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 플랫폼 강의 때 일어난 일 - 선생님, 그거 옛날얘기 아니에요? (2)
정보 격차의 역전과 교육 권위의 재정립
학기 중반, 웹툰 창작 실습수업의 첫 합평 시간을 맞이했다. 학생들은 각자 준비한 웹툰 초고를 발표하고, 동료들로부터 피드백을 받는 시간이었다. 나는 합평의 기본 원칙을 설명했다. "먼저 좋은 점을 이야기하고, 개선할 부분은 부드럽게 제안하세요. 창작자의 의도를 존중하고, 비판보다는 격려 위주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학부 시절 배웠고, 대학원에서 실천했으며, 동료 연구자들과 나누던 학술적 비평의 관습을 그대로 전달한 것이었다. 학생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안심했다. 첫 발표자가 자신의 작품을 소개했다. 판타지 세계관을 배경으로 한 학원물이었다. 평범한 고등학생이 어느 날 특별한 능력을 발견하고, 숨겨진 마법 학교에 입학하게 된다는 설정이었다. 그림체는 아직 서툴렀지만 성실하게 준비한 흔적이 역력했다. 발표가 끝나고 나는 발표자를 격려하며 피드백 시간을 열었다. "자, 이제 여러분의 의견을 들어볼까요? 먼저 작품의 좋은 점부터 이야기해 봅시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한 학생이 손을 들었다. "이 설정 너무 뻔한 것 같은데요. 평범한 주인공이 특별한 능력 발견하고 마법 학교 가는 거, 해리포터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수백 번 나온 클리셰잖아요. 독자들이 1화 보고 바로 다음 전개 다 예측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는 당황했다. 좋은 점을 먼저 이야기하라고 했는데, 첫 마디부터 직격탄이었다. 발표자가 상처받지 않을까 걱정하며 중재하려던 순간, 다른 학생이 거들었다. "맞아요. 그리고 1화에서 주인공 일상 묘사하는 데 너무 많은 컷을 쓰셨어요. 요즘 웹툰은 첫 화에서 확실한 훅이 없으면 독자들이 2화까지 안 봐요. 제 경험상 3컷 안에 뭔가 강렬한 게 있어야 해요." 또 다른 학생이 추가했다. "캐릭터 동기도 약한 것 같아요. 주인공이 왜 마법 학교에 가고 싶어 하는지가 명확하지 않아요. '그냥 특별해지고 싶어서'는 요즘 독자들한테 안 먹혀요."
나는 충격을 받았다. 이것은 내가 알던 합평의 방식이 아니었다. 내가 익숙한 학술적 비평 문화에서는 비판할 때도 여러 겹의 완충 장치를 거쳤다. "전반적으로 흥미로운 시도나, 다소 개선의 여지가 있을 것으로 사료됨", "작가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되나, 실행 면에서 약간의 보완이 필요할 것으로 보임", "창의적인 접근이지만, 선행 연구와의 차별성을 좀 더 명확히 할 필요가 있음" 같은 식으로 비판의 날을 최대한 무디게 만드는 것이 예의였다. 직접적인 표현은 무례하고 공격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특히 공개적인 자리에서 작품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것은 창작자의 자존감을 해치는 행위로 여겨졌다. 하지만 학생들은 거침없이 자기 생각을 표현했다. "재미없어요", "이해가 안 돼요", "왜 이렇게 하셨어요?", "이 부분은 완전히 설득력이 없는데요." 그들의 언어에는 완충재가 없었다.
피드백은 계속 이어졌다. "주인공이 처음에는 소심한 성격으로 나오다가 갑자기 용감해지는데, 그 변화의 계기가 없어요. 캐릭터 일관성이 떨어져요." "악당의 동기도 너무 단순해요. '세계를 지배하겠다'는 건 너무 전형적이에요. 요즘 독자들은 악당도 나름의 서사와 정당성이 있기를 바라거든요." "그림체도 좀 고민해 보세요. 지금은 여러 작가의 스타일이 섞여 있는 것 같아요.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아야 할 것 같아요." 나는 중간에 개입해야 할지 고민했다. 발표자를 보호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 정도로 직설적인 비판은 창작 의욕을 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놀랍게도 발표자는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끄덕이며 메모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다 맞는 말인 것 같아요. 사실 저도 설정이 좀 뻔하다는 생각은 했는데, 어떻게 바꿔야 할지 몰랐거든요.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을 어떻게 고치면 좋을까요?"
그러자 피드백했던 학생들이 즉시 대안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클리셰를 쓰려면 반전을 줘야 해요. 예를 들어 주인공이 능력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저주였다든가 하는 식으로요." "1화 구성을 바꿔보세요. 일상 묘사는 최소화하고, 바로 사건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면서 플래시백으로 배경을 설명하는 게 요즘 트렌드예요." "주인공의 동기를 더 절박하게 만들어보세요. 단순히 특별해지고 싶은 게 아니라, 예를 들어 동생의 병을 고치기 위해 마법을 배워야 한다든가, 그런 구체적이고 감정적인 이유가 있으면 독자들이 공감해요." 이들의 피드백은 단순한 비판을 넘어서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솔루션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실제 웹툰 소비 경험에 기반한 것이었다.
합평은 계속되었고, 패턴이 명확해졌다. 학생들은 거침없이 문제점을 지적했지만, 동시에 구체적인 개선안을 제시했다. "이 대사는 너무 설명적이에요. 보여주지 말고, 말해줘야 해요... 아니 거꾸로, 말하지 말고 보여줘야 해요." 학생이 웃으며 정정했다. "예를 들어 '나는 화가 났다'고 쓰지 말고, 주먹을 쥐거나 눈빛이 변하는 걸 그림으로 보여주는 거죠." 또 다른 학생은 "컷 분할이 단조로워요. 중요한 장면에서는 컷을 크게, 긴장감 있는 장면에서는 컷을 작고 빠르게 배치해야 리듬감이 생겨요"라고 조언했다. 누군가는 "말풍선 배치를 다시 생각해 보세요. 시선의 흐름이 자연스럽지 않아요. 독자가 어디를 먼저 봐야 할지 헷갈려 해요"라고 지적했다. 그들의 피드백은 이론서에 나오는 추상적 원칙이 아니라, 수백 편의 웹툰을 읽으며 체득한 실전적 노하우였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피드백을 받는 학생들의 반응이었다. 기성세대라면 이 정도의 직설적 비판에 감정적으로 상처받거나 방어적 태도를 보일 법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학생들은 전혀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완전 공감이에요. 저도 그리면서 이상하다고 느꼈거든요." "아, 그래서 제 친구가 재미없다고 했구나. 이제 이해했어요." "이렇게 구체적으로 말해주니까 훨씬 좋네요. 뭘 고쳐야 할지 명확해져요." 그들에게 비판은 인격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작품에 대한 코멘트였다. 창작자와 창작물을 분리해서 사고하는 능력이 자연스럽게 체화되어 있었다. 며칠 후, 첫 발표자는 수정된 작품을 가져왔다. 1화의 구성을 완전히 뒤집어서 강렬한 액션 장면으로 시작하고, 주인공의 동기를 구체화했으며, 클리셔를 비틀어 독자를 놀라게 할 장치를 마련했다. "다시 봐주실래요? 피드백대로 고쳐봤는데 어떤가요?" 학생들은 진지하게 검토한 후 "확실히 나아졌어요", "이제 2화가 궁금해지네요", "이 정도면 연재해도 되겠는데요?"라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나는 이 과정을 지켜보며 깊이 성찰하게 되었다. 학생들의 소통 방식이 무례한 것이 아니라, 내가 익숙한 방식과 다를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이 성장한 디지털 문화는 완전히 다른 소통 문법을 만들어냈다. 인터넷 댓글 문화에서 그들은 즉각적이고 솔직한 반응 표현에 익숙해졌다. 유튜브 영상 아래 "재미없음", "10초 보고 나감", "이게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음" 같은 직설적 댓글이 일상이다. SNS에서는 제한된 글자 수로 명확하고 간결하게 의사를 전달해야 한다. 트위터의 140자, 인스타그램의 짧은 캡션에서 우회적 표현은 설 자리가 없다. 실시간 스트리밍 플랫폼에서는 시청자가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스트리머는 그 피드백에 실시간으로 대응한다. 게임 커뮤니티에서는 플레이어의 실력과 전략이 객관적 수치로 평가되고, 그에 대한 피드백은 감정보다 성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환경에서 자란 Z세대에게 우회적이고 모호한 표현은 오히려 비효율적이고 불친절한 것으로 인식된다.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이라는 말을 들으면, 그들은 묻는다. "어떤 부분이 아쉬운 건가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세요." "발전 가능성이 있다"는 말에는 "어떻게 발전시켜야 하나요? 예시를 주실 수 있나요?"라고 되묻는다. 추상적이고 완곡한 피드백은 그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정확히 무엇이 문제인지,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를 명확히 알려주는 것이 진정한 친절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단순히 무례함이나 예의 부족이 아니다. 다른 배려이고, 다른 형태의 존중이다.
나는 이들의 직설적 소통 방식을 관찰하며 그것이 창작 교육에 미치는 긍정적 효과를 확인했다. 학기 초와 학기 말의 작품들을 비교해 보니, 질적 향상의 정도가 놀라웠다. 전통적인 "칭찬 샌드위치" 방식(칭찬-비판-칭찬)으로 피드백을 받던 학생들보다 직설적 피드백을 주고받은 학생들의 발전 속도가 훨씬 빨랐다. 모호한 칭찬은 구체적 개선으로 이어지지 않지만, 명확한 지적은 즉각적인 수정을 가능하게 했다. "전체적으로 괜찮아요"라는 말은 아무것도 바꾸지 않지만, "2페이지 3컷의 대사가 너무 길어서 호흡이 끊긴다"는 지적은 정확한 수정으로 연결되었다.
더 나아가 이들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전통적 교육 환경에서는 비판받는 것 자체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완벽하게 준비하지 않으면 발표하지 않고, 확신이 서지 않으면 작품을 공개하지 않는 문화였다. 하지만 이들은 달랐다. "일단 만들어보고 피드백 받아서 고치면 되죠"라는 태도였다. 프로토타입을 빠르게 만들고, 테스트하고, 수정하고, 다시 테스트하는 애자일 방식이 그들에게는 자연스러웠다. 완벽주의가 아니라 반복 개선이 그들의 창작 철학이었다. 어떤 학생은 한 학기 동안 같은 작품의 1화를 다섯 번이나 다시 그렸다. 매번 피드백을 받고, 수정하고, 또 피드백을 받는 과정을 거치며 작품은 점점 더 정교해졌다. 전통적 관점에서는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 그 학생의 완성작은 학기 최고 수준이었다.
동료 간의 수평적 피드백 문화도 인상적이었다. 전통적 교육에서 비평의 권위는 교수나 전문가에게 있었다. 학생들끼리는 서로를 평가할 자격이 없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이들은 달랐다. 그들은 동료를 가장 중요한 피드백 제공자로 인식했다. "교수님은 웹툰을 안 보시잖아요. 실제 독자인 우리가 더 정확한 피드백을 줄 수 있어요"라고 한 학생이 말했다. 실제로 그들의 피드백은 내 것보다 훨씬 실용적이고 현장감 있었다. 나는 서사 구조, 캐릭터 아크, 주제 의식 같은 이론적 측면을 분석할 수 있었지만, 학생들은 "첫 컷을 보고 3초 안에 스크롤을 내릴지 결정한다.", "10화까지 메인 플롯이 진전되지 않으면 독자는 떠난다.", "댓글에서 독자들이 예측한 내용은 피해야 한다." 같은 실전적 지혜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직설적 소통 문화에도 그림자는 있었다. 시간이 지나며 나는 몇 가지 우려되는 패턴을 발견했다. 첫째, 지나치게 성과 중심적이고 효율성만을 추구하는 경향이었다. "이건 대중적으로 안 먹힐 것 같아요", "조회수 나오기 힘들어 보여요", "상업적 가치가 없어요" 같은 피드백이 자주 등장했다. 작품의 완성도나 대중적 어필에는 극도로 민감하지만, 실험적 시도나 개인적 표현에 대해서는 관대하지 못했다. 한 학생이 매우 개인적이고 실험적인 작품을 발표했을 때, 동료들의 반응은 차갑고 냉정했다. "이건 너무 마니아틱해요.", "일반 독자들이 이해할까요?", "이런 스타일로는 플랫폼에서 살아남기 힘들어요." 나는 개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잠깐만요. 모든 작품이 대중적일 필요는 없습니다. 예술은 때로 소수를 위한, 실험적인, 상업성과 무관한 것일 수 있어요."
학생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데 선생님, 우리는 웹툰 작가가 되고 싶은 거잖아요. 웹툰은 독자가 있어야 하고, 플랫폼에서 연재해야 하고, 조회수와 댓글이 있어야 해요. 예술을 위한 예술은 취미로 하고, 직업으로 하려면 독자를 생각해야 하지 않나요?" 그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그들은 현실주의자들이었다. 웹툰 시장의 치열한 경쟁, 플랫폼의 알고리즘, 독자의 까다로운 취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마추어와 프로를 구분하는 것이 바로 시장 감각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나는 걱정스러웠다. 시장 논리만을 내면화한 채 창작한다면, 진정한 예술적 혁신은 어디서 나올까? 모두가 대중의 취향만을 좇는다면, 누가 새로운 길을 개척할까?
둘째, 즉각적 결과에 대한 집착이었다. 피드백의 효과가 즉시 나타나지 않으면 불안해했다. "이렇게 고쳤는데도 여전히 반응이 별로예요",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어요", "차라리 처음부터 다시 할까요?" 긴 호흡으로 작품을 발전시키거나, 시행착오를 거쳐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아가는 과정을 견디기 어려워했다. 디지털 환경의 즉각적 피드백 루프에 익숙해진 그들에게 창작의 느린 성숙 과정은 답답하고 비효율적으로 느껴졌다. 한 학생은 세 번째 수정 후에도 동료들의 호평을 받지 못하자 "이 작품은 포기하고 새로운 걸 시작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왜 포기하려고 하나요? 지금까지 많이 발전했는데요." 학생은 대답했다. "시간 대비 효율이 안 나와요. 이 작품에 더 투자하는 것보다 새로 시작하는 게 빠를 것 같아요."
셋째, 동질화의 위험이었다. 모두가 비슷한 기준으로 피드백하고, 비슷한 방향으로 수정하다 보니 작품들이 점점 비슷해지는 경향이 나타났다. "요즘 트렌드는 이거예요", "이렇게 하면 안전해요", "이 공식을 따르면 실패하지 않아요" 같은 조언들이 오히려 창의성을 제한하는 역설이 발생했다. 학기 말 최종 발표를 보니, 모든 작품이 놀랍도록 완성도 높았지만, 동시에 놀랍도록 비슷했다. 비슷한 구조, 비슷한 캐릭터 유형, 비슷한 전개 방식. 그들은 '좋은 웹툰'의 공식을 완벽하게 습득했지만, 그 과정에서 개성과 독창성을 일부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이러한 관찰을 바탕으로 나는 수업 방식을 조정했다. 직설적 피드백 문화의 장점은 유지하되, 그 한계를 보완하는 장치를 마련했다. 먼저 "실험의 날"을 제도화했다. 한 달에 한 번, 대중성이나 상업성과 무관하게 완전히 자유롭게 실험할 수 있는 과제를 냈다. 이날만큼은 "독자가 이해할까요?", "조회수가 나올까요?" 같은 질문을 금지했다. 대신 "이 시도가 흥미로운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이 웹툰 문법에 던지는 질문은 무엇인가?"를 논의했다. 학생들은 처음에는 어색해했지만, 점차 해방감을 느꼈다. 한 학생은 완전히 대사 없이 색채와 구도만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실험작을 만들었다. 상업적으로는 실패할 게 뻔한 작품이었지만, 예술적으로는 가장 도전적이고 흥미로운 시도였다.
둘째, "느린 창작" 프로젝트를 도입했다. 한 학기 내내 단 하나의 작품만을 깊이 파고드는 과제였다. 빠르게 만들고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와 오래 함께 살고, 세계관을 천천히 구축하며, 서사를 반복해서 곱씹는 과정이었다. 학생들은 초반에 답답해했다. "이미 완성도가 충분한데 왜 계속 수정해야 하나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들은 깊이의 가치를 발견했다. 빠른 완성과 느린 성숙은 다른 가치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배웠다. 학기 말, 한 학생이 말했다. "제가 만든 캐릭터가 이제 정말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이 캐릭터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지 제가 다 알 것 같아요. 이전에 빠르게 만들었던 캐릭터들은 그냥 설정의 나열이었는데, 이번엔 진짜 사람처럼 느껴져요."
셋째, "다양성 쿼터"를 만들었다. 합평마다 반드시 한 작품은 "가장 독특하고 예측 불가능한 시도"를 선정해 집중적으로 논의했다. 비록 완성도가 낮거나 대중성이 부족해도, 남들이 시도하지 않은 독창적 접근을 한 작품에 특별한 관심을 주었다. 이것은 학생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다. 안전한 선택만이 가치 있는 것은 아니다. 실패할 위험이 있더라도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점차 학생들의 작품에 다양성이 돌아왔다. 누군가는 전통 수묵화 스타일로 SF를 그렸고, 다른 학생은 컷 구분 없이 하나의 긴 스크롤로 작품을 만들었으며, 또 다른 학생은 독자가 선택에 따라 스토리가 달라지는 인터랙티브 웹툰을 실험했다.
동시에 나는 직설적 피드백의 긍정적 측면을 더 체계화하려 노력했다. "건설적 비판의 3원칙"을 수립했다. 첫째, 구체적이어야 한다. "재미없어요"가 아니라 "3페이지에서 템포가 느려져서 지루해요"처럼 정확한 지점을 명시해야 한다. 둘째, 개선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문제점만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바꿔보면 어떨까요?"라는 대안을 함께 제공해야 한다. 셋째, 창작자의 의도를 먼저 확인해야 한다. "이 장면에서 의도한 효과가 무엇인가요?"라고 물은 후, 그 의도가 달성되었는지를 평가해야 한다. 이 원칙들은 직설성을 유지하면서도 파괴적이지 않은 피드백 문화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었다.
나는 또한 세대 간 소통 방식의 차이를 수업의 주제로 다뤘다. 한 세션을 할애해 "소통의 문화사"를 강의했다. 편지 시대의 정중하고 격식 있는 언어, 전화 시대의 직접적이지만 예의를 갖춘 대화, 이메일 시대의 간결하고 효율적인 표현, SNS 시대의 즉각적이고 솔직한 반응. 각 시대의 매체가 소통 방식을 어떻게 형성했는지를 역사적으로 추적했다. 학생들은 흥미로워했다. "그러니까 선생님 세대가 우회적으로 말하는 게 예의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 시대의 소통 문화가 그랬던 거네요?" "맞아요. 그리고 여러분이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도 무례해서가 아니라, 지금 시대의 소통 문화가 그런 거고요." 이 대화를 통해 학생들은 서로 다른 소통 방식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맥락의 문제임을 이해했다.
더 나아가 우리는 "맥락에 따른 소통 전략"을 논의했다. 동료 간 작업실 피드백에서는 직설적이고 빠른 소통이 효과적이다. 하지만 클라이언트에게 제안할 때, 출판사 편집자와 협의할 때, 대중에게 작품을 설명할 때는 다른 전략이 필요하다. 학생들은 "소통의 코드 스위칭"을 연습했다. 같은 내용을 서로 다른 맥락에 맞게 표현하는 훈련이었다. "이 캐릭터 너무 뻔해요"를 클라이언트에게는 "캐릭터의 독창성을 더욱 부각시킬 수 있는 여지가 있을 것 같습니다"로, 편집자에게는 "타겟 독자층의 신선함 요구를 고려할 때 캐릭터 설정에 차별화 요소를 추가하면 좋겠습니다"로 바꾸는 연습이었다. 학생들은 처음에는 "이렇게 돌려 말하는 게 오히려 불편한데요"라고 했지만, 점차 이해했다. 효과적인 소통은 자기 방식만을 고집하는 게 아니라, 상대와 상황에 맞춰 조율하는 능력이라는 것을.
학기가 끝날 무렵, 나는 학생들에게 소감을 물었다. 한 학생이 대답했다. "처음에는 선생님이 우리 피드백 방식을 못마땅해하시는 줄 알았어요. 너무 직설적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서요. 그런데 수업이 진행되면서 선생님이 우리 방식의 장점도 인정해 주시고, 단점도 지적해 주시는 게 좋았어요. 덕분에 우리가 어떻게 소통하는지, 왜 그렇게 소통하는지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됐어요." 다른 학생은 이렇게 말했다. "저는 상업성만 생각하고 창작했는데, 예술적 실험도 중요하다는 걸 배웠어요. 빠른 게 항상 좋은 건 아니고, 때로는 느리게 깊이 파고드는 것도 필요하다는 것도요. 그리고 직설적인 게 항상 옳은 건 아니라는 것도 알았어요. 상황에 따라 다르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요."
마지막 학생은 이런 통찰을 나눴다. "이 수업에서 가장 중요하게 배운 건 작품을 만드는 기술이 아니라, 피드백을 주고받는 방법이었던 것 같아요. 비판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법, 구체적이고 건설적으로 피드백하는 법, 다양한 의견을 수용하면서도 내 방향성을 잃지 않는 법. 이런 게 결국 작가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진짜 능력인 것 같아요." 나는 그 말에 깊이 공감했다. 창작 교육의 목표는 단순히 기술을 전수하는 것이 아니다. 창작자로서 성장하고, 비판을 수용하며, 자신만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과정 전체를 배우는 것이다.
그 학생의 말은 내가 창작 교육의 본질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했다. 우리는 흔히 창작 수업에서 스토리텔링의 기법, 캐릭터 구축의 원리, 그림 연출의 테크닉 같은 것들을 가르친다. 물론 이런 기술적 요소들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창작자로서의 태도, 즉 어떻게 자기 작품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것인가, 어떻게 타인의 의견을 수용하면서도 자신의 비전을 지킬 것인가, 어떻게 실패를 성장의 기회로 삼을 것인가 하는 문제들이다. 이런 능력들은 교과서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작품을 만들고, 피드백을 받고, 수정하고, 또 피드백을 받는 반복적 과정을 통해서만 체득된다.
학기 내내 나는 학생들이 이 과정을 거치며 변화하는 것을 목격했다. 처음 합평 시간에는 날카로운 비판에 움찔하던 학생들이, 점차 그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질문으로 발전시키고, 구체적 개선으로 연결하는 법을 배웠다. "이 부분이 뻔하다는 말씀이신데, 구체적으로 어떤 지점에서 그렇게 느끼셨나요?"라고 묻고, "그렇다면 이런 식으로 바꾸면 예측 불가능성이 생길까요?"라고 제안하며, 비판을 건설적 대화로 전환하는 능력을 키웠다. 이것은 단순히 웹툰 창작에만 필요한 능력이 아니다. 어떤 분야에서든 창조적 작업을 하는 사람에게 필수적인 자질이다.
한 학생은 학기 초에 자신의 작품에 대한 비판을 듣고 며칠 동안 낙담했다고 털어놓았다. "제 작품이 형편없다는 걸 다들 알게 된 것 같아서 부끄러웠어요. 수업에 나오기도 싫었어요." 하지만 학기 말에 그 학생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이제는 비판이 오히려 고마워요. 제가 못 보던 걸 다른 사람들이 짚어주니까 작품이 훨씬 나아지거든요. 그리고 비판받는다는 건 사람들이 제 작품에 관심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잖아요. 무관심한 게 더 무서운 것 같아요." 이런 인식의 전환은 교과서를 아무리 읽어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오직 경험을 통해서만, 그리고 그 경험을 성찰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다른 학생은 피드백을 주는 입장에서도 많이 배웠다고 했다. "처음에는 그냥 '좋아요' 아니면 '별로예요'만 말했는데, 그게 별로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알았어요. 구체적으로 어떤 컷에서, 어떤 대사에서, 어떤 연출에서 문제가 있는지 콕 집어서 말해야 상대방이 고칠 수 있더라고요. 그리고 문제만 지적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요?'라는 대안을 주는 게 중요하다는 것도 배웠어요." 이 학생은 피드백의 기술을 익히면서 동시에 자신의 작품을 보는 눈도 날카로워졌다고 했다. "다른 사람 작품의 문제점을 찾다 보니, 제 작품에서도 비슷한 문제를 발견하게 돼요. 그래서 미리 수정할 수 있고요."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학생들이 서로에게서 배우는 문화를 자발적으로 만들어간 것이었다. 공식 수업 시간 외에도 자체적으로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작품을 공유하고 피드백을 주고받았다. 한 그룹은 매주 한 번씩 만나 각자 새로 그린 웹툰 한 화를 가져와 합평했다. "처음에는 부담스러웠어요. 일주일에 한 화씩 그려야 하니까요. 하지만 그 압박감이 오히려 좋았어요. 계속 작품을 만들게 되고, 계속 피드백을 받으니까 실력이 빠르게 늘었어요." 또 다른 그룹은 온라인 플랫폼을 활용해 24시간 피드백 시스템을 만들었다. "디스코드 채널을 만들어서, 누구든 작업 중인 컷을 올리면 다른 사람들이 실시간으로 코멘트를 달아줘요. '이 구도는 이렇게 하면 더 역동적일 것 같아요', '이 대사는 너무 길어요' 이런 식으로요. 즉각적인 피드백을 받으니까 작업 속도도 빨라지고 완성도도 높아져요."
이런 자발적 학습 공동체의 형성은 내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가장 기뻤던 교육적 성과 중 하나였다. 학생들은 교수가 지식을 전달해 주기를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서 능동적으로 배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세대 간 소통 방식의 차이는 장애물이 아니라 배움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의 직설적이고 빠른 피드백 방식과 나의 우회적이고 맥락 중심적인 분석 방식이 만날 때, 양쪽 모두 더 풍부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었다.
어느 날 한 학생이 찾아와 이런 질문을 했다. "선생님, 저는 동료들의 피드백을 들으면서 고민이 생겼어요. 모두가 '이렇게 바꾸는 게 좋겠다'고 하는데, 저는 원래 제 방식을 고수하고 싶거든요. 그런데 다들 그렇게 말하면 제가 틀린 걸까요? 다수의 의견을 따라야 할까요?"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이었다. 나는 잠시 생각한 후 대답했다. "좋은 질문이에요. 피드백을 받아들이는 것과 자신의 비전을 지키는 것 사이에는 언제나 긴장이 있어요. 정답은 없지만, 제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이래요. 먼저 피드백의 '이유'를 파악하세요. 사람들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를 이해하는 거죠. 그들이 지적하는 문제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객관적으로 판단해 보세요. 만약 문제가 있다면, 그들이 제시한 해결책을 꼭 따를 필요는 없어요. 같은 문제에 대한 다른 해결책을 찾을 수 있으니까요. 중요한 건 문제를 인식하는 거예요. 해결 방법은 여러분 자신이 찾을 수 있어요."
학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니까 피드백의 본질을 받아들이되, 표면적 해결책은 내가 재해석할 수 있다는 거네요?"라고 정리했다. "정확해요. 예를 들어, 사람들이 '이 캐릭터가 공감이 안 간다'고 하면, 그들이 제시한 '이렇게 바꾸라'는 방법을 그대로 따를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공감이 안 간다'는 문제 자체는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해요. 그리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 캐릭터를 공감 가능하게 만드는 방법을 찾는 거죠." 학생은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훨씬 편해요. 모든 피드백을 다 받아들여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거든요."
이런 대화를 통해 나는 학생들에게 '비판적 수용'의 기술을 가르치려 노력했다. 모든 피드백을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도, 모든 피드백을 거부하는 것도 아닌, 선택적이고 능동적으로 피드백을 해석하고 활용하는 능력. 어떤 학생은 이것을 "피드백 필터링"이라고 표현했다. "저는 받은 피드백을 세 가지로 분류해요. 첫째, 즉시 반영해야 할 명백한 문제. 둘째, 고민이 필요한 애매한 의견. 셋째, 제 방향성과 맞지 않아서 거부할 의견. 이렇게 분류하고 나니까 피드백에 압도되지 않고 주체적으로 작업할 수 있어요."
학기 말 최종 발표회에서는 놀라운 장면을 목격했다. 한 학생이 자신의 작품을 발표한 후, 스스로 먼저 이렇게 말했다. "이 작품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는 걸 알아요. 템포가 느린 부분이 있고, 주인공의 동기가 약한 부분도 있어요. 하지만 이번 학기에는 여기까지가 제 한계였어요. 다음 학기에는 이 부분들을 개선할 계획이에요. 여러분의 피드백을 듣고 싶어요." 이 학생은 자신의 작품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한계를 인정하며, 동시에 성장의 여지를 확보하고 있었다. 완벽하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불완전함을 출발점으로 삼는 성숙함. 이것이야말로 창작자에게 필요한 자세다.
동료들의 피드백도 달라져 있었다. "템포 문제는 제가 보기에 3화부터 5화 사이에서 특히 심한 것 같아요. 거기서 배경 설명이 너무 길거든요. 그 부분을 압축하고 액션을 앞당기면 좋을 것 같아요." "주인공 동기는 1화에서 좀 더 강조할 필요가 있어요. 지금은 한 컷에서만 언급되는데, 이게 전체 스토리의 핵심이니까 더 비중 있게 다뤄야 할 것 같아요." 피드백은 구체적이고, 건설적이며, 실행 가능했다.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진정으로 작품을 개선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이건 좀 뻔하지 않나요?"라는 학생의 직설적 질문은 처음에는 충격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이 정직한 소통의 시작이라는 것을 안다. 그 질문에는 악의가 없었다. 단지 솔직한 반응이었고, 작품을 더 좋게 만들고 싶다는 바람이었다. 그들의 직설성은 무례함이 아니라 효율성에 대한 추구이고, 그들의 빠른 판단은 성급함이 아니라 디지털 환경에서 단련된 민첩성이다. 매일 수십 개의 웹툰을 스크롤하며 3초 안에 계속 볼지 말지를 결정하는 환경에서 자란 그들에게, 첫인상의 중요성은 생존의 문제다. 그들의 "뻔하다"는 평가는 실제 독자들의 반응을 예측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학생들에게 그 직설성의 한계도 일깨우려 노력했다. 어느 날 수업에서 이런 실험을 했다. 고전 명작 웹툰 〈마음의 소리〉 초기 에피소드를 보여주며, "만약 이것이 신인 작가의 신작이라면 어떤 피드백을 주겠어요?"라고 물었다. 학생들의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그림체가 너무 단순해요", "캐릭터 디자인이 특색 없어요", "스토리가 일상적이고 평범해요", "요즘 독자들 취향에 안 맞을 것 같아요." 나는 웃으며 말했다. "이 작품은 조석 작가의 〈마음의 소리〉예요. 10년 넘게 사랑받은 명작이죠." 학생들은 당황했다.
"이걸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내가 물었다. 한 학생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첫인상만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는 거요?" "맞아요. 하지만 더 중요한 건, '뻔하다'는 평가가 언제나 부정적인 것은 아니라는 거예요. 〈마음의 소리〉의 일상성과 단순함은 약점이 아니라 강점이었어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접근성이 바로 그 작품의 매력이었죠. 여러분이 '뻔하다'고 평가할 때, 그것이 정말 개선해야 할 문제인지, 아니면 작품의 의도된 특성인지를 구분해야 해요."
이 논의는 학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들은 자신들의 평가 기준을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저는 무조건 독창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익숙함도 가치가 있을 수 있겠네요." "뻔하다는 게 예측 가능하다는 뜻인데, 예측 가능성이 나쁜 건 아니죠. 장르 문법을 충실히 따르는 것도 하나의 전략이니까요." "중요한 건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인 것 같아요. 뻔한 소재도 잘 다루면 명작이 될 수 있고, 독창적인 소재도 잘못 다루면 실패할 수 있으니까요."
동시에 그 직설성에는 한계도 있다. 예술적 실험의 가치, 느린 성숙의 중요성, 다양성의 필요성을 놓칠 수 있다. 상업적 성공만을 기준으로 삼다 보면, 당장은 대중의 호응을 얻지 못하지만, 장기적으로 중요한 작품들을 놓칠 수 있다. 나는 학생들에게 예술사에서 당대에는 인정받지 못했지만, 후대에 재평가된 작품들의 사례를 들려주었다. 고흐의 그림, 카프카의 소설, 초기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 이들은 모두 동시대 비평가들에게 "이상하다", "이해할 수 없다", "쓸모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들의 혁신성이 인정받았다.
"그렇다고 여러분이 모두 고흐처럼 살아야 한다는 건 아니에요." 나는 덧붙였다. "하지만 '지금 당장 대중에게 어필하는가'만이 유일한 가치 기준은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해요. 때로는 시대를 앞서가는 작품, 소수를 위한 작품, 상업성과 무관한 순수한 예술적 실험도 필요해요. 그리고 여러분 중 누군가는 그런 길을 갈 수도 있어요." 한 학생이 물었다. "하지만 선생님, 그러다가 굶어 죽으면 어떡해요?" 솔직한 질문이었다.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서 균형이 필요한 거예요. 상업적 작품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개인적 예술 프로젝트를 병행할 수도 있어요. 아니면 대중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작품을 만들 수도 있고요. 정답은 없어요. 각자가 자신의 길을 찾아야죠."
교육자로서 나의 역할은 그들의 강점을 인정하고 활용하되, 균형을 잡도록 돕는 것이다. 빠름과 느림, 효율과 실험, 대중성과 예술성 사이의 균형. 그 균형점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각 창작자가, 각 작품에서, 순간마다 새롭게 찾아야 하는 것이다. 어떤 작품에서는 대중성을 우선할 수 있고, 다른 작품에서는 실험성을 추구할 수 있다. 경력의 어떤 시기에는 상업적 성공에 집중할 수 있고, 다른 시기에는 예술적 도전을 할 수 있다. 중요한 건 자신이 지금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지를 인식하고, 그 선택의 의미와 대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탐색의 여정에서 세대를 넘어선 대화가 꼭 필요하다. 학생들의 현장 감각과 나의 역사적 관점이 만날 때, 더 풍부한 이해가 가능하다. 그들은 "지금 독자들이 원하는 것"을 알고, 나는 "시대를 초월하는 가치"를 이야기할 수 있다. 그들은 "플랫폼 알고리즘이 선호하는 것"을 파악하고, 나는 "알고리즘에 포섭되지 않는 창의성"을 강조할 수 있다. 이 대화는 일방적 가르침이 아니라 상호 학습이다. 나도 학생들에게서 배운다. 현재의 창작 환경, 독자의 변화된 기대, 새로운 기술의 가능성. 그리고 학생들도 나에게서 배운다. 과거의 지혜, 보편적 서사 원리, 비판적 사고의 틀.
학기가 끝나갈 무렵, 한 학생이 개인적으로 찾아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선생님, 저는 이 수업을 듣기 전에는 피드백이 무서웠어요. 비판받는 게 싫었고, 제 작품이 완벽하지 않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혼자 작업했죠. 하지만 이제는 알았어요. 완벽한 작품은 처음부터 나오지 않는다는 것. 피드백을 통해 작품이 성장한다는 것. 그리고 비판은 공격이 아니라 도움이라는 것. 이제 저는 제 작품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게 두렵지 않아요. 오히려 기대돼요. 어떤 반응이 나올지, 어떤 개선점을 발견할 수 있을지."
이 학생의 변화는 이 수업이 추구하던 교육 목표의 핵심을 보여준다. 기술적 완성도를 높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작자로서의 태도를 형성하는 것이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비판을 성장의 기회로 삼으며, 끊임없이 배우고 개선하려는 자세. 이런 태도를 가진 창작자는 어떤 환경에서도, 어떤 변화 앞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 기술은 시대에 따라 변하지만, 태도는 평생을 지탱한다.
합평 시간의 충격은 이제 소통의 실험실이 되었고, 그 실험은 계속된다. 매 학기 새로운 학생들이 들어오고, 새로운 작품이 발표되며, 새로운 피드백이 오간다. 그 과정에서 나도 계속 배우고 조정한다. 학생들의 소통 방식에서 배울 점을 찾고, 내 방식의 한계를 인정하며, 양쪽의 장점을 통합하려 노력한다. 완벽한 교육 방법은 없다. 다만 더 나은 방법을 향한 끊임없는 탐색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탐색의 파트너는 바로 학생들이다. 그들과 함께, 그들로부터, 그들을 위해 나는 오늘도 배운다. "이건 좀 뻔하지 않나요?"라는 질문은 이제 두렵지 않다. 오히려 반갑다. 그것은 정직한 대화의 시작이고, 진정한 배움의 출발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