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의 웹툰 감상법 - '이 장면에서 왜 울어요?' 교수의 당황
감정적 몰입과 치유적 독서의 새로운 패턴

웹툰 감상 수업은 매주 화요일 오후에 진행되었다. 그날도 평소처럼 함께 읽을 작품을 스크린에 띄웠다. 이번 주 텍스트는 〈유미의 세포들〉이었다. 이동건 작가의 이 작품은 일상의 소소한 순간들을 세포들의 관점에서 그려낸 것으로, 학술적으로는 내면 심리의 의인화 기법과 일상성의 서사화를 논의하기에 적합한 텍스트였다. 나는 서사 구조, 시점의 전환, 메타포의 활용 등을 분석할 준비를 했다. 우리가 함께 읽은 에피소드는 특별히 드라마틱한 것이 아니었다. 유미가 직장에서 보고서를 준비하다가 사소한 실수를 하고, 상사에게 지적을 받는 장면이었다. 상사의 말투는 날카로웠지만 악의적이지는 않았고, 유미는 당황하면서도 침착하게 대처했다. 그 과정에서 유미의 머릿속 세포들이 패닉에 빠지고, 이성 세포와 감정 세포가 충돌하며, 결국 자존감 세포가 작아지는 모습이 유머러스하면서도 섬세하게 그려졌다. 일반적인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겪을 법한,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한 장면이었다.
나는 이 장면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작가는 내면 심리를 세포라는 구체적 캐릭터로 형상화함으로써..." 말을 이어가려던 순간, 앞줄에 앉은 한 학생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발견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무언가 이상했다. "혹시 괜찮아요?" 내가 조심스럽게 묻자, 학생이 고개를 들었다.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울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당황했다. 이 평범한 일상 장면에서 왜 우는 걸까? 혹시 개인적으로 힘든 일이 있는 건 아닐까? "괜찮으면 밖에 나가서 잠시 쉬어도 돼요"라고 말하려는데, 학생이 먼저 말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냥... 저도 어제 똑같은 일이 있었거든요. 인턴으로 다니고 있는 회사에서 보고서 관련 실수로 팀장님한테 혼났어요. 완전 공감이에요. 너무 제 이야기 같아서..." 학생은 휴지로 눈가를 닦으며 씁쓸하게 웃었다.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문학 작품에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물론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이 정도로 즉각적이고 강렬한 반응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더욱이 이것은 비극적 카타르시스를 위해 설계된 고전 비극도 아니고, 눈물샘을 자극하는 멜로 드라마도 아니었다. 그저 일상의 작은 좌절을 담담하게 그려낸 장면이었다. 하지만, 이 학생에게 그것은 '그저' 일상이 아니라 '자신의' 일상이었다. 픽션과 현실 사이의 거리가 거의 없었다. 나는 수업을 잠시 멈추고 다른 학생들에게도 물었다. "여러분도 이 장면에 공감하나요?" 거의 모든 손이 올라갔다. "저는 지난주에 비슷한 일 있었어요", "저도요, 교수님 수업 과제 발표할 때 완전 이 기분이었어요", "이 장면 볼 때마다 제 자존감 세포가 진짜 작아지는 느낌이에요." 그들에게 웹툰은 관찰의 대상이 아니라 경험의 거울이었다.

다음 주에는 〈치즈인더트랩〉을 함께 읽었다. 순끼 작가의 이 작품은 복잡한 인간관계와 심리적 갈등을 섬세하게 그려낸 것으로 유명하다. 우리가 읽은 부분은 주인공 설이 선배 정과의 미묘한 감정 싸움을 벌이는 장면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친절하지만 미묘하게 상처 주는 말, 도와주는 척하면서 실은 통제하려는 행동, 선의로 포장된 조종. 나는 이 장면을 권력관계의 역학과 가스라이팅의 서사 구조로 분석하려 했다. 그런데 한 학생이 갑자기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아, 진짜 답답해 죽겠어요! 설아, 왜 진짜 마음을 말하지 않는 거야? 그냥 싫으면 싫다고, 불편하면 불편하다고 말하면 되잖아!" 학생은 스크린을 향해 마치 캐릭터에게 직접 말을 거는 것처럼 외쳤다. 옆에 앉은 학생이 거들었다. "그러니까요. 저라면 바로 따졌을 거예요. 이렇게 참고만 있으면 상대는 계속 이렇게 할 거잖아요."
나는 흥미로웠다. 이들은 캐릭터를 분석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조언과 공감의 대상으로 보고 있었다. 픽션과 현실의 경계가 흐릿했다. 설은 그들에게 '캐릭터'가 아니라 '친구'였고, 정은 '분석 대상'이 아니라 '조심해야 할 실제 인물'이었다. 한 학생은 "제 전 남자친구가 딱 정이었어요. 겉으로는 다 나를 위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했죠"라며 자신의 경험과 직접 연결했다. 다른 학생은 "저는 설이 이해돼요. 저도 싫은 티 못 내는 성격이거든요. 관계 깨질까 봐 참는 거, 너무 공감돼요"라고 말했다. 그들은 작품을 읽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재확인하고, 자신의 감정을 검증받고, 자신의 선택을 되돌아보고 있었다.

세 번째 주에는 〈쿠베라〉를 선택했다. Currygom 작가의 이 작품은 복잡한 세계관과 철학적 주제를 다룬다. 신과 인간, 운명과 선택, 정의와 복수에 대한 묵직한 질문들을 던진다. 우리가 읽은 장면은 한 캐릭터가 복수의 무의미함에 대해 긴 독백을 하는 부분이었다. "복수를 완성해도 잃어버린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증오는 또 다른 증오를 낳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 끝없는 고리를 어디서 끊어야 하는가?" 나는 이 대사를 복수 서사의 전통과 비극적 순환의 구조 속에서 분석하려 했다. 그런데 한 학생이 손을 들고 물었다. "선생님, 이 대사 진짜 인생인데, 캡처해서 카톡 프로필 상태 메시지로 써도 될까요?" 나는 웃음이 나왔다. "물론이죠. 왜 안 되겠어요?" 학생은 즉시 스마트폰을 꺼내 화면을 캡처했다. 옆 학생이 "나도 저장할래"라며 따라 했다.
수업이 끝난 후 학생 몇 명이 남아서 이야기를 나눴다. 한 학생이 말했다. "선생님, 웹툰이 저한테는 치유예요. 진짜로요. 힘들 때마다 특정 웹툰을 보면서 위로받아요." 나는 더 자세히 설명해달라고 청했다. "어떤 웹툰이 어떻게 치유가 되나요?" 학생은 설명했다. "저는 취업 준비하면서 정말 힘들었거든요. 자존감도 바닥이고, 우울하고, 불안하고. 그럴 때 〈마음의 소리〉 같은 개그 웹툰 보면서 웃으면 진짜 기분이 나아져요. 일시적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잊을 수 있어요. 그리고 〈나 혼자만 레벨업〉 같은 성장 판타지 보면 제가 같이 강해지는 기분이에요. 현실에서는 면접 떨어지고 약하지만, 주인공이 레벨업할 때 저도 같이 성장하는 느낌? 대리만족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그게 저한테는 진짜 필요해요."
다른 학생이 거들었다. "저는 감정 조절할 때 웹툰을 써요. 오늘 기분이 어떤지에 따라 보는 웹툰을 선택해요. 슬픈 일이 있었는데 울지 못했을 때는 일부러 슬픈 웹툰을 찾아봐요. 〈며느라기〉 같은 거 보면서 실컷 울고 나면 후련해지거든요. 스트레스받을 때는 〈유미의 세포들〉이나 〈쌉니다 천리마마트〉 같은 거 보면서 웃고요. 연애하고 싶을 때는... 음, 로맨스 웹툰을 정주행해요. 〈좋아하면 울리는〉이나 〈연애혁명〉 같은 거요. 그럼 연애하는 기분이 나요." 또 다른 학생이 추가했다. "맞아요. 저도 그래요. 웹툰이 감정 관리 도구예요. 음악처럼요. 슬플 때 슬픈 음악 듣듯이, 저는 슬플 때 슬픈 웹툰 봐요.“
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복잡한 생각에 빠졌다. 전통적인 문학 교육에서는 '미적 거리(aesthetic distance)'를 강조한다. 작품과 독자 사이에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배웠다. T.S. 엘리엇은 "시는 감정의 분출이 아니라 감정으로부터의 도피"라고 했고, 브레히트는 관객이 극에 몰입하지 않도록 '소격 효과'를 의도적으로 사용했다. 비판적 사고를 위해서는 텍스트와의 거리두기가 필수적이라고 여겨졌다. 하지만, 이 학생들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거리를 좁히고, 몰입을 깊게 하며, 텍스트와 자신을 동일시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실제로 치유를 경험하고 있었다. 이것을 단순히 '올바르지 않은 독서'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다음 수업에서 나는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여러분은 웹툰을 읽을 때 댓글도 함께 보나요?" 거의 모든 학생이 손을 들었다. "댓글 안 보면 재미가 반밖에 안 돼요", "댓글이 본편만큼 재미있을 때도 있어요", "댓글 보면서 다른 사람들 반응 확인하는 게 좋아요." 한 학생이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저는 감동적인 장면에서 울었는데, 댓글 보니까 다른 사람들도 다 울었다고 하면 뭔가 위로가 돼요. '나만 이렇게 약한 게 아니구나' 하는 안도감? 그리고 무서운 장면에서 소름 돋았는데 댓글에도 '소름', '소름', '소름' 이렇게 도배되어 있으면 같이 느끼는 것 같아서 좋아요." 다른 학생이 추가했다. "저는 화나는 장면에서 댓글 보면서 같이 분노를 나눠요. '이 캐릭터 진짜 최악', '작가님 제발 이 악당 혼내주세요' 이런 댓글들 보면 제 마음이 대변되는 것 같아요."
나는 이들이 웹툰을 읽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혼자가 아니라 함께라는 것을 깨달았다. 물리적으로는 개인의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보지만, 정서적으로는 수천, 수만 명의 독자와 연결되어 있다. 댓글창은 단순한 반응 공간이 아니라 집단적 감정 공유의 장이다. "이 웹툰 진짜 슬퍼요, 같이 울어요", "이 장면에서 소름 돋은 사람?", "이 캐릭터 때문에 화나서 못 자겠어요" 같은 댓글들은 개인의 감정을 공동체의 감정으로 확장한다. 혼자 읽지만, 함께 느끼는 '연결된 독서'의 문화. 이것은 조용한 도서관에서 책장을 넘기며 고독하게 사색하던 전통적 독서와는 완전히 다른 경험이다.

어느 날 수업에서 〈나빌레라〉를 함께 읽었다. HUN, 지민 작가의 이 작품은 70세 노인이 발레를 시작하는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그려낸다. 우리가 읽은 장면은 주인공 덕출 할아버지가 처음으로 무대에 서는 부분이었다. 서툴지만 온 마음을 다해 춤추는 노인의 모습, 그것을 지켜보는 가족들의 눈물, 꿈을 포기하지 않은 것에 대한 뿌듯함. 강의실은 숙연해졌다. 몇몇 학생들이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모르게 목이 메었다. 수업이 끝난 후 한 학생이 다가왔다. "선생님, 저 이 웹툰 보고 저희 할아버지한테 전화했어요. 오래 못 드렸었는데. 웹툰 보니까 할아버지 생각나서..." 학생의 눈가가 다시 붉어졌다.
이 순간 나는 깨달았다. 웹툰의 힘은 단순히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 있지 않다. 감정을 촉발하고, 기억을 불러일으키며, 행동을 이끌어내는 데 있다. 학생은 〈나빌레라〉를 읽고 할아버지에게 전화했다. 픽션이 현실에 개입한 것이다. 이것은 문학의 고전적 기능 중 하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카타르시스, 감정의 정화. 하지만 웹툰은 그것을 훨씬 더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방식으로 달성하고 있었다. 비극을 보고 며칠 후 삶을 성찰하는 것이 아니라, 웹툰을 보고 즉시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거는 것. 이것은 더 빠르고, 더 강렬하며, 더 일상적이다.

하지만 우려도 있었다. 한 번은 학생들에게 〈싸움독학〉에 대한 비평적 글을 읽게 했다. 어떤 평론가가 이 작품의 폭력 묘사가 지나치게 미화되어 있고, 문제 해결 방식이 단순하다고 지적한 글이었다. 수업 시간에 이를 논의하려 했는데, 몇몇 학생들의 반응이 격렬했다. "이 평론가는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아요", "주인공이 왜 싸울 수밖에 없었는지 모르나 봐요", "이 작품은 단순한 폭력물이 아니에요. 정의에 관한 이야기예요." 그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작품에 대한 비판을 개인적 공격처럼 받아들였다. 감정적 몰입도가 높을수록 비판적 거리두기가 어려워졌다.
나는 조심스럽게 개입했다. "여러분이 이 작품을 사랑하는 마음은 이해해요. 하지만 좋아하는 작품이라도 비판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해요. 사랑과 비판은 양립 가능해요." 한 학생이 반박했다. "하지만 선생님, 왜 꼭 비판해야 하나요? 그냥 즐기면 안 돼요?" 나는 잠시 멈췄다. 좋은 질문이었다. 왜 꼭 비판해야 할까? 즐거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가? 나는 대답했다. "비판은 즐거움을 없애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더 깊은 즐거움을 가능하게 해요. 작품을 이해하는 층위가 깊어질수록, 여러분은 더 많은 것을 발견하고 더 풍부하게 즐길 수 있어요. 표면만 보는 것과 구조를 이해하며 보는 것은 다른 경험이에요."
학생들은 반쯤 납득한 표정이었다. 나는 다른 접근을 시도했다. "그럼,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이 정말 사랑하는 작품이 있다면, 그 작품을 더 깊이 이해하고 싶지 않나요? 왜 이 장면이 감동적인지, 어떤 기법이 사용되었는지, 작가가 어떤 의도를 가졌는지. 이런 것들을 알면 작품을 더 입체적으로 즐길 수 있어요. 마치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때, 단순히 멜로디만 즐기는 것과 화성 구조, 리듬 패턴, 악기 편성까지 이해하며 듣는 것의 차이처럼요." 한 학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이해가 돼요. 작품을 공격하려는 비판이 아니라, 더 잘 이해하려는 비판이라면요.“

나는 이 대화를 통해 교육 전략을 수정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감정적 몰입을 억제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적 몰입을 비판적 사고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 "이 장면이 왜 당신을 울렸나요?"라고 물으며 서사 기법을 분석하고, "이 캐릭터가 왜 화나게 만드나요?"라고 물으며 인물 구축을 논의하는 것. 감정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탐구의 실마리로 사용하는 것. 다음 수업에서 나는 새로운 방식을 시도했다. 〈이태원 클라쓰〉를 함께 읽은 후, "이 작품에서 가장 감정적으로 반응한 장면을 하나씩 골라보세요. 그리고 왜 그 장면이 그렇게 강렬했는지 분석해 봅시다"라고 요청했다.
학생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주인공이 아버지 죽음의 진실을 알게 되는 장면에서 울었어요. 왜냐하면 저도 부모님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거든요. 그런데 분석해 보니, 이 장면이 감동적인 이유는 단순히 슬픈 사건 때문이 아니라, 그전까지 쌓아온 복선들이 한 번에 터지는 구조 때문이었어요." 다른 학생이 말했다. "악당이 벌받는 장면에서 쾌감을 느꼈어요. 현실에서는 나쁜 사람이 벌 안 받는 경우가 많아서 답답한데, 웹툰에서는 정의가 구현되니까 시원했죠.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이 악당이 입체적으로 그려졌다면 단순한 쾌감을 넘어서 복잡한 감정을 느꼈을 것 같아요. 작품이 좀 더 깊어질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워요."
이것이었다. 감정을 부정하지 않고, 감정에서 출발해 분석으로 나아가는 것. 한 학생이 흥미로운 발견을 공유했다. "저는 처음에 이 작품을 보면서 무조건 주인공 편이었어요. 주인공이 옳고 악당이 나쁘다고만 생각했죠. 그런데 비판적으로 다시 읽어보니, 주인공도 때로는 문제가 있는 선택을 해요. 복수에 집착하다가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만들기도 하고요. 이걸 발견하고 나니 오히려 캐릭터가 더 인간적으로 느껴졌어요. 완벽한 영웅이 아니라 결점 있는 사람으로 보이니까 더 공감이 가요." 이것은 중요한 통찰이었다. 비판적 사고가 작품에 대한 사랑을 감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성숙한 방식으로 사랑하게 만든다는 것.
코로나19 팬데믹 이후의 상황도 학생들의 웹툰 소비 패턴에 영향을 미쳤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인한 고립감, 대면 수업 감소로 인한 소속감 결여, 취업 시장의 불확실성으로 인한 불안. 이러한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학생들은 더욱 강렬하게 감정적 위안을 추구했다. 한 학생이 고백했다. "팬데믹 때 정말 외로웠어요. 친구들도 못 만나고, 집에만 있고. 그때 웹툰이 진짜 친구였어요. 매일 업데이트되는 작품들을 기다리고, 댓글창에서 다른 독자들과 이야기 나누고. 그게 제 유일한 사회적 연결이었어요." 다른 학생도 거들었다. "저도요. 취업 준비하면서 계속 떨어지니까 자존감이 바닥이었어요. 그럴 때 성장 판타지 웹툰 보면서 대리만족했어요. 주인공이 레벨업하는 걸 보면서 '나도 언젠가는 이렇게 성장할 거야' 하는 희망을 가졌죠."
나는 이들의 고백을 들으며 웹툰의 치유적 기능이 단순한 오락을 넘어선다는 것을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서사 치료(narrative therapy)'의 개념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경험을 재구성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치유를 경험한다. 웹툰은 접근성이 높고, 일상적이며, 감정적으로 직접적이기 때문에 서사 치료의 도구로서 강력한 잠재력을 가진다. 특히 전문적 심리 상담에 대한 접근이 제한적인 학생들에게, 웹툰은 일종의 자가 치료 수단이 되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우려도 있었다. 감정적 몰입에만 의존한다면, 실제 문제 해결 능력은 길러지지 않을 수 있다. 웹툰을 통한 대리만족이 현실 도피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한 번은 한 학생이 이렇게 말했다. "저는 현실이 힘들 때 웹툰 속으로 도망가요. 웹툰 세계에서는 제가 원하는 대로 되니까요. 주인공은 항상 성장하고, 악당은 벌받고, 사랑은 이루어지잖아요. 현실은 그렇지 않지만요."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웹툰을 다 보고 나서는 어때요?" 학생이 쓸쓸하게 웃었다. "현실로 돌아오죠. 그리고 다시 힘들어져요. 그래서 또 다른 웹툰을 봐요."
이것은 건강한 패턴이 아니었다. 웹툰이 일시적 위안을 주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현실 회피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나는 수업에서 이 주제를 다루기로 했다. "웹툰의 치유적 기능과 그 한계"라는 제목으로 토론을 열었다. "웹툰이 여러분에게 위안을 주는 것은 좋은 일이에요. 하지만 웹툰만으로는 실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요. 웹툰을 보면서 얻은 통찰이나 용기를 현실에 적용해야 해요. 예를 들어, 〈나 혼자만 레벨업〉을 보고 주인공처럼 성장하고 싶다면, 실제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학생들이 생각에 잠겼다. 한 학생이 말했다. "운동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주인공이 매일 훈련하듯이, 저도 매일 조금씩 뭔가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다른 학생이 추가했다. "저는 영어 공부요. 주인공이 레벨업하듯이, 저도 매일 단어 10개씩 외우면 성장할 수 있겠죠."

이것이 바로 내가 학생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였다. 웹툰에서 감정적 위안을 얻는 것은 좋지만, 그것을 현실의 동기로 전환할 수 있어야 한다. 픽션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현실 개입의 도구가 될 수 있다. 나는 "웹툰 독후 활동" 과제를 새로 만들었다. 학생들은 자신이 감동받거나 위로받은 웹툰을 선택하고, 그 작품에서 얻은 메시지를 실제 삶에 어떻게 적용할지 계획을 세우는 것이었다. 한 학생은 〈나빌레라〉를 보고 할아버지와의 관계를 개선하기로 했다. 정기적으로 전화하고, 방학에는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계획했다. 다른 학생은 〈이태원 클라쓰〉를 보고 창업 동아리에 가입했다. "주인공처럼 제 가게를 갖는 건 먼 미래의 일이겠지만, 지금부터 준비할 수 있어요"라고 말했다.
학기 말에 학생들에게 웹툰 감상 수업에 대한 피드백을 요청했다. 한 학생이 이렇게 썼다. "처음에는 웹툰을 그냥 느끼기만 했어요. 울거나 웃거나 화내거나. 그런데 이 수업을 들으면서 '왜' 내가 그렇게 느꼈는지를 생각하게 됐어요. 그러니까 웹툰이 더 재미있어졌어요. 표면적인 즐거움을 넘어서 깊이 있는 이해가 생겼거든요." 다른 학생은 이렇게 표현했다. "저는 감정적으로 몰입하는 게 나쁜 줄 알았어요. '객관적으로 봐야지'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그렇게 못 하고 늘 울고 웃고 했거든요. 그런데 선생님이 감정적 반응도 의미 있다고, 그것을 출발점으로 삼아 분석할 수 있다고 하시니까 죄책감이 없어졌어요. 그리고 감정과 분석이 함께 갈 수 있다는 것도 배웠어요.“
또 다른 학생의 피드백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이 수업은 웹툰 수업이었지만, 사실은 제 감정에 대한 수업이기도 했어요. 웹툰을 보며 느끼는 감정들을 들여다보면서, 제가 현실에서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무엇에 화가 나는지를 알게 됐어요. 웹툰은 거울이었어요. 제 내면을 비춰주는." 이 학생의 말은 웹툰의 본질적 기능을 정확히 포착한 것이었다. 예술은 언제나 우리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다. 고대 그리스 비극이 관객에게 자신의 운명을 성찰하게 했듯이, 세익스피어의 희곡이 인간 본성을 탐구하게 했듯이, 현대의 웹툰도 같은 역할을 한다. 다만 그 형식과 접근성이 다를 뿐이다.
나는 이제 웹툰 감상 수업을 시작할 때 더 이상 당황하지 않는다. 학생이 평범한 장면에서 울어도, 캐릭터에게 화를 내도, 대사를 카톡 상태 메시지로 쓰겠다고 해도. 그것은 그들이 작품과 깊이 교감하고 있다는 증거다. 오히려 나는 그 순간들을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 감정적 반응이 일어나는 그 지점이야말로 진정한 학습이 시작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텍스트가 삶과 만나는 순간, 픽션이 현실에 개입하는 순간, 타인의 이야기가 자신의 경험과 공명하는 순간. 이것은 문학이 추구해온 가장 본질적인 기능이다.
나의 역할은 그 교감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더 풍부하고 성찰적인 경험으로 만드는 것이다. 감정과 이성, 몰입과 거리두기, 공감과 분석이 상호 배타적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감정적 반응은 비판적 탐구의 가장 강력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이 장면에서 왜 울어요?"라는 질문은 이제 비난이 아니라 호기심이다. 진심 어린 물음이다. 그리고 그 대답을 통해 우리는 함께 작품의 깊이로, 인간 감정의 본질로, 서사의 힘으로 들어간다. 학생이 "저도 어제 비슷한 일이 있었거든요"라고 대답하면, 우리는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왜 이 평범한 장면이 그토록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가? 작가는 어떤 서사 기법으로 일상의 보편성을 포착했는가? 개인적 경험이 어떻게 집단적 공감으로 확장되는가?
이런 방식으로 접근할 때, 학생들은 자신의 감정이 무효화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넘어서는 이해에 도달한다. 감정은 분석의 장애물이 아니라 통로가 된다. 한 학생이 캐릭터에게 화를 낸다면, 우리는 그 분노가 어디서 비롯되는지를 추적한다. 서사적 불공정의 구조, 권력 관계의 재현, 독자 기대의 배반. 학생의 즉각적 반응은 이론적 개념들에 생생한 현실감을 부여한다. 반대로 이론적 프레임워크는 학생의 감정에 언어와 맥락을 제공한다. 막연히 "화난다"는 것과 "가스라이팅의 서사 구조가 불편함을 야기한다"고 인식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이해다. 후자는 단순한 감정 소비를 넘어서 비판적 인식으로 나아간다.
웹툰은 단순한 오락이 아니다. 감정의 학교이고, 공감의 연습장이며, 치유의 공간이고, 자기 발견의 거울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웹툰은 또한 서사의 실험실이고, 사회적 담론의 장이며, 문화적 기억의 저장고이고, 미래 예술의 전조다. 이 모든 차원이 학생들의 스마트폰 화면 속에서 동시에 작동한다. 교육자로서 나는 학생들이 그 모든 가능성을 최대한 경험하도록 돕고 싶다. 울고 웃으며 위로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경험을 성찰하고 언어화하며 타인과 나누는 것도 그만큼 중요하다. 개인적 카타르시스를 넘어 집단적 의미 구성으로, 즉각적 소비를 넘어 지속적 성찰로, 수동적 감상을 넘어 능동적 해석으로. 이것이 웹툰 교육이, 더 나아가 모든 예술 교육이 지향해야 할 방향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이 여정에서 나 역시 변화한다. 학생들의 눈물과 웃음, 분노와 기쁨을 통해 나는 웹툰을 새롭게 본다. 학문적 거리를 유지하며 분석만 하던 텍스트들이 살아 숨 쉬는 감정의 장으로 다가온다. 학생들이 없었다면 결코 발견하지 못했을 의미들이 드러난다. 그들의 감정적 반응은 나의 지적 이해를 풍부하게 만들고, 나의 이론적 분석은 그들의 감정적 경험에 깊이를 더한다. 우리는 함께 배우고 함께 성장한다. 웹툰이라는 매개를 통해, 감정과 이성의 대화를 통해, 세대를 넘어선 공감을 통해. 그리고 그 과정 자체가 가장 아름다운 교육의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