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극 만화의 동시대성

초기화
글자확대
글자축소

왕자가 되어 시대를 직면하는 여자 (2) : 웹툰 <정년이>를 중심으로

『정년이』에 나타난 여성 예술가의 주체성과 국극의 해방적 의미

2025-09-15 강다연

왕자가 되어 시대를 직면하는 여자 (2)

웹툰 <정년이>를 중심으로

서문왕자가 되고 싶은 소녀, 윤정년

젠더 프리 캐스팅을 아는가? 공연계에서 주로 볼 수 있는 방식으로, 배우의 성별과 무관하게 배역을 맡는다. 뮤지컬 <브로드웨이 42번가>에서 배우 박칼린이 남성 배역인 줄리안 마쉬로 캐스팅되어 화제를 모았다. 뮤지컬 <하데스타운>에서도 배우 최정원이 헤르메스로 출연했다. 또한, 2025년 시즌 연극 <보도지침>은 전 배역을 젠더 프리로 진행했다. 뮤지컬 <데미안>, <미드나잇>, <종의 기원> 등 여러 작품이 배우가 성별이라는 틀에 갇히지 않고 연기할 수 있게끔 캐스팅한 사례가 있다.

젠더 프리 캐스팅의 묘미는 여성 배우가 남성 배역을 연기하는 순간 느껴지는 카타르시스다. 여성을 주연으로 하는 작품이 증가하는 추세지만, 아직 남성 중심의 작품이 많다. 그 말은 여성 캐릭터가 한정되어 있다는 뜻이다. 주요 인물이 남성으로만 구성된 작품에서 여성 캐릭터는 대부분 스테레오타입이다. 따라서 조연 여성 캐릭터는 여성 배우의 연기력을 전부 보여주기에는 한계가 있다. 젠더프리는 이 상황을 전복한다. 여성 배우가 남성 배역을 맡는다. 여성 배우는 여성 캐릭터로는 쉽게 볼 수 없었던 인물을 연기한다. 해적 선장이 되거나, 살인마가 되기도 하고, 고전 작품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여성이 연기할 수 있는 배역의 폭을 확장한다.

오늘날의 젠더 프리라는 개념이 등장하기 전에 이미 배역의 성별에 상관없이 모든 배역을 여성이 연기하는 형태의 공연이 있었다. 바로 여성 국극이다. 웹툰 <정년이(서이레 글, 나몬 그림)>의 해설을 인용하자면, ‘연기로 승부를 거는 연극과 다르고 한 사람이 모든 배역을 도맡는 판소리와도 다르다(중략)노래, , 연기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최고의 여성들만이 국극 무대에 오를 자격을 얻는다.1라고 국극을 서술하고 있다.

두 번째로 이야기하고 싶은 작품은 <정년이>이다. 본 작품은 2019년부터 2022년까지 연재된 웹툰이다. 여성 서사로 독자들에게 호평을 받았고, 2024년에 tvN 드라마로 각색되어 방영되었다. 국극이라는 낯선 소재에 성장물이라는 익숙한 플롯을 결합했다. 국극이 성행했던 1950년대 서울을 배경으로 하며, 국극 배우가 되기 위해 목포에서 상경한 소녀 정년이 주인공이다. 정년이 진정한 국극 배우로 거듭나서 왕자가 되기까지의 여정을 그린다.


1. 국극이라는 해방적 세계를 탐닉하다

인물을 설계하는 데 기초가 되는 요소는 무엇일까. 목적과 결핍이다. 이야기의 시작점에서 인물은 미완이다. 성장하지 않은 상태이므로 미성숙하며, 환경에서 오는 결핍을 가지기도 하고, 전사(前事) 때문에 고통받기도 한다이러한 인물의 불완전성은 목적을 만든다완벽하지 않은 인간이기 때문에 결핍에서 비롯된 욕망이 생긴다욕망은 목적을 낳는다목적은 인물을 행동하게 하고이로 인해 이야기가 앞으로 나아간다정년의 결핍은 조개만 파는 삶이다정년에게는 국극 배우로서 재능이 있다시장에서 소리를 하는 조건으로 조개를 전부 팔아치울 정도로정년 역시 자신에게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안다그렇기에 시장에서 조개를 파는 삶에 회의를 느낀다이런 삶에서 벗어나고 싶다국극 배우는 돈을 가마니로 번다며 국극을 해야겠다고 다짐한다현실의 삶에서 느낀 무력감은 정년에게 국극 배우라는 목적을 싹틔운다. 

단장 소복에게 찾아가 연구생으로 받아달라고 조르는 정년소복은 정년에게 왜 국극단에 들어오고 싶은지 묻는다정년은 솔직하게 답한다부자가 되고 싶다고정년의 답은 소복의 화를 키운다결국 소복은 정년이 예술과 소리가 무엇인지 고민하지도 않고 돈만 밝힌다며 성을 낸다입단조차 못 해보고 내쫓길 수 없었던 정년은 소품을 싣는 트럭에 올라탄다매란국극단의 간판스타 옥경은 정년이 마음에 들었기에 소복을 설득한다정년은 옥경의 도움으로 매란국극단의 연구생이 된다.

정년이 첫 번째로 맡은 배역은 춘향전의 방자이다정년의 짝 선배 도앵이 자명고’ 대본을 받고 싶다면 연구생 공연 춘향전에서 아무 역할이나 해내라고 한 것정년은 정기 공연인 자명고’ 오디션을 봐야 했기 때문에 춘향전의 어떤 배역이라도 내어달라고 요청한다정년의 라이벌 영서는 국극의 남역 주연 자리를 노리는 정년이 못마땅하다그렇기에 정년에게 일부러 방자를 준다초짜가 맡기에는 무리가 있을 정도로 큰 배역이다.

정년은 처음에는 분량이 많은 배역을 맡아서 고무되지만이내 좌절한다터무니없는 실력 때문에 공연 당일에 망신을 당할 것이 뻔한 상황이다정년은 주란의 추천으로 파스텔 다방에서 일하게 되는데마치 구세주처럼 고 사장이 등장한다고 사장은 중절모와 양복바지를 입고 여성들에게 추파를 던진다정년은 그의 차림과 행동만 보고 남자라고 착각하며 질색한다그러나 여학생 부용과의 첫 만남 때 위기에 처한 정년과 부용을 고 사장이 구해준 것을 계기로 그가 여자임을 깨닫는다.


고 사장은 고작 남성성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을 흉내 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남성으로 착각하는 세상을 가소로워한다. 정년은 고 사장에게 자신을 제자로 삼아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성별 이분법적 사고에 갇혔던 정년은 여자남자를 연기한다는 사실에 집착했기 때문에 제대로 된 방자를 연기할 수 없었다. 정년은 고 사장의 가르침에도 남녀가 유별하다는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하지만, 정년이 부용과 정년을 괴롭히던 남학생들과 재회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그의 사고방식은 달라진다. 남학생들은 정년을 알아보지 못한다. 바지를 입고 건들거리며 그들을 노려봤다는 이유만으로. 겁을 먹은 남학생들이 달아나자 정년은 전율하면서도 속상해한다. 정년의 가치관에 서서히 금이 간다. 세상이 강요하는 성역할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얼마나 우스운 것인지 몸소 체험했기 때문이다.

고 사장은 세상을 국극 무대에 비유한다. 세상 사람들은 이성적이고 용감하고 근육질인 남자와 상냥하고 사랑스럽고 가녀린 여자2를 마치 국극 배우처럼 연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정년은 고 사장에게 도움을 받고 스스로 깨달아 자신만의 방자를 찾는다. ‘여자남자를 연기하는 것이 아닌, ‘윤정년방자를 연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학습한다. 정년은 가까스로 무대에 올라서 방자가 되어 첫 공연을 성공적으로 해낸다.

춘향전공연을 통해 정년은 국극이라는 해방적 세계를 탐닉한다. 국극 배우는 모두 여성으로 구성되고, 그 누구도 이에 반기를 들지 않는다. 관객들은 그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을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고 사장은 남장했다는 이유로 폭행당한 적이 있다고 정년에게 고백했다. 심지어는 징그러운 괴물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본 작품의 배경은 1950년대였으므로 있을 만한 일이다. 하지만, 2025년과 완벽하게 유리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1950년대가 저물고, 그 잔해 속에서 만들어진 2025년은 여전히 차별과 편견이 도사린다.

그러나, ‘징그러운 괴물은 국극 무대 위에서 당연한 존재가 된다.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배우이기 때문에. 그뿐인가. 국극의 왕자 옥경은 팬의 요청으로 신랑이 되어 결혼사진을 찍기까지 할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는다. 현실에서 소외되고 멸시받던 존재가 국극에서는 동경의 대상으로 전복된다. 작가는 국극의 특성을 영리하게 이용해서 당대와 현대 사회가 강요하는 성역할의 무의미함을 강조한다. 또한, 당대에 자행되었던 차별적 시선을 고 사장 에피소드를 통해 풀어낸다. 정년이 고정관념에서 탈피해 방자를 연기할 수 있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한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의 성차별과 성별 이분법 중심의 관점이 현대에도 잔재한다는 것을 피력한다.


2. 생동하고 호흡하는 국극 배우들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이었던 목포 소녀가 무대에서 왕자가 되기까지의 여정은 정년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정년과 함께 무대에 오르는 다른 배우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정년이 왕자가 된 것이다. 본 작품을 구성하는 인물은 대부분 국극 배우다. 정년의 짝 선배 도앵부터 매란의 왕자 옥경과 공주 혜랑, 그리고 그런 옥경을 좋아하는 주란, 정년의 라이벌 영서, 미워할 수 없는 초록까지. 모두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갈등하고 호흡하고 성장한다. 작품의 특징 중 하나는 주요 인물이 전부 결핍과 목적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입체적이라는 점이다. 서로 다른 비밀과 약점을 품지만, 그들의 마음은 하나로 귀결된다. 바로 꿈이다. 그들은 국극이라는 꿈을 꾸고 배우로서 무대에 오른다. 

정년과 가장 크게 대립하는 인물은 영서다. 동시에 함께 성장하는 라이벌이기도 하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정년을 증오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정당당하게 실력으로 겨뤄서 정년을 이기고자 한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는 주인공의 라이벌일지라도 영서를 미워할 수 없다. 영서에게는 어머니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 영서의 어머니는 유명 소프라노로 큰딸 영인이 자신을 따라 성악을 배운 것을 자랑거리로 여긴다. 또한, 국극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인다. 그렇기에 영서는 어떻게 해서든 최고가 되어야 한다. 국극에서 최정상은 남역 주연 자리다.

영서는 매란 국극단 연구생 중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갖췄다. 피나는 노력으로 정상의 자리를 향해 올라가려는 모범생이다. 그런 영서에게 갑자기 정년이 나타난다. 정년은 자신이 남역 주연이 되어서 돈을 가마니로 벌 것이라고 호언장담한다. 정년은 등장과 함께 영서의 눈엣가시가 된다. 정년은 영서의 어머니가 인정하는 명창 채공선의 딸이다. 영서는 정년이 신경 쓰인다. 하지만, 여러 사건을 겪으며 영서 역시 정년과 함께 성장하며 우정을 쌓는다.

영서에게 가장 큰 결점은 무대를 자신의 것으로만 여기는 독단과 오만이다. 본 작품의 첫 번째 공연으로 등장하는 춘향전때 영서는 이몽룡을 맡는다. 춘향 역을 맡은 다른 연구생이 잘 부탁한다고 인사하지만, 영서는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영서에게 무대는 혼자 서는 것이며 자기 자신과의 전쟁터. 정년이 방자 역을 맡는 것이 못마땅했던 초록이 훼방을 놓자, 영서는 초록에게 경고한다. ‘무대를 망치지 말라고. 초반부 영서는 모두가 함께 서는 무대를 자신의 것으로만 여긴다.

영서의 생각을 바꾸는 것은 동료 연구생인 주란이다. 영서와 주란은 자명고의 고미걸과 구슬아기를 맡는다. ‘자명고는 목련과 호동, 그리고 고미걸과 구슬아기, 두 쌍의 합이 맞아야 하는 공연이다. 영서는 도앵이 고미걸을 해석한 대로 똑같이 연기를 하려고 하지만 이내 벽을 느낀다. 고미걸을 찾기 위해서는 구슬아기 주란이 필요하다. 영서는 주란의 해석과 연기에 힌트를 얻어 고미걸이라는 인물을 구축해 낸다. 이 과정에서 영서와 주란은 함께 연습하며 호흡을 맞춘다. 그리고 영서는 주란과 무대를 함께 쓰는 법을 배운다.

영서는 바보와 공주아역 오디션에 합격하기 위해 주란과 다시 합을 맞춘다. 하지만, 정년의 연기를 보고 자신의 연기가 진정한 몰입이 아닌 계산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집착하기 시작한다. 자신을 정신적 한계까지 몰아넣으면서까지 연습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주란과 사이가 틀어졌고, 오디션에서는 합이 전혀 맞지 않는다. 그런데도 영서와 주란이 옥경과 혜랑의 아역으로 발탁된다. 영서는 드디어 어머니가 웃어주셨다며 좋아하지만, 그 기쁨은 얼마 가지 못한다. 어머니가 국회의원 인맥을 이용해 손을 썼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영서는 자신이 그토록 인정을 갈구했던 대상이 고작 그런 사람이었다는 사실에 크게 실망한다.

이 무렵 영서는 위태롭다. 당장이라도 터질 것만 같은 시한폭탄 같은 상태다. 연습하면서도 무엇을 위해 자신이 존재하는지, 왜 살아 있는지 알 수 없어 괴로워한다. 그런 영서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은 주변 사람들이다. 옥경은 영서가 국극을 하는 이유를 묻자 그냥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라고 답한다. 또한, ‘이유를 찾다 보면 허무해지거든(중략)삶은 정말 위대하지. 목적 없이도 살 수 있다니. 하고 싶은 일만 힘껏 하고 떠날 수 있어.3라며 자신의 가치관을 영서에게 전달한다. 또한, 영서에게 맹목적인 응원을 주는 언니와 분이의 편지를 읽는다. 울음을 터뜨리는 영서 곁에는 연구생 친구들이 있다. 무대는 자신만의 것이라고 여겼던 영서가 다시 연기를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모순되게도 영서를 응원하는 동료와 가족이었다.

정년의 스승이 되어주었던 도앵은 호탕한 성격의 소유자다. 악역 가다끼로 이름을 떨친 배우이기도 하다. 정년이 국극단에서 제공되는 야참비가 부족하다고 투덜대는 것을 보고 돈을 더 챙겨주기 위해 사업부를 조사할 정도로 도앵은 정이 많다. 작중 소리를 잘하지 못한다는 묘사가 나온다. 정년이 매란에 처음 입단했을 때 도앵 앞에서 도앵의 소리 실력을 깎아내리는 말을 해서 갈등을 빚기도 한다. 사실 그가 소리를 잘하지 못하는 것은 기생처럼 보이는 것이 싫어서 연습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도앵의 아버지는 양반이라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다. 가부장적이고 구시대적인 사고방식을 지녀 국극을 삼류 기생 놀음이라고 비하한다. 또한 도앵이 배우로서 무대에 서는 것을 탐탁치 않아 한다. 그는 도앵이 교사가 될 수 있도록 학교에 보냈으나 국극 배우가 된 것에 분개하기까지 한다. 도앵에게 아무리 가르쳐도 계집은 계집4이라면서 기생질로 돈을 번다고 소리 지른다. 도앵은 아버지가 하는 말이 잘못된 줄 알면서도 아버지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러한 면에서 도앵이라는 인물은 아이러니하다.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편협한 시선을 답습하면서도 국극을 사랑하는 마음은 변치 않기 때문이다. 도앵은 혜랑의 이간질로 인해 매란국극단에서 쫓겨나지만, 국극을 포기하지 않는다. 다른 국극단에서 활동하다가 작중 후반부에 다시 매란으로 되돌아와 연출을 담당한다. 도앵은 끝까지 국극을 놓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재능을 살려 연출가로서 활약한다. 이처럼 본 작품은 정년만을 주목하지 않는다. 정년의 주변 인물까지 초점을 맞추고, 그들의 입체성을 부각한다. 그들의 서사가 한데 모여 본 작품을 완성한다.


3. 왕자가 사랑을 구하지는 못하더라도

본 작품에서는 흘러가는 시간과 차별적 시선 속에 지워진 여성 예술가를 불러낸다. 특히 주요 인물 중 유일하게 극단 외부 인물인 부용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후반부에서는 부용에게 초점이 맞춰지면서 정년과 부용의 서사가 재구성된다. 부용은 유명 극작가 권영섭의 딸이자 여학교에 다니는 학생이다. 속내를 알 수 없는 인물로, 정년의 팬이라는 이유로 정년에게 무엇이든 다 내어준다. 부용은 신비로운 인물이다. 하지만 후반부에서 부용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다시 전개되고, 부용의 내면이 드러난다.

부용은 레즈비언이다. 학교에서 S를 맺은 오은심을 사랑한다. 하지만, 오은심은 부용의 약혼자 이민형을 좋아하고 부용을 질투한다. 부용이 문학상에 제출한 원고를 이민형의 이름으로 바꾸어 버린다. 부용은 이민형에게 모든 것을 바로잡으라고 소리치지만, 이민형은 학교의 명예가 달린 일이라며 거절한다. 부용은 오은심이 자신을 배신했다는 사실에 큰 상처를 입는다. ‘자명고대본의 저자는 부용의 아버지 권영섭이 아닌 어머니 이경자였다. 아버지가 어머니의 글을 훔치고 이름을 빼앗았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부용은 민형에게 글을 빼앗긴다. 작가로서 써낸 글을 도둑질당하는 피해가 가부장제라는 이름 아래 답습된다. 이를 통해 여성 예술가에게 가해진 억압이 비단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 세대 간에 대물림되는 남성중심주의 폭력이다. 작가는 보여주기방식을 통해 당시 존재했던 성차별을 폭로한다.

부용은 여학생의 긍지를 저버리고 결혼한다는 이유로 학생들의 표적이 된다. 낙태 수술을 받았다는 소문까지 퍼진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겠다는 일념으로 이민형에게 편지를 보내지만, 다른 이들이 가로채 간다. 이때, 정년을 만난다. 부용은 정년을 왕자님 흉내를 내는 가짜 왕자라고 정의 내린다. 하지만, 정년은 부용의 편지를 빼앗은 남학생들 때문에 겁을 먹으면서도 달아나지 않는다. 부용은 연구생 공연에서 방자 역을 소화해 내는 정년을 보고 그의 팬이 된다.

문예지 사건 이후로 아무것도 쓰지 못했던 부용은 정년 덕분에 다시 펜을 든다. 정년이 부용의 뮤즈가 된 것이다. 부용은 왕자가 된 정년을 상상하며 쌍탑 전설을 집필한다. 본 작품은 국극을 해방적 세계로 바라보고, 무대에 오르는 이들뿐만 아니라 그 세계를 창작한 이들에게도 초점을 맞춘다. 국극은 가부장적이었던 사회로 인해 소외당한 여성 작가들(부용과 그의 어머니)이 만든 세계였다. 그렇기 때문에 본 작품에서는 국극이 사회에서 비주류로 취급받는 이들이 발화하는 수단으로 작용한다.

이를 통해 작품은 1950년대 사회의 시대상을 고발한다. 호모포비아와 가부장제가 만연한 시대를 비판한다. 또한, 이는 비단 1950년대만의 것이 아니다. 현대에도 통용되는 이야기다. 부용이 겪은 차별과 소외가 과거에 한정된 일이 아니라는 것은 2024년에 tvN에서 제작된 드라마 <정년이>에서 증명되었다. 부용은 드라마 각색 과정에서 삭제되었다. 부용은 주인공 정년의 사랑이며, 부용의 서사는 작품의 메시지를 대변할뿐더러, 정년 다음으로 중요한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도. 부용의 빈자리는 다른 인물들로 대체 되었다. 마치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각색이 부용의 이름을 빼앗고 존재를 지우려 했던 1950년대 남성 중심 사회와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결론. 정년, 왕자가 되다

국극은 1940년대 말에 등장했다. 본 작품의 배경은 국극의 전성기였던 1950년대부터 쇠퇴기까지인 1960년대까지다. 1960년대가 들어서면서 가부장제에 기초한 민족주의와 산업화에 따른 근대화가 퍼져나갔다.5 관객들은 국극이라는 환상의 세계에서 벗어나 현실을 살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국극은 관객들에게 잊힌다. 국극의 쇠퇴기를 작품에서도 반영한다. 옥경은 매란을 떠나고 국극의 입지는 예전과 같지 않다.

하지만, 본 작품은 실제 역사처럼 국극이 사라지도록 두지 않는다. 왕자가 되고 싶은 인물들에게 국극을 다시 일으킬 기회를 준다. 정년을 비롯한 배우들은 부용이 쓴 쌍탑 전설을 무대에 올린다. 정년은 부용이 상상한 왕자, 아사달이 된다. 주란은 아사녀가 되고, 영서는 아사달의 재능을 질투하는 동시에 동경하는 달비가 된다. 쌍탑 전설은 흥행에 성공하고 국극은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정년은 부용을 기다린다. 부용은 쌍탑 전설 오디션을 마지막으로 잠적해 버렸다. 그는 민형과의 결혼식을 올리기 직전에 식장에서 뛰쳐나왔다. 부용의 왕자님인 정년을 보기 위해서. 부용과 정년은 사랑을 확인한다. 그 이후로 부용의 가족은 자취를 감춰버렸고, 정년은 부용을 잊지 못한다.

작품의 마지막 장면은 부용과 정년의 재회이다. 부용이 백합을 들고 정년의 대기실에 찾아오고, 정년이 부용을 향해 미소 짓는 것으로 작품이 마무리된다. 왕자가 된 정년은 비로소 사랑을 얻는다. 부용과 정년의 사랑과 주요 인물들의 연대는 시대를 견디는 힘이 된다. 어떤 이들은 차별과 편견이 즐비한 시대 속에서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죄가 된다. 본 작품의 인물들은 함께 꿈꾸며 성장하고 그 편협한 세상을 버텨내고, 살아낸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만의 목소리로 독자에게 메시지를 전한다. 세상이 자신의 존재를 지워버리려고 한다면 끝까지 살아남아서 꿈을 꾸고 사랑하고 소리치라고.

이 메시지는 현대에도 적용되는 이야기다. 현대에도 소수자는 어디에나 존재하고, 세상은 아주 쉽게 그들을 지워버린다. 드라마가 부용이를 없는 인물 취급했던 것처럼. 우리는 아직도 이토록 잔인한 시대에 산다. 그렇기 때문에 본 작품은 유의미하다. 다르다는 것을 틀렸다고 받아들이는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오히려 그 시대적 배경을 이용하여 그 시대에 차별받던(혹은 지금도 차별받는) 인물들을 주요 인물로 내세운다. 작품은 과거 역사 속 차별을 이야기하면서도, 그 시대와 현재가 유기적 관계를 띄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렇기에 작품은 역사적인 동시에 현대적이다. , 동시대적이다.

정년과 부용을 비롯한 작중 주요 인물들은 그 시대를 살다 사라진 여성 예술가를 대표한다. 시대는 정년을 호시탐탐 노린다. 정년에게서 국극을 빼앗아 가려고 하고, 부용과 떼어놓는다. 정년은 좌절하고 꺾인다. 하지만 다시 일어선다. 얼룩은 아무리 깨끗하게 지우려고 해도 지워지지 않고 자국을 남기는 것처럼 본 작품은 그들이 존재했음을 증명한다. 왕자가 되어야 한다는 일념 아래 부러진 목으로 소리를 하고 연기를 한다. 정년은 국극 쇠퇴기에도 포기하지 않고 부용이 직조한 글 안에서 살아 숨 쉬는 아사달이 된다. 정년은 그렇게 허구이자 해방의 세계 속 왕자님이 되어 부용이라는 사랑을 얻는다.


1) 서이레, 나몬,정년이 1, (문학동네, 2020), 60p~62p.

2) 서이레, 나몬,정년이 2, (문학동네, 2020), 104p.

3) 서이레, 나몬,정년이 8, (문학동네, 2024), 101p.

4) 서이레, 나몬,정년이 4, (문학동네, 2021), 72p.

5) 김태희, “여성국극이 우리에게 남긴 것들<DRAGx여성국극> 공연을 중심으로”, 한국연극학 73(2020.02) : 270p

필진이미지

강다연


								


관련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