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풍선의 심리 (임상심리사의 만화 읽기)
8화-내 안의 적, 그리고 공생
평생 나를 가장 많이 나무라고 야단치던 것은 아마도 나 자신이었다. 문제의 원인을 개인 내부로 돌리는 것을 '내적 귀인', 외부로 돌리는 것을 '외적 귀인'이라고 한다. 난 어릴 때부터 내적 귀인 중심적인 삶을 살아왔다. 사건의 중심에는 개인의 내부적 요인들이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하고, 핑계를 대는 것보다 자신의 책임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익숙했다. 그건 소심해진 사춘기 이후 자연스레 만들어진 사교 관계의 원인이자 결과였다.
어린 시절부터 나의 소심한 세계를 지켜준 것은 언제나 만화 속 주인공들이었다. 현실의 방은 황량했지만 내면 속 자아의 방에는 내가 사랑했던 영웅들의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더 강한 적 앞에서 신이 나는 손오공, 열정을 가진 마이페이스 강백호, 링 위에 서면 불굴의 의지로 굳게 선 일보. 선망의 대상인 그들을 본받아서 넘치는 열정과 성실함, 의지, 노력, 열혈을 재현하고 싶었다. 그들처럼 뜨거워지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의 나는 그들처럼 뜨거워지지 못했다. 언젠가는 나도 그렇게 될 거라 믿었지만, 열의는 금방 식어버렸으며 다짐은 잊어버렸다. 현실에 좌절하거나 자신의 한계를 깨달아갈수록 내 자아의 방에서는 서늘한 시선이 느껴졌다. 손오공은 나를 겁쟁이로 보는 듯했고 강백호는 나의 끈기 없음을 질책했으며, 일보는 의지 부족을 나무랐다. 『아기와 나』의 진이는 내 배려심의 결핍을, 김전일은 관찰력의 빈곤을 타박하는 것만 같았다. 심지어 『오늘부터 우리는』의 문제아 미츠하시나 『GTO!』의 오니즈카에게조차 행동력과 집요함에서 뒤처진다는 열등감을 느꼈다. 『그 남자 그 여자!』의 아리마에게는 그 어떤 것조차 비교될 수가 없었다.
나이를 먹어 가며 그들과 나 사이에는 이미 부모와 사춘기 자녀 사이만큼의 거리가 생겼음을 깨달았다. 내적 귀인 성향은 어느새 내가 사랑했던 영웅들의 표정을 통해 더욱 견고하고 엄격한 기준으로 변형되어 있었고 나 자신을 끊임없이 채찍질했다. 그렇게 만화 주인공들의 시선과 목소리는 내게 현실도피의 환상을 심어주는 동시에, 그 환상에 미치지 못하는 나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양날의 검이 되었다.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이 내면화된 목소리를 '초자아'라는 이름으로 구분 지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사랑했던 만화들이 나의 이 '적'에게 힘을 부여하고 강화했다는 사실은 무척 아이러니하다. 노력과 열정, 의지로 끝까지 난관을 극복하는 주인공들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었다. 문제는 그들과 나 자신의 차이를 구분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영웅시하고 선망하여 내적 기준으로 삼았던 어린 시절의 나에게 있었다.
모든 만화 주인공은 슈퍼히어로적인 존재이며 만화 속 세계관과 주변 인물들은 그를 위해 존재한다. 사실 그들의 노력과 의지를 본받고 싶던 마음의 이면에는 그들이 성공의 부산물로 얻었던 찬사와 관심을 받고 싶었던 것뿐이다. 솔직히 그들처럼 매달려 하고 싶기보다는 그냥 그들처럼 쉽게 되고 싶었던 속내가 있었고 그러면서도 그런 유치한 욕구를 인정할 수도 없었다.
실패의 상황에서는 자신의 노력 부족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변명의 여지를 갖기 어려웠다. 눈 앞에 주어진 상황을 해결하지 못할 때마다 나의 노력, 능력, 의지력이 부족해서라고 자신을 채찍질할 수밖에 없었다. 다양한 만화를 본 것이 오히려 어떤 상황과 어떤 조건에서든 내게 핑계를 대고 도망갈 구실을 주지 않았다.
현실도피의 악순환에 빠져 있던 사춘기의 나를 다시 구원한 것도 결국 만화였다. 조금 더 나이 먹은 나는 조금 다른 종류의 주인공들을 마음에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결함과 상처를 가진 존재들, 세상이 빌런으로 몰아세운 이들, 누군가 패배자로 규정한 이름들. 이상하게도 내 안에서는 그들이 구원자가 되었다.
천사의 마음을 가진 악마적 외모: 『엔젤전설』

그림 1 『엔젤전설』 / 야기 노리히로 / 학산문화사/DCW / 리디북스
야기 노리히로 작가의 『엔젤전설』은 공포스러운 외모 때문에 새 동네에서 짱이 되어버린 기타노의 이야기다. 학업 우수, 품행 단정하지만, 낯선 이들에게 오해와 공포, 분노, 심지어 폭력까지 유발하는 외모를 가진 기타노는 선량하고 이타적인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 새로운 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기타노는 적으로 취급당하며 멸시받거나 공격받는다. 순수하고 평화로운 내면은 악마적인 외면에 가려 그를 이해받게 놔두지 않는다. 가만히 있음에도 깡패들은 싸움을 걸어오고 그를 쫓아내기 위한 모략을 꾸민다.
기타노는 그 모든 몰이해의 난관과 적대적인 편견을 자신의 힘으로 극복한다. 오해로 인해 싸움을 벌이기도 하지만, 그가 승리에 이르는 과정은 기타노의 선한 의도에 따른 결과로 귀결된다. 『엔젤전설』에서 우연의 연속처럼 보이는 해프닝들은, 기타노가 가지고 있던 이타적인 의도와 상대를 생각하는 넓은 마음씨가 원인이 되어 발생한 결과이다. 공명정대한 마음으로 대가를 바라지 않고 타인을 돕는 공리주의자, 무협적으로 이야기하면 말 그대로의 '대협(大俠)'인 것이다.
기타노가 특별한 것은 타인의 행동을 악의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선한 마음으로 바라보기에 타인의 의도 역시 선하게 받아들인다. 그는 비호감의 외모를 가졌으며 강하지도 않고 초인적인 능력도 없다. 그가 누구보다 강한 것은 보이지 않는 선한 의도, 내면의 힘, 수용과 포용력이다. 완벽한 외모와 능력을 갖춘 슈퍼히어로가 아니라, 오히려 악마 같은 외모를 가졌기에 더 천사 같은 내면이 도드라지며, 본인이 외모로 차별받으니, 타인을 외모로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봐준다. 기타노를 통해 처음으로 나는 '우수함을 강요하지 않는' 주인공을 만났다.
더불어 자신의 도량이 넓다는 것조차도 모르기 때문에 다른 이에게도 자신의 기준을 강요하지 않고 관대하다. 이 모든 것이 현실에서 얼마나 어려운 환상인지를 알기에 더 고결하다. 궁극적으로 기타노가 보여주는 선함이란 행동함에 있다. 그건 자질이나 능력과 무관한 것이었다. 덕분에 나에게도 내가 누구인지보다 ‘행동’ 자체가 가장 중요하다는 의미를 보여주었다.
패배자의 반등 의지: 『도박묵시록 카이지』
후쿠모토 노부유키의 『도박묵시록 카이지』는 게으른 백수 청년 카이지가 과거 동료의 보증을 잘못 선 이유로 빚의 수렁에 빠지고, 도박으로 빚을 탕감하려다 더욱 큰 도박에 가담하며 죽음의 순간을 넘나드는 인생 이야기다.
첫 장면부터 카이지는 한심한 주인공의 전형을 보여준다. 아르바이트조차 하지 않는 게으른 삶에 도박으로 돈과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넘어, 길가의 고급 자동차 타이어에 펑크를 내거나 흠집을 내는 등의 경범죄를 일상적으로 저지른다. 카이지는 차 주인이 타인을 착취하거나 비겁한 방법으로 돈을 벌었을 것이라 멋대로 가정하며, 그렇기에 이런 정도의 손해를 보아도 당연하다는 자기 기만적인 범죄에 빠져 있었다.

그림 2 『도박묵시록 카이지』 / 후쿠모토 노부유키 / 서울미디어코믹스 / 리디북스
그런 카이지를 한심하게 보면서도, 나 역시 어느 순간 카이지와 비슷한 위치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에스포와르 선의 관리자 토네가와가 참가자들 앞에서 일갈한다. "어리광을 버려라. 원래 세상이란 결국 중요한 건 무엇 하나 대답해 주지 않는다." 냉정하지만, 학교나 사회에서조차 누구도 말하지 않던 가르침이다.
이후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카이지가 다른 이의 꾐에 넘어가 배신당한 뒤 이어지는 후회 역시 뼈저리다. 괴롭고 힘든 결단을 내릴 때 스스로 정하지를 못하고 타인에게 맡기고 말았던 카이지의 과거 회상 속에서,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렇게 초반부터 카이지는 나락의 연속으로 떨어진다. 이후의 이야기들에서도 카이지는 타인을 믿었다는 이유로 또 배신당하고 위기를 맞이한다. 다시금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절망 속에서 빠져나오려 몸부림치고, 지옥의 입구에서 구사 회생을 위한 반등의 기회를 포착하는 카이지를 목격하는 이야기가 『도박묵시록 카이지』이다.
카이지의 이야기가 무척 흥미진진하지만, 그를 보며 귀감으로 삼아야 할 것 같은 느낌은 들지 않는다. 대부분 한심하고, 어떤 면에서는 안쓰럽고, 아주 가끔은 정말 놀라운 기책을 보일 뿐이다. 어쨌든 그는 끝나지 않은 만화 속 이야기 속에서 계속 빚쟁이며, 아마도 또 배신당하고, 앞으로도 도박판을 전전할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와 친구가 되어도 나쁠 것 같진 않다. 그가 결정적인 순간에 보여주는 인간적인 모습들 덕분이다.
분명한 것은 그의 능력이나 인성과 별개로 그의 위치가 독자인 나의 위치와 같다는 것이다. 그는 만화 안에서 주인공이지만, 그 세계관 안에서는 경쟁에서 이긴 승리자만이 주인공이 될 수 있기에 승리자는 곧 자본가뿐이다. 이 때문에 카이지는 주인공이면서도 영원히 만화 속 세계의 주인공이 될 수가 없는 위치이다. 그렇기에 어떤 주인공보다도 독자인 나의 모습, 주인공이 되지 못한 평범한 사람들의 자리에 가깝다. 실패를 개인의 노력 부족과 무능함으로 돌리던 내면의 목소리에게, 카이지는 세상의 부조리함에 대한 논리와 평범한 개인들의 연대 필요성으로 눈을 넓히게 만들었다.
사채꾼의 눈으로 본 착취 논리: 『사채꾼 우시지마』

그림 3 『사채꾼 우시지마』 / 마나베 쇼헤이 / 대원씨아이/DCW / 리디북스
마나베 쇼헤이 작가의 『사채꾼 우시지마』는 영세 사채업을 하는 우시지마를 둘러싼 이야기다. 우시지마는 매일 파칭코 중독 주부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다중채무자와 개인파산자를 대상으로 대출 영업을 한다. 우시지마의 영업장을 통해 사채업을 처음 배우게 된 타카다는 처음엔 사채의 착쥐적 구조에 죄책감을 느끼지만, 얼마 안 가 빚쟁이를 쥐어짠 결과로 우시지마에게 비싼 양복을 선물 받고 나자, 그의 표정은 변한다.
『사채꾼 우시지마』는 첫 에피소드부터 사채에 빠진 이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표현한다. 우시지마는 죄책감을 표현하는 신입 타카다를 향해서, 또한 독자를 향해서도 훈계한다.
"너한테 죄책감이 있다면 왜 일상생활에선 못 느끼지? 돼지를 죽이는 죄책감도 없이 갈비를 뜯어 먹고, 자연을 파괴하는 죄책감도 없이 잔뜩 쓰레기를 만들어 내고."
"손님 중에 동정할 가치가 있는 인간 따윈 하나도 없어."
이후 우시지마는 작가의 목소리인 듯 아닌 듯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세상은 약육강식이다. 조금씩 눈치 못 채게 가져갈 뿐. 내가 노예들에게 빼앗는 거랑 하나도 다르지 않아. 빼앗느냐 뺏기느냐라면, 나는 빼앗는 쪽을 택하겠어."
『사채꾼 우시지마』는 사금융업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서민금융에서조차 구제받을 수 없는 신용불량자들의 생태계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묘사한다. 그 결과 악역인 우시지마보다 자본주의의 주인공인 돈, 정확히는 빚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려준다. 놀라운 것은 대부분이 창작이 아닌, 작가의 취재를 통해 얻은 사실을 기반으로 가공된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 때문인지 작품은 점차 우시지마의 뒤를 따라가기보다는 사건 자체를 쫓아가는 다큐멘터리 만화에 가까우며, 우시지마는 배경적으로만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결국 『사채꾼 우시지마』가 묘사하고자 한 진짜 주인공은 자본주의라는 세계 자체이다. 『도박묵시록 카이지』도 자본주의를 작품 내에서 묘사하려 했다. 그 세계관 안에서 승리란 자본을 축적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만화의 묘미는 주인공에게 불리하게 기울어진 게임 속에서 상대의 빈틈을 노려 반전의 모략을 꾸미고, 그럼에도 자본에 종속되지 않고 인간으로서 승리하는 과정을 목격하는 이야기였다.
우시지마는 현실에서 자본가가 되기 위한 목표를 가지고 사채업을 한다. 카이지를 통해 자본주의를 다루던 방식과는 정반대로, 그는 자본의 논리에 충실하며 승리에 목말라 있다. 토네가와가 설파하던 논리를 밀어 붙이고 있는 것이다. 우시지마는 거리의 현실에 통달해 있고, 신체적으로도 강하며, 카리스마까지 보유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어떤 인간이든 믿거나 호의적이지 않으며 인간혐오에 가까운 모습들을 보여준다. 여러 면에서 카이지와는 정반대이다.
하지만 동시에 우시지마 역시 자본가는 아니다. 우시지마에게 착취당하는 빚쟁이들을 보여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시지마 역시 상위의 전주나 야쿠자에게 착취당하는 입장이다. 우시지마가 뺏는 쪽이 되고 싶은 것은, 어린 시절 무기력하게 뺏기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착취당했던 존재가 착취하는 동시에 착취당하는 존재가 되버린 현실. 결국 우시지마 역시도 독자인 나의 모습에 가깝다.
이야기의 결말에서, 우시지마는 자본가가 되려 했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가 믿고 행동하려 했던 삶의 태도는 그의 삶을 통해 전달되었다. 그는 착취 구조의 자본주의 현실을 냉철하게 바라보는 눈을 가지고, 거리의 삶 속에서 착취당하지 않기 위해 자기를 지키는 룰을 철저히 관철하려 했다.
그는 나와 다르게, 진짜 주인공인 세상 앞에서 누구도 주연이 될 수 없다는 우울한 운명을 거부하려 발버둥을 치던 이상가였을지도 모른다. 우시지마는 카이지가 보여준 세상의 부조리에 대한 메시지를 넘어, 그 부조리를 움직이는 '시스템'에 닿게 하는 다잉 메시지를 남겼다. 밑바닥 사회로 그려낸 인간 욕망과 자본주의의 해부 덕분에, 나의 '내적 귀인'은 비로소 '외적 귀인'이라는 균형추를 얻게 되었다.
장보러 다니는 평범한 슈퍼히어로: 『원펀맨』

그림 4 『원펀맨』 / 무라타 유스케, ONE / 대원씨아이/DCW / 리디북스
무라타 유스케와 ONE 작가의 『원펀맨』은 어떤 적이든 한방에 해치울 수 있는 힘을 가졌지만, 그 대가로 대머리가 되어버린 히어로 사이타마의 일상을 그린다. 기타노, 카이지, 우시지마라는 반(反) 주인공들을 거치면서 내 안의 적은 조금씩 힘을 잃어갔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아있었다. 선과 악, 히어로와 빌런의 경계는 정말 명확한 것일까. 『원펀맨』은 모든 히어로물의 안티테제이자 패러디에 가까운 작품이다. 비밀스런 힘의 원천을 가지고 있다거나, 정의감으로 가득 차 있다거나, 세계관 속에서 당연히 거대한 인기를 누린다는 기존 히어로물의 공식들이 『원펀맨』에서는 완전히 부정된다.
사이타마가 가진 힘의 비밀은 외계에서 오거나 물려받은 게 아닌 매일 반복하는 일상적인 트레이닝의 결과다. 그가 힘을 증명하거나 히어로 역할을 즐기려는 부가적인 의도가 없기 때문에 인기도 생기지 않는다. 강한 힘을 휘두를 때도 자신의 자율적인 판단과 도덕감에 따를 뿐 외부의 책임이나 요구에 부응하지 않는다. 그의 사생활은 가난하고 궁핍하며 지루하다.
그가 특이한 히어로인 것은, 애초에 이 세계관이 조금 더 현실 요소를 끌어들인 것이기 때문이다. 기존 히어로물의 공식들은, 그 자체가 가상의 이야기임을 분명하게 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였기에 반대로 원펀맨은 현실을 아주 조금 대입하였을 뿐이지만 모든 게 기존 히어로물의 안티테재가 되어버렸다.
만화 속 세계에서 히어로들의 모든 활동이 회사 업무와 별반 다르지 않다. 매일 실적을 보고하고, 자신의 노고를 어필하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도 검증받아야 한다. 실적들이 쌓이면 더 높은 등급으로 승격하며 더 많은 인기와 수입을 누린다. 어찌 보면 지나치게 현실적인, 관료적이고 기업적인 마인드가 적용된 히어로 시스템이다.
그렇게 보면 사이타마는 능률이 낮고 불성실한 회사원이다. 자신의 노고를 보여주지 않고, 자신의 업적을 과시하지 않고, 실수나 책임은 회피하며, 불필요한 의무에 따르는 것은 거부하고, 제멋대로 일 처리를 한다. 따져보면 직업을 갖고 근로하는 현실에서 대부분의 근로자는 감히 할 수 없는, 상상하기 어려운 행동들이다.
그렇기에 모든 것을 한 방에 날려버리는 펀치만큼이나 시원스러운 그의 인격을 만들어 낸다. 어찌 보면 소년들은 그의 펀치에 열광하지만, 성인들은 그의 태도에 속이 시원함을 느끼는 걸지도 모른다. 『원펀맨』의 본질은 그가 보여주는 활약 이상으로 그가 보이는 근로 형태, 요컨대 힘의 크기보다 힘을 가진 그가 어떤 태도와 모습으로 직업 활동을 해 나가는지에 가치가 있다.
고통은 필연적으로 빌런을 만드는가: 『이볼』

그림 5 『EVOL(이볼)』 / 카네코 아츠시 / 시공사 / 리디북스
10대 청소년 노조미, 아카리, 사쿠라는 세상에 상처받고 자살을 시도한 끝에 초능력을 각성한다. 초능력으로 세상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던 이들은 히어로와의 대립 끝에 더 큰 분노, 더 강한 힘을 개방하며 세상에 저항하게 된다.
카네코 아츠시 작가의 작품 <이볼>은 세상에 상처받고 자살을 시도했던 아이들이 오히려 초능력을 얻으면서 세상에 반기를 드는 이야기다. 영화 『조커』가 보여준 것처럼, 세상에 대한 분노가 축적된 과정에 설득력을 더하는 것은 고통이라는 서사이다. 평범한 이라고 하더라도 고통을 겪는다면 저항하고 분노할 자격이 주어진다. 세상으로부터 극심한 배척과 괴롭힘을 당해온 이들에게는,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세상을 파멸시켜도 마땅한 명분을 갖게 된다.
다만, 이것은 고통이 힘을 만들어 낸다기보다 작가가 등장인물들의 저항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고안한 서사 구조에 가깝다. 상처로 가득 찬 세상, 그리고 그것을 바로잡을 권력의 부패에 대한 분노를 쏟아붓는 이야기를 만들어 가기 위해, 작가는 그 분노의 명분으로 인물들에게 더 극단적이고 고통스러운 서사를 부여한 것이다.
빌런들을 배제하려는 『이볼』 속의 히어로들은 표면적으로는 정의를 외치지만 자신의 타고난 능력을 지배와 차별을 위한 도구로 삼을 뿐인 계급주의적 존재들이다. 그들을 보다 보면 내 안에서도 의문이 발생한다. 적을 규정짓고 처벌하던 내 안의 목소리가 사실은 오히려 세상의 논리로 무장해 나를 억압하는, 나의 적은 아니었을까?
『이볼』은 여기에 한 번 더 나아간다. 이볼을 지지하는 그룹이 생기며 그들을 추앙하는 이들이 생기자, 노조미는 교조화된다. 그 자신이 피해자이면서 분노와 고통의 우열을 나누며 세상에 반기를 들고자 하는 이들 사이에서 계급주의가 반복 순환된다. 결과적으로 작품 속에서 그려지는 차별과 고통은 초능력을 위한 각성의 계기가 아니라 그 초능력을 정당화할 만큼의 상처, 즉 세상에 분노할 자격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만화 속 초능력은 상처와 고통의 크기에 비례한 증거가 되어, 고통이 저항의 명분이 된다는 『이볼』의 설정은, 더 근본적인 질문으로 이어진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분명하게 구분되는 분노는 이해하기 쉬운 이야기다. 하지만, 피해자와 가해자가 모호할 때, 선과 악의 경계선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분열된 세상에서 융합된 존재의 싸움: 『데빌맨』
나가이 고의 『데빌맨』은 아키라가 지구의 원주민이던 데몬족에게 맞서기 위해, 친구 료의 권유로 데몬과 합체하여 데빌맨이 되는 이야기다. 인간의 마음을 가진 채로 데몬들과 싸우던 아키라는, 데몬들이 인간과 합체하기 시작하며 테러와 전쟁을 일으키자, 인간성을 지켜야 하는 이유를 상실한다. 인간 사이의 불신은 마녀사냥을 일으키고,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지옥을 만들어 낸다.
『데빌맨』은 역사적으로 일어났던 마녀사냥, 전쟁, 범죄들이 '데몬'이 인간인 척 속이거나 사악한 의도로 유발한 것처럼 표현한다. 인간과 데몬, 선과 악, 아군과 적 사이에는 근원적으로 섞일 수 없는 구분선이 그어져 있다. 그러나 아키라가 데몬과 합체하는 순간, 명확한 경계를 무너뜨리는 존재로 탄생한다. 인간의 마음을 가진 데몬이자, 데몬의 힘을 가진 인간인 그는 더 이상 어느 한쪽에도 속하지 않는다.
『데빌맨』은 인간이 가진 파괴성을 들춰냄과 함께 데몬이 인간을 추출하려는 이유, 지구를 지키고자 하는 생태주의적 의도를 조명한다. 아키라는 데몬과 싸우지만, 인간들로 인해 인간을 지키려던 소중한 것들을 전부 잃는다. 작가는 악마적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인류의 끝없는 파괴성과 약탈주의적 역사를 보여줌으로써, 데몬과 인간 사이 구분이 모호함을 보여주며 이분법적 분열 구조의 자성을 촉구한다.

그림 6 『데빌맨』 / 나가이 고 / AK 커뮤니케이션즈 / 리디북스
유아는 엄마로부터 원하는 대로 즉각적인 만족을 얻지 못할 때, 하나의 존재가 동시에 다른 태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엄마라는 대상을 둘로 쪼갠다. 만족을 주는 '좋은 엄마'와 좌절을 주는 '나쁜 엄마'로. 이것이 클라인이 말한 분열(splitting)의 기제다. 세상을 선과 악으로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은 이렇게 생의 초기부터 우리 안에 각인되어 있다. 『데빌맨』이 다루는 세계는 원초적 이분법 위에 세워져 있다.
인간은 모두 분열적인 세계관에서 태어나 그 사이를 오가며 성장한다. 그 발달 과정에서 흑백의 경계선 사이 회색 지대를 넓혀나가게 되지만, 기본적으로 '선'을 추구하도록 만들어진 세상의 섭리는 오히려 흑백의 채도를 더 강화한다. 그 '선'은 절대적 선이라기보다 자신과 적을 규정짓는 피아식별 체계에 가깝다.
자기에게 우호적이고 만족을 주는 것이 선이 되고 자신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경계 밖은 악이자 흑으로 규정된다. 국가, 정치, 이념, 인종, 종족, 종교. 상대주의적인 관점으로 보게 되면 모두가 누군가의 아군이자 누군가로부터의 적이다. 같은 편 안에 머무름으로 안정을 얻을 수도 있지만, 배타적인 적의 존재를 상정하는 한 인간은 평생 편집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불안에 기인한 적과의 의존적 공생: 『스킵과 로퍼』

그림 7 『체인소맨』 / 후지모토 타츠키 / 학산문화사/DCW / 리디북스
후지모토 타츠키 작가는 인간의 불안을 힘의 원천으로 삼는 악마들이 존재하는 세계관 위에 악마들의 존재감을 폭발적으로 확장했다. 선량함을 지키기 위해 인간성을 유지하던 아키라와 달리, 덴지는 자신이 경험해 보지 못한 평범한 일상을 꿈꾸며 포치타와 계약하고, 그 결과 모든 악마를 도륙 내버리는 체인소맨이 된다.
『체인소맨』 속 인간과 악마의 이분법적 세상은, 서로가 적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서로가 의존해서 사는 세상이다. 가장 강한 힘을 가진 것이 '총의 악마'인 것처럼, 악마의 힘은 인간의 불안에 전적으로 의지하기에 그들에게 공포를 일으키되 그들의 존재를 살려두어야 한다. 인간의 힘은 상대를 적으로 여기고 공포에 떠는 마음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것에서 비롯된다. 항시 자신과 적을 구분 짓는 인간의 분열된 내적 구조 안에서는 결국 영원히 공포는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악마도 사라지지 않는다. 서로를 의존하여 힘을 갖는 공생 관계가 일상적으로 구현화 된 『체인소맨』 속의 세상은, 분열적일 수도 있지만 오히려 완벽한 균형일지도 모른다.
내 안의 적과 나의 관계도 그랬다. 나를 가장 괴롭힌 것이 나 자신이었고 그런 나를 가장 두려워했다. 『체인소맨』식으로 말하자면 '자기 자신의 악마'인 걸까. 동시에 그 목소리 없이 나는 지금의 내가 될 수 없었다. 내 안에 비난하는 목소리는 나를 채찍질했지만, 동시에 그 채찍질이 타성적인 나를 움직이게 만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파괴하고 싶지만 파괴할 수 없고, 증오하지만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원망하는 동시에 인정을 바란다.
이상한 일이다. 평생 나를 가장 많이 나무란 것이 나 자신이었다면, 나는 그 상태를 왜 그토록 오랫동안 견뎌왔을까. 오랜 시간 동안 유지되어 온 것이라면, 싫은 것을 견디는 정도를 넘어서 충분히 결속이 강한 관계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어느 한쪽이 이겼다면, 또는 어느 한쪽이 졌다면, 그 관계는 진작 결판이 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어느 한쪽의 승리도, 결판도 날 수 없는 싸움이기에, 앞으로도 계속될 기묘한 휴전이자 동맹인지도 모른다.
모든 글을 마치며
우리는 우리를 위협하는 대상을, 그리고 우리가 사랑했던 대상을 내면에 받아들여 자아를 만든다. 마음속에서 울려 퍼지는 그 목소리들은, 내가 한때 사랑하지 않았다면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들이다. 나의 적은 내가 사랑했던 영웅의 다른 얼굴이었고, 내가 미워했던 대상이나 수치스러운 나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그렇기에 언젠가는 다시 사랑하고 회복해야 할 나의 일부였다. 지나치게 축약이 되긴 했지만, 결론적으로 그것이 만화가 내게 가르쳐 준, 내 안의 적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이다.
이제 내 자아의 방에는 더 많은 포스터들이 걸려 있다. 과거의 주인공들과 최근의 주인공들, 그리고 빌런들과 안티히어로들, 내가 현실에서 만났던 사람들까지. 그들은 각자의 가치를 담은 얼굴로 자기 삶의 구조를 이야기한다. 완벽한 합의는 없고 끝이 나지도 않는 불완전한 조화일 뿐이지만, 그것이 내가 만화와 심리학을 통해 배운, 내 안에서 나를 움직이려는 적들과 내가 맺어 온 나만의 공생 관계다.
그동안 부끄러운 글을 보여 온 좌절감이 마지막 글의 주제를 이렇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서사에 만화 감상을 엮어 내고자 했던 것은 만화에 대한 사랑이기도 하지만, 만화와 함께해 온 나 자신의 과거부터 현재까지를 더 떳떳하게 내보이고 싶었던 노력이기도 했다. 자기 삶에서 사랑했던 대상이 지녔던 비중을 더욱 강조하고 싶은 마음은 다들 비슷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