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기와 사건에 대해 (下) - 계기는 창작을 움직이게 하는 힘 (下)
안타깝게 치매에 걸린 아버지의 삶을 그린 만화가 심우도의 <우두커니>의 ‘작가의 말’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적혀있다. 이 역시 이 작품이 만들어지게 된 ‘계기’를 보여준다.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아이를 키우면서, 이런 생각을 자주 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이 순간이 참 소중하구나…. 이 마음 잊지 않고 살아야겠습니다.”
인용문처럼 심우도는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아버지와 보냈던 순간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사랑하는 사람과 보낸 찰나의 시간을 가슴에 간직한다. 심우도가 만화를 그리자고 마음먹은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치매에 걸린 아버지와 얽힌 모든 경험을 만화로 재현할 수는 없었겠지만, 아버지의 치매 이야기를 그리는 과정에서 그는 어떤 방식이든지 위로를 받았을 거라고 짐작된다. 물론, 아버지를 기억하고 다시 그림으로 재현하는 과정은 힘들었겠지만, 아버지의 좋은 모습도 덜 좋은 모습도 모두 담아내는 과정에서 하나뿐인 나의 아버지를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이 작업은 의미 있다고 본다. 그리고 만화가가 이행한 한 개인의 이 작업은 치매에 걸린 다른 가족들의 삶 역시도 간접적으로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고 본다. 심우도의 이 작품의 ‘계기’는 아버지의 부재와 긴밀하게 만난다는 점에서 앞에서 살펴본 작품도 그렇고 이 작품의 ‘계기’도 어쩌면 이렇게 모두 쓸쓸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두커니〉, 〈살아만줘요〉, 〈도둑소녀〉 표지
그러나 예술가들의 계기가 모두 이렇게 우적우적하거나 안타깝거나 어쩔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사람마다 어떤 일을 시작한다고 했을 때, 그 계기가 모두 같을 수 없다는 점에서 창작자의 계기도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움츠린 예술가의 일상이라거나, 버려진 존재라거나, 아픈 아버지의 사연만이 계기로 등장하지는 않는다. 만화가 고미랑의 〈도둑소녀〉(2024, 문화기획선 고잉미랑호)나 이소베가 글을 쓰고 백종민이 그림을 그린 〈살아만줘요〉(2024, 송송출판사)의 경우는 계기의 층이 조금 다르다. 창작의 ‘계기’가 상승 이미지를 품은 채, 긍정적인 맥락에서 펼쳐진다는 점에서 기억할 필요가 있다.
만화가 고미랑의 〈도둑소녀〉 주인공 고윤정은 어린 시절 부모님 지갑에 돈을 훔쳐 자신이 사고 싶은 것이나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사서 먹는 불량 학생이다. 하지만 소녀의 부정을 마냥 비판할 수 없다. 누구나 어린 시기에 사랑받으며 따뜻한 가정에서 자라야 할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잣은 부부 싸움과 아버지의 거침없는 폭력으로 인해 가정은 일찍 흔들렸다. 이런 환경 속에서 소녀는 몸을 감추고 숨어야 했다. 소녀는 가정에서 사랑을 바랄 수 없었다. 그런 소녀는 사랑을 외부에서 찾았고, 친구들에게 떡볶이를 사주거나 예쁜 옷을 입는 행위를 통해 가정에서 받아야 할 인정을 밖에서 채운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소녀의 부정이 거세지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다. 하지만 소녀에게 특별한 사건이 발생한다. 교통사고로 병원에 방문하게 되었을 때, 시력을 잃은 ‘미지’라는 인물을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그녀는 눈이 보이지 않아서 세상이 온통 ‘턱(벽)’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는 인물로 윤정은 그녀를 돌보는 과정에서 자신이 품고 있는 편견을 수정하고 시선을 확장하게 된다. 이를 더 구체적으로 확인하기 위해 ‘작가의 말’을 직접 확인해 보자.
반려자의 아버지는 산업재해로 장애인이 되었다. 급작스레 아버지를 돌보게 되면서 그가 겪었던 혼란과 갈등은 연애 때부터 지금까지 고스란히 내게도 전해져 온다. 어린 시절 만난 미지 언니가 눈이 보이지 않게 되면서 겪어간 삶의 다른 이면들을 보면서도 그랬다. 어린 시절 만난 미지 언니, 그리고 지금의 반려자를 통해 그동안 외면해 온 시선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 이를테면 가난, 장애, 누군가를 돌봐야 하는 삶 같은 것들.
나는 미지 언니를 만나 세상을 보는 시각을 다시 배웠다. 내 옆에 존재한 적 없던 '장애'를 가진 사람을 미지 언니를 통해 처음 겪었다. 밝은 곳보다 어두운 곳에 시선을 두고,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상처와 마음을 미지 언니가 알아차리고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장애가 있기에 연약함을 숨길 수 없는 미지 언니 앞에서, 숨기고 싶었던 나의 상처와 연약함을 오히려 온전하게 드러낼 수 있었다. - 작가의 말 中
만화가는 자신의 반려자인 아버지가 산업재해로 인해 겪었던 혼란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어린 시절에 만났던 미지 언니가 겪어야 했던 혼란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이런 경험을 통해 “삶의 다른 이면”들을 응시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것은 “이를테면 가난, 장애, 누군가를 돌봐야 하는 삶 같은 것”들이라고 말한다. 궁극적으로는 앞이 보이지 않아 연약함을 도무지 숨길 수 없었지만, 매사 당당한 미지 언니를 삶을 바라보면서 자신 역시 과거에 품고 있었던 상처와 대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부끄러운 ‘도둑질’과 아버지의 폭력 속에 힘들어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드러내 보이자고 마음먹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작가에게 ‘계기’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미지’ 언니의 삶 자체다. 미지 언니가 겪어야 했던 연약함이다. 이 두 진실과 마주하는 과정 자체가 이 만화를 탄생하게 만든 배경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계기는 누구에게나 특별한 사건으로 다가와,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힘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소베의 〈살아만 줘요〉의 계기는 무엇일까. 이 텍스트와 화자는 폭력적이면서도 무관심한 아빠로 인해 괴롭다. 아빠를 닮은 오빠의 폭력성에도 자유로울 수 없다. 이 두 폭력을 홀로 견디며 살아가는 엄마의 삶은 너무나 비참해 보인다. 주인공 반디는 살아낼 수 없다. 그녀는 이런 가정(울타리)에서 숨을 쉴 수 없다. 벗어나지 못해 목이 조인다. 이런 시간이 지속되자 반디는 자해 행위를 통해 자신을 힘들게 했던 가족으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한다. 그런데 어느 날 새로운 사건이 발생한다. 정신의학과 상담 선생님과의 대화도, 매번 위로해주었던 다온 오빠도 결국에는 자신의 삶을 온전히 책임질 수 없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이다. 이런 깨달음(계기) 이후, 반디는 방을 얻어 홀로 독립하기로 마음먹는다. 그 이후로 반디는 점차 건강한 자신을 되찾는다. 그렇다면 이 텍스트에서 ‘계기’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누구도 자신을 온전히 책임져 줄 수 없다는 너무나 당연한 진실을 깨달았다는 사실 자체일 것이다. 누군가에게 기대하거나 의지하는 것보다는 홀로 일어설 수 있어야만 자신과 주변을 챙길 수 있다는 깨달음 자체일 것이다. 건강하게 자신을 돌보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을 스스로 깨달은 것이 ‘계기’이고 이 경험으로 인해 이런 서사는 완성될 수 있었다. 이처럼 예술가의 계기는 하나의 ‘서사’를 낳는다. 하나의 창작물을 완성한다.
그밖에 무수히 많은 만화가의 ‘계기’를 이 짧은 지면에 다 적을 수는 없지만, 만화를 단순히 재미로 읽기보다는 만화가가 이 만화를 만들 수밖에 없었던 계기나 사건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이 과정에서 궁극적으로 자신만의 계기와 사건을 찾아간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여정이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타인의 ‘계기’가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살아 숨 쉬고 있는 ‘나’의 ‘우리’의 소중한 ‘계기’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