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꼬아 양끝을 붙인 뫼비우스의 길
<검둥이 이야기> (윤필 작)
이복한솔(만화평론가)
어느 작가는 인식과 표현의 한계를 아쉬워했다. “의인화를 안 하려야 안 할 수 없다”고. 실버백 마운틴 고릴라를 글로 묘사하면서 “고릴라 눈에는 우리가 어떻게 보일까 상상해보려 애썼지만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도 했다. 동물과 소통하고 교감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지만, 인간 중심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동물을 이해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역지사지 이상의 노력, 이성에 기반을 둔 훈련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이 동물에만 해당하는 이야기일까? 동물인지 인간인지 그 경계가 모호한 존재들을 내세운 윤필의 연작, 그 가운데 하나인 <검둥이 이야기>를 읽으며 생각해본다.
검은 풍산개 검둥이는 생후 일 개월 때 첫 번째 주인을 만난다. 첫째 주인은 북한에 적을 둔 실향민으로, 백령도에서 고독하게 살다가 외롭게 죽는다. 따뜻하고 사려 깊은 면모를 지녔음에도 말년에는 검둥이를 제외한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한다. 그의 마지막 소원은 “어머니 곁에 묻히는 것”과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죽음"을 면하고 정식으로 장례를 치르는 것이다. 검둥이는 주인이 죽던 날 “바다 건너 땅까지 들리도록 있는 힘껏 큰 소리로 오래오래” 운다. 이후에는 장례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개장수에게 자기 자신을 판다.
개장수를 거쳐 만난 두 번째 주인은 밀렵꾼이다. 검둥이는 그의 보조 노릇을 한다. 산에 올무를 여럿 설치하고, 올무에 걸린 고라니나 멧돼지 등을 수습하는 일이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함부로 죽이지 말"라는 첫째 주인의 가르침을 위반하는 일이지만, 전모를 파악하기 전까지는 잠자코 시키는 대로 따른다.
그러나 새끼도 가리지 않고 마구 잡아들이는 둘째 주인의 잔혹함에 회의를 느낀다. 나중에는 설치해둔 올무를 몰래 끊는 식으로 밀렵에 훼방을 놓고, 들킨 뒤에는 도망친다.
세 번째 주인은 모습조차 제대로 묘사되지 않는 투견꾼이다. 그는 검둥이를 혹독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훈련시킨 다음 투견장에 내보낸다. 검둥이는 연달아 싸움에서 이기는 “지지 않는 개”가 되어 살아남는다. “피할 수 없는 싸움을 하게 될 때는 지지 않았어도 슬퍼하라”는 첫째 주인의 가르침에 따라 이기고 나면 긴 울음을 뽑아내지만, 이 소극적인 반항은 상황을 바꾸지 못한다. 나중에 검둥이는 투견장이 단속에 걸린 틈을 타 도망친다.
이후에는 하얀 개 흰둥이와 어린이 미래가 등장한다. 그들은 첫째 주인보다도 가난하지만, 마음이 넉넉하여 지친 검둥이를 따뜻하게 보살펴준다. 검둥이를 가르치거나 지시하지 않는다. 검둥이 역시 그들을 주인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들과 지내는 동안 파지 모으는 일을 돕거나 여가를 함께 보내면서 마음을 추스른다. 방학 같은 이 시간은 길지 않지만, 검둥이에게는 첫째 주인만큼이나 소중한 것이 된다.
앞서 언급한 대로, 작가 윤필은 의인화한 동물을 내세운 작품을 여럿 그렸다. 그가 소개한 야옹이, 청둥이, 흰둥이는 모두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지만 검둥이는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다. 친구도, 식구도 없이 매번 새로운 역할과 이름을 부여하는 주인 사이를 전전한다. 운명인지 장난인지, 그의 삶은 매번 배경이 바뀌어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돈을 빌미로, 혹은 목숨을 빌미로 검둥이를 이용하는 인간들은 잔혹하다. 검둥이는 계기가 생길 때마다 서둘러 자리를 옮기지만 비슷한 문제가 발생하면 같은 선택을 반복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강자가 약자를 소모하여 이득을 취하는 모습은 익숙하다. 하지만 인간이 동물을 착취하는 모습은 궤가 조금 다르다. 윤필은 강자에게 인간의 형상을 부여하고, 의인화된 동물은 약자로 설정한다. 작중에서 의인화된 동물-야옹이, 흰둥이, 청둥이 등-은 노동 강도에 비해 벌이가 적은 현장에 투입된다. 먹이 사슬 최상층에 자리한 인간이 피식자에 속하는 동물에게 궂은일을 시키고 최소한의 권리까지 침해하는 장면은 강자와 약자 모두 인간으로 설정된 장면보다 효과적으로 절망감을 전달한다. 강자와 약자가 모두 인간이라면 독자는 약자가 이기는 상황을 비교적 쉽게 기대할 수 있다. 역사와 픽션을 통틀어 참고할 만한 사례가 매우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약자가 동물로 설정된 경우에는 강자를 이기고 돌파구를 마련하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그려지지 않는다. 독자 본인이 먹이 사슬 피라미드 최상층에 있고,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고방식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인간 세계의 부조리를 견디며 살기 위해 분투하는 동물의 모습은 여간해서는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은 이미지다.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검둥이는 유일하게 슬픔을 표현할 때에만 소리를 낸다. 그러나 검둥이 목소리에서 슬픔을 읽어낼 줄 알았던 첫째 주인은 죽고 없다. 목소리를 잃은 흰둥이는 같은 견공으로서 검둥이의 좋은 파트너가 될 수도 있었으나, 둘의 관계는 발전하지 못한 채 흐지부지되고 만다. 야옹이, 흰둥이, 청둥이는 서로 연대하여 가난의 고단함을 나누고 견디어낸다. 그러나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는 검둥이에겐 누구와 연대할 기회가 없다. 매번 그에게 주어지는 선택지는 둘 뿐이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새 주인을 따라갈 것인가, 아니면 소중히 여기는 것을 포기할 것인가.
검둥이의 새 주인들은 약한 존재를 제압하는 것으로 이득을 취한다. 육지에서 만난 주인과 함께하는 검둥이는 시키는 대로 무엇이든 해내야만 하는 존재다. 사회 이면에서 불법과 폭력 행위를 거드는 도구,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약자를 위협해야 하는 맹견이다. 검둥이는 새 주인들이 시키는 일을 썩 잘한다. 때로는 첫째 주인에게 배운 것을 잊지 않고 새 주인의 잔혹함에 반발하기도 하지만, 검둥이가 불법에 조력했다는 사실은 영영 달라지지 않는다. 검둥이의 독백이 얼마나 절절하던 그것은 울리지 않는 메아리다.
검둥이는 흰둥이와 미래를 떠나 네 번째 주인을 따라간다. “그 사람에게서는 지금까지 맡아본 적 없는 잔인하고 무서운 냄새”가 난다며 자신의 미래를 예감하면서도, 이전과 같은 선택을 반복한다. 검둥이가 첫째 주인의 가르침과 마지막 소원을 잊는 일은 없을 듯하지만, 그렇기에 더욱더 외로워질 것이다. 몸은 강자의 세계에 속해있으나, 마음은 흰둥이와 미래와 첫째 주인과 함께 약자의 편에 있으니, 시작부터 그러했듯 어디에도 제대로 적응하지 못할 것이다. 역지사지만으로 검둥이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까? 검둥이를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면,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