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혹시 만화잡지 [팝툰]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씨네21] 편집부에서 야심차게 준비한 ‘성인 지향’의 만화잡지였던 [팝툰]은, 웹툰에 그다지 적응하지 못했던 나에게 있어서 연재만화와 재회하게 만들어 준 고마운 매개였다. 빠르게 홍보물을 받아보지 못했던 탓에 월간으로 전향한 뒤에야 접하긴 했지만 늦지 않게 강경옥의 <설희>, 한혜연의 <애총>, 조경규의 <팬더 댄스>와 <차이니즈 봉봉 클럽>, 토마의 <속 좁은 여학생>등 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바스티앙 비베스의 <그녀(들)>을 연재로 보는 경험은 덤이었다.) 물론 당시의 나에게조차 [팝툰]의 창간과 연재는 무모한 시도로 보였는데, 그러한 기우는 너무나 운명처럼 현실이 되었다. (아마도) 2010년 3월에 [팝툰]은 무기한 휴간이라는 메시지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흩어졌다.
[팝툰]이 마지막을 향해 달리고 있었던 2009년 11월, 한 만화가 연재를 시작했다. <부부소소사>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 만화는 둥글면서 정감 가는 그림, 낭만적이면서도 현실을 단단히 딛고 일어서 있는 듯한 서사의 터치, 무엇보다 결코 응원을 멈추지 못하게 만드는 부부의 캐릭터로 순식간에 나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누가 봐도 자전적인 이야기인 것이 뻔한 이 만화에서는, 자신이 겪은 역사를 지나치게 멀거나 혹은 지나치게 가까이서 그리지 않겠다는, 오직 ‘있었던 그대로의 자신’을 그리겠다는 어떤 뚝심이 느껴졌다. 덕분에 <부부소소사>는 [팝툰] 다음 호를 기다리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로 금세 편입되었다. 물론, 아시는 바와 같이 [팝툰]은 연재를 시작한 지 5개월 후에 막을 내리게 되지만 말이다. 그 후 몇 년이 지나도 <부부소소사>라는 만화를 잊지 못하며 지냈는데, 정작 <불편하게 행복하게>가 <부부소소사>와 같은 작품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꽤 긴 시간이 지난 뒤의 일이다.
나중에 완독하게 된 <불편하게 행복하게>, 그리고 그 뒤를 잇는 홍연식 작가의 <마당 씨의 식탁>은 (어떤 면에서) 교활한 작품들이다. 이 두 작품은 소소한 삶의 행복을 그릴 것 같은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작품을 따라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주인공의 침잠된 내면을 강렬히 드러내버리기 때문이다. 이 외피가 만드는 무장해제의 힘 덕분에 내실과 마주한 독자들은 대비도 하지 않고 그 침잠되는 심연 속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간다. 이 구성이 처음부터 의도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구성에서 강렬한 낙차를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게 만드는 어떤 신비한 힘이 느껴진다.
그렇다. 나는 홍연식의 작품에서 항상 낙차를 느낀다. 특히나 <불편하게 행복하게>에서 자주 등장하던 그 뮤지컬씬 덕분에 그렇다. 뮤지컬씬은 대체로 부부에게 닥쳐온 어떠한 고난이 어떠한 해결을 이루어낸 후에 나타난다. 이 장면들 안에서 두 부부와 부부가 기르는 동물들은 노래의 가사와 함께 공중을 떠다닌다. 대부분의 가사는 현재의 행복을 노래한다. <불편하게 행복하게>에서 ‘행복’이라는 결과는 중력을 잊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그들이 다시 땅에 발을 딛게 되면 어김없이 고난은 밀려온다. 땅의 고난과 부유의 행복, 이 둘에서는 당연히 어떠한 낙차를 느낄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이 작품이 ‘땅’의 이야기이기에, 그 낙차의 감각이 더욱 강렬하다. ‘주거’라는 한계점에서 시작한 이 이야기는 점차 자신들이 기거하게 된 ‘산’이라는 영역에 대한 의식으로 확장된다. 홍연식은 이 확장을 단순히 행동반경의 확장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부부가 산속의 집이라는 환경에 적응할수록 그들의 감각 역시 산의 형태를 따라 확장된다. 특히나 남편인 연식은 내적 변화들을 산의 요소들과 호응하며 표출하는데, 이 시점에서 산과 연식은 완전히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가 된다. 그들이 공간적으로 산이라는 ‘땅’에 귀속되어 있음은 (우리나비 그래픽노블판) 548~549p의 전면 컷으로 확실히 묘사된다. 산의 공사가 진행되는 공간을 부감으로 나타낸 이 전면 컷에서 부부의 집은 집이라는 오브젝트가 아니라 끌어안은 부부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결국 <불편하게 행복하게>가 낙차의 만화라고 규정한다면 이 작품은 근본적으로 ‘0’을 지향할 수밖에 없게 된다. 아무리 부유의 행복을 갖는다고 해도, 인간이 땅에 귀속되어 있는 이상 그 지속력은 미약하다. 하지만 그럼 질문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것을 비극으로 여겨야 하는가?’ 글쎄, 그래도 딛고 있을 땅이 있다면 언젠가는 부유감을 느낄 수 있다. 땅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안전장치이다. 다시금 행복의 부유가 도래할 때 까지 땅 위에 단단히 발을 붙이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말미에 동물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다른 뮤지컬씬과 달리 땅에 단단히 발을 붙이고 있는 이 장면은 여타의 장면처럼 황홀감을 주진 않지만 깊은 연대의 안도를 부여한다.
다만 이 모든 전제에선 한 가지 의문이 발생한다. 만약 ‘땅 위’가 아니라면 어떻게 되는 건가? 그때도 동일한 희망을 가지고 있을 수 있을까? 홍연식 작가의 후속작인 <마당 씨의 식탁>은 마치 이런 의문을 던지고 있는 작품처럼 보인다.
<마당 씨의 식탁>은 <불편하게 행복하게>와 동일한 전제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만화가와 그림책 작가인 마당 부부가 새로운 ‘땅’에 정착하며 시작하기 때문이다. 다만 새 땅에 정착해야 하는 이유 등을 밝히지 않고 빠르게 그 전제만을 재활용한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이 작품은 새 땅에 정착하는 마당 부부의 이야기에 한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 안에는 마당 부부 이외에 다른 한 쌍의 부부-마당의 부모님이 등장한다. 이 두 인물은 모두 각자의 병환을 겪고 있으며, 마당과 마당의 동생인 마루의 실질적 지원을 받아야만 생활이 가능한 것으로 묘사된다. 그런 그들이 기거하고 있는 곳은 지상이 아닌 지하층의 작은 집인 것으로 나타난다. 상기에 가졌던 의문, ‘땅 아래’라는 전제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작품은 주인공 마당과 부모님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조망한다. 마당은 자신의 일을 하면서도 부모님-특히 어머니의 건강을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의 목적은 부모님을 ‘땅 위’로 끌어 올리는 것이다. 그가 다른 어떠한 전제가 아닌 ‘땅의 위’를 거론하는 것은 여러 면에서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마당은 자신이 현재 바라보는 부모님의 삶이, 어떤 면에서는 지하에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혹은 현재의 상태 자체가 그들을 지하에 몰았거나) 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작품 내에서 굳이 인물의 입을 빌어서 설명하지 않지만, 작품은 부모님이 현재 보내고 있는 시간이 바로 지하에서의 시간과 동일한 것처럼 다루고 있다.
그래서인지, <마당 씨의 식탁>에선 좀처럼 중력으로부터 해방되는 뮤지컬씬이 나타나지 않는다. 부상할 수 없는 것이다. 지상에 있는 마당마저, 지하에 있는 부모님과 결부되어 있기에 쉽게 떠오르기 어렵다. 도리어 마당은 건강에 대해 염려하며 그것이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에게 건강의 부재는 곧 지하의 삶으로 연결된다. <불편하게 행복하게>가 지상에 발을 딛고 중력을 잊는 시간을 기다리는 작품이었다면, <마당 씨의 식탁>은 반대의 에너지에 올라탄다. 지상에 있는 마당이 지하로 향함을 경계하고 있다.
작 중에서 마당의 분투는 전부 ‘가족의 영역(땅)’을 지키기 위한 노력으로 귀결된다. 그가 지하의 삶을 경계하는 것도, 부모님과의 충돌을 피하려 하는 것도 모두 그러한 의식의 확장이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와중에 그가 보는 것은 어머니의 요리에 대한 기억들이다. 초기에는 마당이 어째서 어머니의 기억을 요리에 한정짓고 있는지 나타나지 않지만, 그는 어머니가 만들어낸 ‘식탁’의 기억들을 조립해냄으로써 어머니가 가족의 영역을 지켜왔음을 깨닫는다. 마당의 분투 내에도 같은 방식이 있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어머니의 방식을 모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관계를 깨달은 마당은, 어머니 역시 동일한 방식으로 수호해왔음을 완전히 깨닫는다. 그는 자신이 지키려고 했던 것을 바라봄으로써 어머니가 지키려 한 것 까지도 이해하게 된다.
<마당 씨의 식탁>은 진짜 지키는 행위가 무엇인지를 마당 스스로 환기하는 기나긴 여정을 다룬 작품이다. 이 모든 관계를 깨닫기 전 까지, 그는 차단만이 영역을 수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부모님과 자신들의 ‘영역’이 충돌하지 않는 것만을 그리도 주장한 이유가 된다. 하지만 마당은 어머니와의 관계를 되짚으며 차단이 발생시키는 상처들을 목도한다. 어머니가 지하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어머니 당신이 직접 선택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했던 차단들의 결과임을 이해한다. ‘지상의 삶’과 ‘지하의 삶’이라는 규정 안에서, 마당 자신이 지하의 삶을 만드는데 일조했음을 깨달은 것이다.
<마당 씨의 식탁>은 “밥... 먹을까요?”라는 대사로 대단원을 갖는다. 자신과 어머니의 역사를 모두 환기해낸 마당이 영역을 지키는 행위로써 어머니의 방법을 선택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물론 마당은 이것이 훨씬 '유효한 방법'이기 때문에 선택한 건 아니다. 그보다도 어머니에게서 배운 것, 자신이 알고 있는 한 가장 따뜻한 방식의 지킴을 실천하려는 것이다.
이 작품을 보는 내내 마당이 표현하는 ‘두 세계’가 행성의 모습을 하고 있음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평행한 두 행성보다는 지면을 기반으로 상하로 나눠진 모습이 더 작품이 가진 공간 감각에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을 덮고 난 뒤, 나 자신이 얼마나 차가운 사고를 하고 있었는가를 인지하고 부끄러워졌다. 지금의 나는 두 세계를 평행하게 그린 것은 작가 홍연식이 가진 따뜻함의 발로라고 주장하고 싶다. 자신의 선의를 폄하하지 않고, 자신의 악의를 미화하지 않는 것이 자전을 이야기로 만드는 사람이 가져야할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나에게 있어, 홍연식의 만화는 언제나 높은 안정감을 준다. 무엇보다, 그가 얼마나 깊으며 따뜻한 사람인가를 계속 상기시켜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