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기와 사건에 대해 (上) - 계기는 창작을 움직이게 하는 힘 (上)
창작의 계기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은 흥미롭다. 여기서 계기가 중요한 이유는 창작이 폭발적으로 시작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계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청탁 제도는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는가. 무엇인가를 그리고 쓰고 깎고 만들어내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청탁이라는 시스템은 글을 쓰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창작자에게 청탁하는 출판사나 신문사는 글을 기다린다. 이 시스템으로 인해 창작자는 ‘청탁’ 날짜에 맞추어 의무적으로 무엇인가를 써야 한다는 점에서 이 제도는 지속해서 쓰게 만드는 동력임이 분명하다. 누군가에게는 이 과정이 무엇인가를 만들거나 생산해 내는데 큰 계기가 되기도 하겠다. 이 과정은 고되고 힘든 일이지만 노동의 대가로 돈을 받는 일이니, 창작자는 어떤 방식이든지 마감을 지킨다. 출판사의 배려로 마감일이 연장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마감일을 어기지 않는다. 이는 신뢰와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방법은 창작을 이행하게끔 도와주는 하나의 효과적인 방법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이 어떤 작품을 만들고 이야기해야 할지에 대한 계기나 사건을 품는 것이다. 이런 사건이 예술가들에게 주어진다면 작품을 그리지 말라고 말리고 막아도 작업을 하고, 그 작업에 대한 대가(돈)를 지급하지 않아도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작업을 이행해나간다. 함께 놀러 가자고 아름다운 공간과 장소를 제공해도 흔들리지 않는다. 창작자는 주변의 말을 아랑곳하지 않고, 달팽이처럼 스멀스멀 골방으로 들어가 묵묵히 자신의 작업을 수행한다. 이는 아마도 창작자가 만난 계기와 사건이 그를 움직였을 가능성이 크다. 즉, 창작자들에게 이런 계기와 사건은 매우 중요할 뿐만 아니라, 하나의 귀중한 경험으로도 명명할 수 있겠다. 여기서 ‘사건’이라고 명명하는 이유는 예술가가 살아가면서 이런 순간을 매일매일 경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계기와 순간은 누군가에게는 자주 찾아올 수 있으나, 누군가에게는 평생 찾아오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창작자들에게 계기는 특별한 순간이며, 놓치지 말아야 할 운명이다.
물론, 이 계기가 단순히 예술적인 영역에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특정한 사건이나 사고로 인해 이런 감정을 품게 되는 경우도 있고, 가슴 아픈 사연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과거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기도 한다. 여기서 전혀 다른 사람이란, 과거의 ‘나’와는 완전히 다른 ‘나’로 변화된 경우를 말한다. 그러니 예술가들에게 ‘계기’는 나를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주는 소중한 경험이다. 이런 변화 속에서 창작자는 어떤 방식이든지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안 되는 몸의 상태가 되고, 자연스럽게 이런 경험은 창작의 형태로 승화된다. 승화는 ‘어떤 현상이 더 높은 상태로 발전하는 일’이라고 볼 수 있는데, 텍스트를 창작하는 일의 중심에 ‘계기’가 살아 숨 쉰다.
나는 이 글에서 모든 예술가에게 있어서 ‘계기’와 ‘사건’이 중요하다고 볼 수 없지만, 창작자에게 사건과 계기는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다. 이러한 경험은 창작자들에게 하나의 커다란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작품을 구상하는 데 있어서 원동력이 된다. 기차로 예를 들자면 봉준호 감독의 오래전 영화 〈설국열차〉(2013)의 멈추지 않는 기차처럼 꺼지지 않는 기차의 심장을 품게 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이와 관련된 작품 일부를 소개하는 과정에서, 이 글을 읽는 예비 만화가들에게 당신의 계기와 사건이 무엇인지 간접적으로 물어보려고 한다. 이런 계기와 사건을 품고 작품활동을 하는지, 혹은 만화라는 예술적 장르를 통해 ‘나’의 이야기는 하지 못하고 누군가의 요구나 조건에만 맞추는 것은 아닌지 따져 물을 것이다.
‘만화’는 세상과 소통하고 교감하는 과정에서 자신만의 만화를 만들어낼 때 의미를 지닌다. 그럴 때 그 만화를 그리는 만화가는 진정한 만화가가 될 수 있다. 작품은 누군가의 요구나 바람에 의해 흉내 내거나 모방하는 행위를 통해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모방을 통해 배울 수는 있을지 몰라도, 따라 하기만으로는 자신의 목소리를 갖기 힘들다. 그런 점에서도 창작자들에게 ‘계기’는 그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자 사건이다. 이 경험으로 인해 그는 자신만의 서사를 갖게 되고, 이 과정에서 하나의 특별한 상징을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구체적인 텍스트로 ‘계기’의 모습을 확인해 보자.

〈아무렇지 않다〉, 〈우월하다는 착각〉 표지
가장 먼저 살펴볼 텍스트는 〈아무렇지 않다〉(씨네21북스, 2022)로 독자들에게 이름을 알린 최다혜 작가의 〈우월하다는 착각〉(곰곰, 2023)이다. 최다혜 작가의 전작은 일러스트레이터, 시간강사, 무명 작가의 삶을 소재로 책을 꾸몄다. 동시대에 살아가는 세 사람의 노동 현실을 다루었다. 노동 현실이라고 하면 다소 딱딱한 표현일지 모르겠다. 먹고 사는 일이라고 이야기해야겠다. 작가의 권리를 양도할 수밖에 없는 불공정한 ‘저작재산권 양도 계약서’와 얽힌 김지현 씨의 이야기, 대학 시간강사로 삶을 이어나가다 더는 일할 수 없어 새로운 일자를 찾아야 하는 강은영 씨의 이야기, 돈이 안 되는 그림을 힘겹게 그리며 살아가는 이지은 씨의 이야기를 단편의 형식으로 완성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들을 나와 같은 일러스트레이터, 시간강사, 무명 작가로 설정하고 그들의 경험 역시 내 것을 바탕으로 하다 보니 그들이 곧 나”라고 생각하면서 작업했다는 최다혜의 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되기’의 방식으로 인물이 재현되기는 했지만 온전한 ‘나’의 모습이라고는 볼 수 없다. 온전한 자신의 모습이 재현되는 과정에서 독자들에게 일정부분 많은 공감을 자아냈다고는 볼 수 있지만, ‘나’의 서사 속에서 올곧게 재현된 이야기라고는 볼 수 없다.

영화 〈베티 불루 37.2〉
그러나 〈우월하다는 착각〉은 다르다. 이 텍스트는 최다혜라는 예술가의 ‘작가탄생’ 서사를 직접적이면서도 굴곡진 방식으로 반영한 텍스트이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해 무명 예술가가 자신을 응시하는 과정에서 움츠림을 벗어 던지고 당당하고 긍지 있게 일어서는 예술가의 단면을 성장소설처럼 보여준다. 이는 장 자끄 베넥스 감독의 오래전 영화 〈베티블루 37.2〉(1998)의 ‘조르그’와 닮았다.
이 영화의 주인공 ‘베티’는 우연히 자신의 애인인 ‘조르그’의 소설을 보고 그가 예술가임을 확신한다. 당신은 천재라고, 당신은 그 누구보다도 영민한 예술가라며 치켜세운다. 그를 소설가로 데뷔시키기 위해 정성을 다해 프랑스 파리의 모든 출판사에 조르그의 소설을 투고한다. 하지만 조르그는 자신이 예술가라는 사실을 믿지 못한다. 자신 안에 있는 가능성을 의심하고 외면한다. 나 같은 사람이 무슨 소설을 쓰느냐고 베티에게 이젠 그만해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조르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베티’를 어쩔 수 없이 자기 손으로 잃게 하고 나서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그는 드디어 소설가가 된다. 그 무렵 출판사에서 책을 내자는 연락을 받는다. 이 소설은 조르그가 소설가가 아니라고 믿었던 시기에 베티가 투고한 조르그의 오래전 소설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조르그는 소설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믿지 못했다.
장 자끄 베넥스 감독의 영화를 간략하게 줄이기는 했지만, 나는 이 영화의 ‘조르그’가 소설가가 되는 순간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베티를 잃고 나서야 소설가가 된다. 그 순간 그는 이제야 자신이 소설가임을 깨닫고 소설창작에 임한다. 이 영화에서 ‘계기’는 사랑하는 애인의 ‘부재’일 것이다. 애인 베티의 부재이며 베티가 믿었던 믿음 자체에 대한 불신에서 온 후회일 것이다. 그러니 이 영화의 ‘계기’처럼 그래픽 노블 작가 최다혜 역시도 〈우월하다는 착각〉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어떻게 자신이 예술가가 되었는지에 대해 추상적인 그림의 형식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표현해낸다. 그러니 예비 만화가들은 〈베티블루 37.2〉의 조르그와 〈우월하다는 착각〉의 작가탄생 서사를 탐닉하면서 나의 계기와 사건은 무엇인지 스스로 물을 필요가 있다. 그 계기가 하나의 단편을, 하나의 장편을, 오래 시간 작업한 두꺼운 결과물을 이끌어 내는 엔진이 된다.
조심해야 할 점은, 특정 작가의 텍스트를 보고 자신의 계기가 그것과 동일하다고 착각하는 오판이다. 나의 계기가 그와 비슷하다고 볼 수는 있지만 같을 수 없다. 예술가의 계기는 많은 수의 사람만큼 결도 계기도 모두 다르니 그렇다. 같다고 해도 ‘차이’를 동반한 채 표현된다. 따라서 그들을 따라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자신만의 계기와 사건이 무엇인지 스스로 묻고 그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타인의 실패와 도전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거나 따라갈 필요는 있다.

〈피부색깔=꿀색〉 표지, 161쪽.
‘계기’에 대해 그다음으로 살펴볼 작품은 전정식의 〈피부색깔=꿀색〉(길찾기, 2013)이다. 이 작품은 앞선 작품과는 다르게 창작자의 계기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이 책의 글과 그림을 모두 담당했던 만화가 전정식은 어릴 때, 자신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이민을 떠나게 된다. 그러니까 그의 뿌리가 한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이민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는 이런 부조리한 상황을 강제적으로 부여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가 느껴야 하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 여행이나 학술대회와 같은 목적으로 다른 나라를 방문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릴 때 낯선 땅에 낯선 피부색을 지닌 채 살아가야 하는 존재가 느껴야 했던 편견 역시 만만치 않았을 거라는 점에서 만화가의 흔들림은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동시대는 과거와는 다르게 굳건하게 존재했던 국가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인종의 차이에서 드러나는 편견이 예전 같지 않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만화가가 그곳에 버려진 시기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니 그가 느껴야 했던 복합적인 정체성의 혼란은 가혹했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만화가는 자신의 결핍과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작품 속에 무의식적으로 반영하게 된다. 그리고 이 ‘계기’는 그를 오랜 시간 붙잡는다. 아니 평생 뒤쫓는다.
“나는 이제 만화가가 되었다. 내가 만든, 혹은 시나리오 작가와 함께 만든 모든 이야기 속에 지칠 줄 모르게 같은 주제가 등장한다. 버려짐, 뿌리를 떠나온 것에 대한 느낌, 정체성… 내가 한국 태생임을 스스로 받아들이기까지의 과정은 길고 고통스러웠다. 왜냐하면 이 버려졌다는 사실을 결함 혹은 타고난 불행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 한국의 공기를 마시고 그곳에 있는 것들과 사람들의 냄새를 맡고 내 선조들의 땅을 밟고 싶다. 나를 낳아준 혈육, 내 생모도 찾고 싶다. 찾을 희망이 없다고들 말하지만 말이다. 36년이 지난 지금, 언젠가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다. 당신을 만나, 나는 당신을 원망하지 않는다고 말할 준비가 되었다.”(148쪽.)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전정식은 자신이 만든 이야기 속에 계속해서 반복되는 소재나 내용이 있다고 고백한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된 상징이나 이미지일 것이다. 버려짐과 같은 소외의 개념일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상투적일 수는 있지만, 전정식의 작품에서는 끊임없이 ‘나무’와 ‘뿌리’ 이미지가 등장한다. 자신의 뿌리를 찾고 싶은 만화가의 정체성이 자연스럽게 표현된 무의식적인 표현일 것이다. 이 정서를 바탕으로 뿌리 이미지가 재현된다는 말일 테다. 그의 최근작인 『베이비박스』(바람북스, 2023)에서도 이러한 경향을 잘 보여준다.
따라서 우리는 전정식의 계기와 사건을 다음과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계기는 바로 자신이 어린 시절 다른 나라로 버려졌던 ‘기억’과 ‘경험’ 자체라고 말이다. 이 경험으로 인해 그는 굉장히 힘든 시간을 견뎌냈을 테지만, 역설적으로 이런 상처로 인해 그는 자신의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삶을 통틀어 봤을 때는 모순적인 상황임이 분명하지만, 창작의 영역에서는 버려진 경험으로 인해 예술혼이 불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러니한 인간의 삶이다. 그리고 이런 삶은 한 개인의 작업으로만 머물지 않는다. 그의 경험은 자신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다른 나라로 이민을 떠나야 했던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준다. 이것이 바로 예술의 힘이자 미적 사건의 신비라고 부를 수 있겠다.
이처럼 앞선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창작자가 무슨 이유로 작품을 만드는지에 관한 물음에 대해 그들은 단순하거나 가벼운 말이 아닌, ‘작품’ 자체로 대답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창작의 계기는, 각기 다른 존재의 수만큼 다양한 계기와 사건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우리가 괜찮은 작품이라고 할만한 좋은 작품에서는 어떤 방식이든지 그 만화가의 살결이 녹아 있을 뿐만 아니라 그만의 ‘계기’가 살아 숨 쉬는 것이다. 그러면 ‘계기’에 대한 사례들을 조금 더 확인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