전을 지키려고 망루에 올랐던 가슴 아픈 사연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데 손색이 없지만, 이들 작품은 매체가 종이책이라는 점과 현실을 재현하는 방식이 투명하다는 점에서 비슷한 계열의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하지만 용산참사를 다르게 기억하는 또 다른 방식도 있다. 우리에게 너무나도 친숙한 만화가 주호민의 신과 함께이승편이 좋은 예가 될 듯하다. 이 웹툰은 영화 신과 함께-인과 연(2018)으로 제작되기도 해서 많은 사람에게 널리 알려진 작품으로 재개발로 인해 피해 본 철거민의 이야기를 다룬다.

△ 〈신과 함께이승편표지

  하지만 이 웹툰은 투명한 형식을 지향하기보다는 상상력이 가미된 판타지물의 성격을 지녔다. 세 명의 저승사자가 곧 운명을 다하게 될 한 인물(김천규 할아버지)을 배웅하게 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를 담았다. 김천규는 손자 동현과 함께 가난한 삶을 살아가는데 그 지역은 재개발로 인해 곤혹스럽다. 이들은 이곳이 아니면 다른 곳으로 갈 수 없다. 정부에서 주는 보상은 턱없이 부족해서 보상이라기보다는 내쫓기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상황에서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면 손자인 동현은 홀로 놓일 수밖에 없다. 이런 사정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가택신들(성주신, 조왕신, 측신, 철융신)은 저승사자와 맞서 할아버지의 삶을 연장시킨다. 이렇게 시간을 연장하는 것은 어린 동현을 지키기 위함이다. 만화가 주호민은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재개발의 부조리를 고발한다. 재개발의 모습과 문제점을 많은 수의 독자가 거부감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대중들을 설득시킨다.

신과 함께이승편’(2) 282~283

  이 웹툰에서 가장 문제적인 장면은 이승편의 끝부분일 것이다. 저승사자들은 힘겹게 김천규 할아버지와 관련된 일을 끝마치고 새로운 업무를 부여받는다. 김천규 할아버지 다음으로 지상에서 곧 죽게 될 인간의 새 명부를 받게 된 것이다. 저승사자들의 대화는 이를 잘 표현해내고 있다. 수석차사 강림도령은 같은 날, 같은 곳에서 여섯 명이 죽게 된 사연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는데, 이에 월직차사 이덕춘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라고 말하면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대해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여섯 명의 숫자는 굉장히 중요하다. 이 여섯 명이 바로 용산참사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어서다. 2009120, 용산4구역 철거 현장에서 망루에 오른 일반 시민 다섯 명과 경찰관 한 명이 목숨을 잃기 때문이다. 이 장면 이후 만화가 주호민은 철거민과 용역이 대치하는 장면을 그려놓고 웹툰을 끝맺는다. 그러니 이 작품은 용산참사의 아픔을 만화책이 아닌 웹툰으로 재현한 것이다. 이 말은 지극히 대중적인 매체로 용산참사의 문제점을 대중들과 소통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이 작품 역시 오래 기억될 필요가 있다.

  이처럼 국가 폭력을 응시하는 방식도 작가마다 다양하다는 것을 우리는 이 글에서 확인해 볼 수 있었다. 기억은 축적되고 쌓이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미래의 어느 날에 발생할 국가적 폭력 앞에 굳건히 맞설 수 있다. 2025년인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숱한 거짓말을 해대면서 자신의 자리만을 유지하려는 어리석은 정치인으로 인해 우리가 겪어야 했던 말할 수 없는 국가적 통증을 어떻게 보상받아야 하겠는가. 잃어야 했던 수많은 것들을 어떻게 다시 새롭게 복원해야 하는가. 상식이 전혀 통하지 않는 2024123일에 일어났던 윤석열 정부의 계엄을 작가들은 어떻게 그려야 할 것인가. 이것은 창작자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숙제로 남겠다. 창작들은 이렇게 세상과 소통하며 매일 매일 싸우는 존재다.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세상을 그릴 수 있어야 한다. 이 말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다양한 형식의 이야기가 넘치고 소통될 때, 우리는 더욱 단단해진다.

  나는 의식적으로 이 글에서 국가 폭력을 직접적으로 대응한 작품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았지만, 이 방식이 낡거나 우리 시대에 필요 없는 것은 아니다. 이런 작품들이 있기에 섬세하고 부드러운 작품도 눈에 띄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창작자가 자신만의 스타일로 이곳의 부조리를 재현하는 것일 테다. 자기 색이 아니라면 굳이 쫓아갈 필요가 없다. 중요한 것은 다양성 속에서 두드러지는 차이(형식)’ 자체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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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필

글쓴이 문종필은 평론가이며 지은 책으로 문학평론집 〈싸움〉(2022)이 있습니다.
이 평론집으로 2023년 5회 [죽비 문화 多 평론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밖에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서 주최하는 대한민국만화평론 공모전 수상집에 「그래픽 노블의 역습」(2021)과 「좋은 곳」(2022)과 「무제」(2023)을 발표하면서 만화평론을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