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를 마무리하며 (上) - 기획칼럼을 쓰게 된 이유
만화영상진흥원 만화규장각 기획칼럼 코너에 작년 여름부터 올해 여름까지 글을 써왔다. 총 11화를 작성했고, 오늘 드디어 최종화(12화)를 앞두고 있다. 따라서 이번 마지막 글은 새로운 내용을 적기보다는 지금까지 썼던 글을 나름대로 정리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다.
〈만화(웹툰) 작가들에게 그림을 그리는 것이란?〉 주제로 원고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원고료로 밥벌이하는 작가들에게 원고료를 지급할 수 있었던 진흥원의 사업 때문이기도 했지만, 내겐 오랜 시간 문학 주변을 서성거리면서 만화에 대해 품었던 개인적인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한 글쓰기이기도 했다.
2007년에 국문과 대학원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문학 공부를 했으니, 어떻게 생각해 보면 나의 정체성은 ‘문학인’이라고 볼 수 있다. 현재도 문학 관련 청탁을 받고 있고, 이 글들을 정성껏 쓰고자 하는 마음이 크다는 점에서 여전히 문학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문학과 관련된 내 작업이 문단에서 주목을 받거나 받지 못하거나 상관없이 마음을 다해 작업에 임하고 있으니, 문학인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런 내게 신기한 경험 하나가 있다. 2017년 문학평론가로 등단해 작품 활동을 해오다가 만화가 최규석의 〈송곳〉(2017)과 이대미 작가의 〈비우〉(2016)를 접하게 된 것이다. 전자가 노동 문제를 성공적으로 재현한 텍스트였다면, 후자는 자신의 결핍을 응시하는 과정에서 조금은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하는 어린 비우의 삶이 펼쳐진 푸른색 톤의 아름다운 성장 서사였다.

△ <비우>와 <송곳> 표지
우선, 〈송곳〉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 보자. 이 작품은 많은 독자가 알고 있듯이, 회사에서 일어나는 노동 문제를 다루었다. 힘없는 노동자들이 커다란 회사에 대항해 함께 힘을 합쳐 부조리한 권력에 저항하는 이야기이다. 이 만화가 내게 특별했던 것은, 힘없는 노동자들의 투쟁 이야기를 심층적으로 접근했기 때문이다.
가령, 이런 내용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텍스트에서 자신의 부조리를 해결하지 못하는 노동자 한 명이 등장하는데, 그는 직업이 노무사인 구고신의 도움을 받는다. 도움을 받은 노동자는 너무나 감사한 나머지 그에게 사례금을 지급하려고 한다. 그러자 구고신은 정신 차리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구고신: 이, 이거… 뭐 사례금이야? 친구 몇 살?
청년: 스물넷인데요.
구고신: 이야…그 나이 먹고 제 몸 판 돈도 떼이고 그랬구나. 어이, 친구야. 쓸데없는 어른 흉내 내지 말고…니 밥그릇이나 잘 챙겨, 어?(1권: 21)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니 밥그릇이나 잘 챙겨, 어?”라는 대사일 테다. 이 목소리는 독자들에게 자신의 밥그릇을 챙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알리는 동시에, 노동자들 스스로도 당당하게 자신의 권리를 지켜야 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는 글이라는 점에서 인상 깊다. 이런 말풍선을 운영하는 만화가라면, 노동 문제를 다루는 데도 깊이를 유지하면서 내용과 형식을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확장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깊이의 가능성이다.
“밥부터 같이 먹어요. 사람들은 옳은 사람 말 안 들어. 좋은 사람 말을 듣지”(1권: 213)
이 대사는 노동자들을 하나로 묶는 방법에 대해 다룬 장면이다. 즉, 사람들은 ‘옳은 말’하는 사람보다도 ‘좋은 사람’의 말을 더 잘 듣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른말이나 옳은 말로 상대를 설득하기보다는 우선 밥 같이 먹으면서 친해져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대사는 단순히 친해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밥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허기를 채우는 것과 무관하지 않겠지만, 함께 밥을 먹는 과정에서 서로를 챙기며 보내는 시간을 축적하라는 말이기도 하다. 잘 모르는 동료 곁에서 그의 사연을 귀 기울여 듣는 것이다. 우리가 함께 밥 먹으며 웃고 울고 화해했던 수많은 장면을 떠올려 본다면 이 의미를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만화가 이런 깊이를 쓸어 담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기억하세요. 당신이 지키는 건 황준철이 아니라 인간이오. 착하고 순수한 인간 말고 비겁하고 구질구질하고 시시한 그냥 인간. 선한 약자를 약한 강자로부터 지키는 것이 아니라 시시한 약자를 위해 시시한 강자와 싸우는 거란 말이오.”(2권: 62-63)
이 대사 역시 새롭게 다가왔다. 이 장면이 나온 배경은 회사와 싸움을 준비하는 과정과 관련이 있다. 일반적으로 부조리한 대상과 싸우는 사람들이라면 무엇인가 고귀한 사연이나 사정이 있고, 정의롭기만 할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대사는 그런 것을 기대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착하고 순수한 인간 말고 비겁하고 구질구질하고 시시한 그냥 인간”을 위해 싸우는 것이라 말한다. 이 목소리 역시, 투쟁 현장에서 일어났던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온전히 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게 다가왔다. 낭만적이지 않고 현실을 응시했다는 말이다. 이는 투쟁이 그만큼 힘들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써, 노조 투쟁을 할 시 동료들에게 상처를 받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하지만 그럴 때 상처를 받았다고 포기하지 말고 묵묵히 싸워야 할 필요가 있음을 전달해 준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고 보았다. 비슷한 맥락에서 “조합원들한테 실망했어요? 노조하면 원래 회사랑 싸우는 것보다 조합원들끼리 싸우는 게 더 힘든 거요.”(3권: 200)라는 대사 역시 맥락을 같이 한다.
이처럼 그 당시 나는 분명 좋은 만화가 있음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지만, 만화가 좋아 봤자 문학이나 영화 그리고 미술과 같은 장르와 견주기는 힘들다고 생각했었다. 예를 들어 네이버 사전에 적힌 ‘만화’의 사전적 의미에 일정 부분 동의했던 것이다. “이야기 따위를 간결하고 익살스럽게 그린 그림에 대화를 삽입해” 표현하는 예술이거나, “사물이나 현상의 특징을 과장하여 인생이나 사회를 풍자ㆍ비판하는 그림”이거나, “붓 가는 대로 아무렇게나 그린 그림”에 공감했던 것이다. 그러나 최규석의 〈송곳〉은 그런 작품이 아니었다. ‘간결’한 작품도 아니었고 일방적으로 ‘웃음’만을 전달하는 작품도 아니었다. 이유 없이 ‘과장’하는 장르도 아니었고, ‘풍자’만을 위해 존재하는 만화는 더욱더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네이버 어학사전에 적힌 만화의 마지막 사전적 의미인 ‘붓 가는 대로 아무렇게나’ 그리는 만화는 절대로 아니었다. 그래서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던 그 당시 웹진 〈문화 다(多)〉에 2018년 2월 6일 〈송곳〉에 대한 비평 〈싸움의 기술〉(http://www.munhwada.net/home/m_view.php?ps_db=culture_photo&ps_boid=25)을 수록하기도 했다. 물론, 이 글은 한 개인의 고백을 위해 〈송곳〉을 의도적으로 경유한 텍스트이지만, 내겐 만화의 의미를 새롭게 각인했던 하나의 사건으로 기억한다.
만화의 세계가 아무렇게 그린 만화가 아니라는 점은 2016년 5월 미메시스에서 출간된 이대미 작가의 〈비우〉(2016)를 읽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문학평론가로 등단하고 나서 문학 밖에 놓여 있는 텍스트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던 때이기도 하다. 우연히 서점에서 읽게 된 이대미 작가의 이 텍스트는 송곳에서 경험했던 것과는 또 다른 경험이었다. 그 당시 이 텍스트를 읽고 너무나 마음에 들어 2019년 9월 10일에 발간된 시 전문 계간지 〈딩하돌하〉 52호에 다음과 같이 쓰기도 했다. 이 글을 2020년 4월 28일 이대미 작가와의 웹진 〈문화 다(多)〉 인터뷰에서 그대로 인용하기도 했다.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비우는 어린 시절부터 환영을 보며 성장한다. 언니 해린은 남들이 못 보는 것을 보는 동생의 다름을 예술가라고 다독여준다. 하지만 비우 눈에만 보이는 괴기한 현상을 주변 사람들이 이해할 리 없다. 비우는 자연스럽게 주변 친구들로부터 이상한 아이로 인식되었고, 대부분의 학창 시절을 우울하게 보내게 된다.
비우가 받은 상처는 언니 해린의 위치로 인해 더 크게 부각되었다. 언니는 비우보다 그림을 잘 그렸고 주변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으며 자유로운 성격에 얼굴도 예뻤다. 더욱이 해린은 비우가 사랑한 남자 캐빈과 연애를 하기도 했으니, 언니에 대한 질투는 누르기 힘든 것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작스러운 사고로 인해 해린은 목숨을 잃게 되고, 그때부터 비우는 언니가 숨겼던 슬픔과 고독을 하나 둘 알아가기 시작한다. 결국에는 언니의 아픔을 온전히 느끼게 된다. 이대미 작가의 그래픽 노블(Graphic Novel) 『비우』에 대한 이야기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것은 비우가 자신의 상처를 깨닫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아픔을 느낄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한다는 데 있다. 나는 이 덕목이 지금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자신과 타인을 알아간다는 것은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를 발견하는 것이고, 결국에는 내 몸속에 흐르고 있는 불가능성을 가능성으로 바꿔주는 마법을 펼쳐 보이는 것이니 말이다.
내가 서 있는 이곳은 한정된 밥그릇으로 인해, 서로를 미워하고 질투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흐름 속에 놓여 있다. 마치 누군가를 먼저 죽이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사회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각자 흉측한 괴물이 되어 동료들의 발목을 부러뜨리고 으깨 먹으며 행복한 삶을 논한다. 그 누구도 올바름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올바름에 대해 논하는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이 올바름은 올바름이기보다는 생존을 위한 올바름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기이한 세상이다. 정의와 의리가 중요시되는 사회라기보다는 오로지 생존만이 삶을 결정하는 시대다. 이러한 괴기스러운 사회를 무엇이라고 명명해야 하는가. 구조적인 문제인 것은 분명하지만 우리는 이 흐름 속에서 반기를 들지 못한다. 무기력하게 쓰러질 뿐이다. 이처럼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내가 아픈 만큼 당신도 아프다는 것을 인식하는 태도이다. 이 명제는 너무나도 흔하고 식상해서 새로울 것이 없지만,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는 지점에서 사랑과 혁명은 시작된다. 이대미 작가의 그래픽 노블을 서두에서 언급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 팔목이 점차적으로 썩어 들어가는 것처럼 당신의 뒤꿈치도 흉측하게 곪아 터진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번 가을에는 ‘나’의 아픔과 ‘타인’의 아픔을 동시에 헤아리는 시집을 찾았다.
그러니까 이대미 작가의 〈비우〉를 논하는 자리에서 시집을 함께 소개하려고 했다. 내게 이것은 도전적인 행위였다. 왜냐하면 보수적인 우리나라의 경우, 그것이 문학이든 만화이든 영화이든 한정된 장르 안에서 논하는 것이 원칙이다. 시집을 소개하는 자리에 만화를 소개할 수 없으며, 영화를 소개하는 자리에 문학을 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가능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주변의 여러 시선으로부터 따가운 눈총을 감내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방식은 예측할 수 있는 형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 이런 모순점이 작동하고 있음에도 문학을 논하는 자리에서 특히, 시를 논하는 자리에서 이대미 작가의 〈비우〉를 논했다는 것은 관성을 파괴한 행위였다. 그만큼 이 텍스트가 문학적이면서 동시에 시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지점을 품고 있다고 판단해야 한다. 따라서 이대미 작가의 〈비우〉 역시, 오랜 시간 내가 생각하고 있던 만화의 편견을 급속도로 회전하게 해준 텍스트 중의 하나이다.
이대미 작가의 〈비우〉와 최규석의 〈송곳〉도 내게는 나름 파격이었지만, 영화 〈부산행〉(2016)으로 잘 알려진 연상호와 최규석의 공동작품 〈지옥〉 역시도 문학적으로 다가왔다. 이 작품은 ‘믿음’에 대해서 다룬다. 인간의 맹목적인 믿음이 이 사회에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판타지의 형식으로 풍자한 만화다. 지옥의 사자가 나타나 고시하게 되고 고시한 시간에 어김없이 고시를 받은 사람을 죽이러 온다는 세계관을 갖고 있다. 하지만 사자의 의도를 셈하려는 사이비 신자들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 이유는 ‘의도’를 정면으로 비트는 어머니의 ‘사랑’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일방적인 믿음을 인간의 사랑으로 배반한 텍스트였다. 이 작품 역시 이런 구성이라면 소설보다 더 괜찮은 거 같지 않냐는 생각을 품게 했다. 〈지옥〉을 가지고 2021년 2월 24일 웹진 〈문화 다(多)〉에 〈의도(意圖)와 우연(偶然)의 구렁텅이〉(http://www.munhwada.net/home/m_view.php?ps_db=culture_photo&ps_boid=27)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런 이유다. 이때부터 나는 동시대의 만화를 찾아 나섰다. 작가주의 만화를 탐닉할 수 있다면 남들보다 빠르게 수많은 이야기를 흡수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행위를 통해 이야기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작정 서점에 들러 오래전 텍스트부터 최근 텍스트까지 닥치는 대로 사 읽었다. 그리고 그 해에 〈그래픽 노블의 역습〉이라는 주제로 만화영상진흥원에서 주체하는 만화평론상을 받고 공식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세상이 또 바뀌었다. 만화는 언젠가부터 ‘종이책’ 시대가 아닌 ‘웹툰’ 시대가 되었다. 종이책이 품고 있는 장점은 아마도 다음과 같을 것일 테다. 2014년 7월 4일 황현산 평론가가 경향신문에 쓴 칼럼 〈종이 사전과 디지털 사전〉에 수록된 글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책과 잉크의 냄새가 어떤 분위기를 형성하고, 한 낱말을 찾다가 다른 낱말에 한눈을 팔 수도 있으며, 책의 수택에 연구자로서 긍지를 느끼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전을 뒤적이다 피곤할 때는 그 두꺼운 사전을 베고 잠을 잘 수도 있다. 시디를 베고 잠을 잘 수는 없지 않으냐.”는 것이다. 물론, 이 목소리는 황현산의 목소리가 아닌 〈연세한국어사전〉(2008)을 편찬한 이상섭 교수의 말이기도 했지만, 책이 가지고 있는 물질성과 몸의 감각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런 장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만화의 경우 ‘웹툰’은 또 달랐다. 웹에서 펼쳐지는 만화의 단점보다는 장점이 워낙 컸다. 나는 이런 흐름을 2022년 2월 11일 〈미래의 만화를 찾아서〉(http://www.incheon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128235)라는 주제로 〈인천일보〉에 다음과 같이 썼다.
뉴턴의 운동법칙에서 논의되는 이야기가 아닌, 정서나 문화와 관련된 '관성'의 법칙에 대해 적으려고 한다. 주제는 만화이다. 독자들은 물을 수 있다. 만화와 '관성'이 무슨 이유로 연결되는지 말이다. 하지만 '기술'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이들의 상관관계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만화는 오랜 시간 독자들에게 책으로 읽혔다. 그림과 말풍선이 존재하고 칸과 칸 사이를 넘나드는 움직임이 우리에게 익숙한 만화였다. 그래서 만화가들은 자신만의 예술적 감각을 출판만화에 담아내려고 애썼다. 하지만 이런 출판만화는 2000년대 초반에 전파된 '웹(web)' 문화로 인해 서서히 주춤하게 된다. 만화가 책으로 인쇄되어야 한다는 믿음이 새로운 기술로 인해 의심받기 시작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소박한 생활이 '웹'을 통해 이뤄졌다. 취미와 쇼핑이 자연스럽게 전자상거래로 확장되었고 다양한 모임과 정보가 텔레비전이 아닌 인터넷 창에서 해결되었다. 사람들의 생활 습관이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공간에서 이뤄지기 시작한 것이다. 만화가 종이 책으로 인쇄되어야 한다는 기존의 관성을 멈추고 인터넷에 연재되기 시작한 시기가 이쯤이다. 그래서 새롭게 탄생한 장르가 '웹툰(webtoon)'이다. 그러니 웹툰은 발견된 것이 아니라 빗겨나갈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인 장르였다.
웹툰은 웹(web)과 카툰(cartoon)의 합성어로 인터넷을 통해 연재와 배포가 이뤄지는 만화를 말한다. 흥미로운 것은 만화가 인터넷 환경에 처음 발을 내디뎠을 때다. 사랑도 연애도 일도 처음에는 모든 것이 낯설고 서툴다. 만화 또한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출판만화가 스캔의 형식으로 공유되었지만, 이러한 방식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 방식은 웹이라는 새로운 공간과 장소에 어울리지 못했다. 인터넷 환경에서 스캔 만화는 종이책과 큰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새로운 공간에서 최적의 상태와 조건을 찾는 것이 인간이다. 좌우 또는 우좌로 만화책을 읽는 방식이 아닌, 마우스나 집게손가락을 이용해 세로(scroll)로 만화를 내려 읽기 시작했고 만화가들은 이 형식에 적응하려고 했다. 주어진 조건과 상황이 변화함에 따라 만화의 형태도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 현재 웹툰에서 이 방식은 정착되었다. 더 나아가 스마트폰의 대중화로 이 기계에 최적화된 만화가 요구되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웹'이라는 환경에서 만화가들이 자신의 감각을 좀 더 '잘' 표현하고자 애썼고, 그 방식은 다양한 기술과 방법론으로 만화가마다 다르게 반영되었다. 예를 들어 자신의 만화를 동영상처럼 움직이게 하거나 직접 적재적소에 음악을 배치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기술과 방식으로 만화가들은 '웹'과 '스마트폰'이라는 환경에 다가가려고 한다. 지금, 이곳의 만화 풍경은 이렇다.
최근에는 웹툰으로 연재를 시작한 인기 있는 작품들이 단행본으로 출간되고 있다. 그래서 독자들은 책으로도 웹툰으로도 만화를 탐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종이'와 '웹'이라는 두 환경 차이에서 발생하는 만화 효과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차이를 독자들 또한 인지하고 만화를 읽을 필요가 있다. 즉 어떤 환경에 놓이느냐에 따라 만화에도 형식이 시(詩)처럼 중요하게 작동한다.
더 나아가 우리 만화에서 예술(작품)이라고 부를 수 있는 만화가 웹에서 가능하리라고 믿는다. 예술가적인 자기 응시가 반영된 작품이 웹에서도 활발히 이뤄지는 것을 상상해 본다. 그 방식은 기존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표정일 것이다. 물론, 만화를 표현하는 데 있어 '웹'이라는 공간이 정답은 아니다. 이번에 만화계의 오스카라는 '하비상'을 받은 마영신의 <엄마들>처럼 출판만화도 충분히 상징적 기표로 반향을 일으킬 수 있다. 나는 이처럼 웹툰이건 출판만화건 미래에 놓인 만화를 찾아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싶다. 이 글은 이런 작업을 위해 진행된 첫 번째 나의 발걸음이다. 힘차게 발을 내디뎌 본다.
한국의 만화가 상당한 부분 웹툰‘화’되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만화를 가르치는 학교 역시도 웹툰으로 무장을 했고, 대학 입시 또한 웹툰으로 선발하니 웹툰은 내적으로건 외적으로건 피할 수 없는 만화의 숙명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흐름을 반박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인터넷 세상이기 때문이다. 삶의 대부분이 현실이 아닌 가상에서 이뤄지니 웹상에서 만화를 보는 것이 어쩌면 필연이라는 생각도 든다. 가상이 현실이 된 것이다. 과거 사진 예술이 태동할 시, 예술로 인정받지 못한 자신의 작품이 예술작품과 견줄 정도로 의미 있는 작품임을 오랜 시간 증명해야 했듯이, 웹툰 역시 이런 증명 과정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 과정은 과거의 예술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불과 10년 만에 만화 판의 흐름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여전히 모순점 하나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웹툰이 많은 사람에게 인기를 얻고 소비되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산업화된 경향이 그것이다. 이로 인해 자연스럽게 텍스트의 질은 하락하게 되었다. 독자들은 웹툰의 거품 산업과는 무관하게 웹툰 주변을 떠나기 시작했다. 음식점에 찾아갔을 때, 공간이 화려하지 않아도 주문해 나오는 음식이 건강하고 맛있다면 사람들은 줄을 서서 그 음식점을 찾는다. 웹툰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공장식 웹툰 시스템으로 연재 속도를 빠르게 하고, 흥미와 호기심의 패턴을 찾아 제시할 수 있지만, 이런 이야기의 틀은 창조적인 이야기와 거리가 먼 것이었다. 통계로 나열된 허수아비 이야기에 불과했다. 한마디로 말해 작품이 덜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문학평론가로서 이런 현실이 불만이었다. 어떤 방식이든지 수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읽었던 좋은 작가들이 만화의 편견으로 인해 피해 보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만화평로가로 2021년 데뷔한 후, 다양한 지면에 목소리 내기 시작했다. 운 좋게도 이런 문제의식을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
텍스트의 수준에 대한 문제는 만화 판의 고질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만화계는 만화 관련 잡지가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잡지가 전무 하다. 만화영상진흥원에서 출간하는 〈지금, 만화〉가 유일하다. 이 작은 공간에 수많은 만화인의 목소리를 반영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형식적인 제스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판단된다. 최소한의 아카이브 형식일 뿐이다. 따라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지면을 홀로 확보해야 했다. 〈인천일보〉와 〈오마이뉴스〉에 꾸준히 좋은 만화를 찾아 소개하려고 했던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다. 만화평론가가 된 이후, 이런 문제의식을 통해 산업 웹툰이 아닌 좋은 ‘만화’와 좋은 ‘웹툰’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웹툰’의 생태계가 자연스럽게 정화되기를 바랐다. 나의 이런 마음으로 인해 만화(웹툰)계가 더는 산업에 목매지 말고, 독자와 진정한 소통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 컸다. 그렇게 이 작업은 시작되었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주제(〈만화(웹툰) 작가들에게 그림을 그리는 것이란?〉)도 방향은 조금 다르지만 같은 ‘의도’에서 진행된 작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