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좋아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여름 하늘』, 소장

여름을 음미하는 방법의 하나는 풍경을 오래 바라보는 것이다. 나뭇잎 틈새로 걸린 하늘이나 그 아래 드리운 그림자를 들여다보면 된다. 여름만큼 하늘과 잎의 색 대비가 뚜렷하고, 그림자 역시 유난히 선명한 때가 없기 때문이다. 이 풍경을 항상 마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여름이 지나가는 것이 조금 아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에게 여름은 그저 ‘버티는’ 계절이어서 ‘음미한다’라는 말이 어색하게 들릴 수 있다. 여름을 견디느라 진이 빠진 사람들 앞에서 선뜻 여름에 대한 호감을 밝히기란 쉽지 않다. 점점 더 더워지는 때이니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이왕 견뎌야 한다면 여름의 좋은 면들도 간직해두는 편이 낫지 않을까. 웹툰 <사랑하는 여름 하늘>을 반가운 마음으로 읽은 건 그래서였다.
<사랑하는 여름 하늘>은 하늘을 무척 사랑하는 주인공 ‘기후’의 여름을 그린, 제목 그대로의 작품이다. 특히 공감했던 것은 어떤 사건이나 인물의 감정보다도 이 작품이 여름을 목격하는 시선 자체였다. 하늘을 사랑하는 기후의 시선을 빌려 애정이 가득 담긴 여름의 풍경들을 찬찬히 바라보는 느낌이 좋았다.
시원하게 탁 트인 푸른 하늘뿐 아니라 살굿빛으로 물든 노을 하늘, 어두워지는 찰나 맺히는 보랏빛 하늘, 그리고 푸른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여름밤의 하늘까지. 그간 여름을 나며 보았던, 보는 순간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던 아름다운 하늘들을 웹툰의 장면 장면에서 재회할 수 있었다. 여름은 해가 긴 만큼 열기를 오래 견뎌야 하지만, 그만큼 아름다운 하늘을 더 오래 볼 수 있는 계절이기도 하다. 아차 하면 깜깜해지는 겨울 하늘과 달리, 천천히 물이 드는 모든 과정을 목격할 시간이 주어진다. 그 넉넉한 시간을 통해 포착되는 모든 하늘이 작품 안에 있었다.
나무 그늘을 보는 일 역시 즐거웠다. 작화 곳곳의 음영은 여름만이 담아낼 수 있는 선명한 형태였다. 빛을 다루며 색과 그림자를 새기는 솜씨가 능숙해 여름의 모습이 손실 없이 작품 안에 담겼다. <사랑하는 나의 하늘>은 이 온전한 여름 안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로, 만화를 읽는 일이 곧 여름을 보내는 것처럼 느껴지는 작품이다.
주인공 기후는 어린 시절 하늘에 완전히 매료된 후, 고등학생이 된 지금까지도 틈만 나면 하늘을 찍는다. 사랑하는 하늘은 아름다운 사진으로 쉽게 담아내지만, 사람을 찍는 일에는 관심이 없어 아무리 노력해도 어색하게만 찍힌다. 제목의 ‘하늘’은 중의적인 의미를 띠고 있는데 기후의 옆자리에 ‘하늘’이라는 이름의 여학생이 전학을 온다.
기후와 하늘은 어떤 사정 탓에 출발점이 꼬인 상태로 관계가 시작된다. 하지만 공모전 때문에 인물 사진을 찍어야 하는 기후는 결국 하늘에게 도움을 받는다. 하늘을 모델 삼아 인물 사진을 찍는 연습을 시작한 것이다. 갈피를 잡지 못하던 기후는 사랑하는 하늘을 찍듯 짝꿍 하늘이를 찍어보라는 조언을 듣는다. 이후 기후는 찍고 싶을 만큼 마음에 드는 순간을 기다리며 하늘이를 찬찬히 응시한다.
하늘이를 찍기 위해 노력하는 기후의 모습이 흥미로운 이유는 여름을 좋아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 또한 이와 같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기후는 같은 공간에 있는 것조차 불편해하며 거리를 두던 하늘이와 마지못해 함께하고 차분하게 하늘이를 관찰해 나간다. 그 노력의 시간은 견디던 것을 익숙하게 만들고, 미처 알지 못해 놓치고 있던 좋은 면을 발견하게 돕는다. 생각해 보면 여름뿐만 아니라, 아주 싫어하던 무언가에 대한 감정의 전환이 때때로 이러한 인내를 통해 얻어지곤 했다.
사실은 나 역시 여름을 처음부터 좋아한 것은 아니다. 더위를 잘 타지 않는 편인데도 겨울에 여름을 떠올리면 끔찍하게 더운 생각만 들어 빨리 지나가길 바라며 버티기만 했다. 그러다 몇 년 전, 에어컨 없이 여름을 나야 했던 때가 있었고 그때를 기점으로 여름을 좋아하게 되었다. 느릿하게 가는 시간만큼 여름을 꼼꼼히 느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건 퍽 힘든 일이었지만, 그만큼 여름의 모든 순간을 천천히 체험하는 기회가 되었다. 실내의 냉기와 실외의 열기를 극단적으로 오가는 처지에서 벗어나니 감각이 훨씬 섬세해졌다. 살갗에 새기듯 체험한 여름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고, 그해 천천히 다가온 가을을 어느 때보다 기민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다채로운 하늘과 흰 구름”, “조용히 저무는 따뜻한 노을”, “상쾌한 공기의 냄새”, “살짝 비릿한 비 냄새”, “새벽의 이슬 냄새”. 하늘의 어떤 점이 좋냐는 물음에 기후가 떠올린 것들이다. 하늘을 물었지만, 자세히 따져보면 여름에 관한 대답에 가깝다. 때로는 좋아하는 요소를 열거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애정을 증명하기도 한다. 이 사실을 떠올리면 기후도, 기후의 목소리를 빌려 여름을 쓰고 그린 작가도 정말로 여름 하늘을 좋아하는 듯하다.
나도 여름의 어떤 점이 좋은지 구석구석 말할 수 있다. 가로수 그림자로 어두워진 한낮의 산책로, 가벼운 옷차림, 구름이 멀리 떠 있는 높은 하늘, 얼음 든 음료를 마시기 전의 들뜨는 마음, 향긋한 복숭아 같은 것들. 더위와 땀도 또렷한 활기를 주기 때문에 좋아하는 편이다. 조금 바보 같긴 하지만, 이렇게 좋아하는 부분을 열거할 수 있을 만큼 여름을 좋아하게 되고서야 나와 가장 잘 맞는 계절이 여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는 싫어하는 마음에 가려져 오랫동안 몰랐던 것이다.
하늘이와 함께 하는 게 익숙해지고 하늘이의 다양한 면을 알게 되면서 어느덧 기후는 친구 중 누구보다도 하늘이를 잘 알아채는 사람이 된다. 하늘이의 사정을 알게 되고 엉켰던 감정의 매듭을 푼다. 하늘이의 스치는 표정 하나까지도 알아채 이해하고 배려하며 새로운 관계를 쌓아나간다. 이러한 전개는 기후가 하늘이를 응시하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결정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오래 바라보는 일이 마음과 삶의 풍경을 바꾸기도 한다는 걸, 겪어본 사람은 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