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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노블로 다시 태어난 톨스토이의 고전

모든 위대한 예술가와 사상가들이 그렇듯 톨스토이의 삶과 사상과 문학 역시 분리될 수없이 밀접했다. 귀족가에서 태어난 톨스토이는 젊을 적 농민의 계몽에 실패한 후 노름과 색욕에 빠졌고, 이는 이상주의, 금욕주의를 추구하고자 하는 그의 사상과는 괴리가 있는 것이었다. 현실의 욕구와 정신적 이상 사이의 모순에서 찾아오는 정신적 고통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예술의 원동력이 되었다.

2018-12-21 박근형



모든 위대한 예술가와 사상가들이 그렇듯 톨스토이의 삶과 사상과 문학 역시 분리될 수없이 밀접했다. 귀족가에서 태어난 톨스토이는 젊을 적 농민의 계몽에 실패한 후 노름과 색욕에 빠졌고, 이는 이상주의, 금욕주의를 추구하고자 하는 그의 사상과는 괴리가 있는 것이었다. 현실의 욕구와 정신적 이상 사이의 모순에서 찾아오는 정신적 고통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예술의 원동력이 되었다. 
톨스토이의 문학은 그의 이러한 고뇌의 극복 과정을 담은 <참회록>(1882)을 기준으로, 사실적 묘사 중심의 전기 문학과 종교적 색채가 짙은 문학으로 나뉜다. 그는 <참회록> 이후 1880년대에는 그의 종교적 사상(톨스토이주의, 기독교적 무정부주의)과 삶에 대한 교훈을 전파하기 위해 민중 계몽적인 단편들을 썼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인간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이반 일리치의 죽음>, <주인과 하인>과 같은 아름다운 단편들이 이때 태어났다. 톨스토이는 사실적인 묘사와 계급적 배타성을 배제하여 도덕적 교훈을 담은 이 단편들을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자 하였다.

이 중 <인간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는 인간의 탐욕에 경고를 보내는 우화로 익히 알려져 있다. 프랑스의 만화가 마르탱 베롱은 이 작품을 그래픽노블로 옮겨 2017 앙굴렘국제만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하였다.
한 작품이 다른 예술가의 손을 거쳐 재탄생할 때, ‘재해석’이란 원작의 어떤 가치를 유지·변형·소거할지 결정하는 일일 것이다. 교훈담의 성격이 강한 원작에 비하여 마르탱 베롱은 원작의 큰 줄거리와 등장인물, 메시지를 유지하면서 19세기 러시아 농촌의 생활상의 디테일과 많은 대사와 감정묘사로 캐릭터의 생동감을 살렸다. 이 글에서 참고한 원작이란 ‘일송북’ 출판사의 <톨스토이 단편선>(김순진 역, 2012)에 실린 <인간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임을 미리 밝힌다.


마르탱 베롱은 서사의 큰 줄기는 유지하되 여러 부분에서 각색을 거쳤는데, 이 중 텍스트 없이 전개되는 페이지들을 통해 작품의 호흡을 조절하고 흐름을 환기하였다.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부분은 대사가 생략된 채 빠르게 진행하고, 풍경과 행동의 연속으로 이어지는 장면에서는 보다 분위기와 상황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였다. 엄격한 고용인 때문에 시달리던 바흠이 그를 죽이는 꿈을 꾸는 장면을 새롭게 추가하였으며, 원작에서는 한 줄로 요약된 바시키르로 향하는 여정은 10페이지 가량으로 늘어나며 아름다운 풍경으로 채웠다. 지주의 땅을 공동으로 매입한 후, 마을 사람들이 어떻게 경영할지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각자 땅을 나누어 사는 과정을 표현한 장면의 연출은 이 작품의 백미이다. 이 장면에서 유쾌하게도 인물들은 텍스트 대신 그림 기호로 대화하므로, 독자들은 각 컷의 상황과 말풍선의 그림 기호를 통해 사건의 전개를 추론해야 한다.


바흠이 죽음에 이른 것은 그의 내부의 끝없는 욕구가 근본적인 원인이지만, 원작에서는 ‘악마’가 등장하여 바흠을 유혹한다. 그러나 바흠은 만족을 모르고 욕망을 계속 좇는다. 이 ‘악마’는 인간 근원의 악을 비유하기도 하지만 기독교에서 칭하는 예수·천사 등의 존재와 대비되는 존재로서의(인간 내부가 아닌 외부에 존재하는) 악마로 봄이 더 정확할 듯하다. 마르탱 베롱은 악마와 같은 신비로운 존재를 등장시키는 대신, 농촌의 일상적이고 사실적인 묘사들과 대사, 상황들을 추가했다. 이 같은 설계는 독자로 하여금 이야기를 이미지로 구체화되는 차원에서는 소재와 배경을 ‘19세기 러시아 농민’에 대한 것으로 특정하면서, 동시에 종교적 색채를 덜어냄으로써 주제와 메시지를 보다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것으로 인식케 한다.

마르탱 베롱이 중간에 톨스토이의 다른 단편들을 연상케 하는 장면을 삽입한 것 역시 흥미로운 부분이다. 원작 소설에서는 바흠이 눈보라 때문에 고역을 치르는 일은 등장하지 않지만 그래픽노블에서 바흠은 지주의 땅을 매입하기 위해, 부유한 동서에게 돈을 빌리러 도시로 향한다. 그는 폭설이 내릴 거라는 소식을 여러 번 듣지만 개의치 않는다. 끝내 바흠은 눈에 파묻힐 위기에 처하고 지나가던 이들에게 구조된다.


톨스토이의 단편 <주인과 하인>의 여관 주인 바실리는 점찍어둔 숲을 저렴한 값에 구입하기 위해, 하인 니키타와 이웃 마을로 출발한다. 날씨는 점점 고약해져 사람들이 길을 말려도 바실리의 마음속에는 돈 벌 궁리만 가득이다. 눈보라에 고립되고 나서야 상황을 절감한 바실리 니키타를 버려두고 인가를 찾아보려 하지만, 실패하고 하인이 있는 자리로 돌아온다. 니키타는 얼어 죽어가는 중이었다. 생명 앞에 재물은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깨달은 바실리는 죽어가는 니키타를 자신의 몸으로 감싸 안는다. 그가 죽기 전에 들은 것은 신의 부름이었다.

다시 그래픽노블에서, 바흠은 동서에게 무사히 돈을 빌려 땅을 늘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과도한 벌금을 물리는 등, 그가 미워했던 고용인과 똑같이 행동하여 이웃들에게 비난을 받는다. 어느 날 이웃 중 누군가로 추정되는 이가 그의 나무들을 망쳐놓는 일이 일어나고, 바실리는 범인을 잡아 혼쭐 내주고 싶어 한다. 그러나 지나가던 나그네가 그를 만류한다. 나그네는 사람은 함께 살아가야 한다며 한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그 이야기는 매우 짧아 5컷 밖에 되지 않지만 전체적인 맥락이 톨스토이의 단편 <불은 방치하면 끄지 못한다>와 유사하다. 
이 단편에서 사이좋게 지내오던 두 집안은 사소한 일로 싸움을 벌인다. 싸움은 끝없는 소송으로 번지고 두 집안은 경제적으로 기울어간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과실은 돌아보지 않고 상대의 과실을 탓하기에 바쁘다. 이들의 다툼은 사소한 방화사건으로 이어지는데, 작은 불을 끄기보다 추격에 급급하다. 마침내 불은 마을의 반을 태워버리기에 이른다. 
원작과 그래픽노블에서의 사건 순서가 약간 다르기에, 원작에서는 바흠은 나무를 베어버린 일로 마을 사람들과 사이가 악화되지만, 그래픽노블에서는 그 이후 마을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더 이상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달라진 것은 없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바흠은 큰 집을 갖고서도 더 원했으므로. “바흠은 넓은 땅을 가졌으나 좁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셈이었다.”(톨스토이, <톨스토이 단편선>, 일송북, 2012, 344p)

고전은 자체로도 존속하지만 시대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부활하여 그 맥을 잇는다. 고전의 완결성과 보편타당함은 그를 영원하게 하지만 한편으로는 고전에 필적하는 명작이 태어나는 것을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마르탱 베롱은 우화적·종교적 색채를 덜어내고, 사실주의적 디테일을 더하고, 위트 있는 연출과 각색한 에피소드를 추가함으로써 고전에 그만의 색을 불어넣었다. 다른 단편을 인용한 듯한 장면을 삽입한 것은 원작의 주제의식을 확대하여 톨스토이의 사상을 폭넓게 반영하려는 노력이 아니었을까. 
마르탱 베롱은 폭설의 위험을 불사하고 돈을 빌리러 가는 바흠에게, 다른 농민의 입을 빌려 묻는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도시에서 죽어가고 있소?”, “아침에 돌처럼 굳은 말과 함께 발견되어도 좋을 만큼 중요한 일이오?” 원작에는 없던 질문이다.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 앞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톨스토이는 그 질문에 일생 골몰하였다. 과잉 향유하지 않으며, 내 안의 선을 행하는 것이 그가 생각한 이상적인 삶이었다. 바흠의 아내는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길 원했다. 그리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 바흠은 더 많은 부를 원했다. 결국 그가 결국 소유할 수 있는 땅은 그의 시신이 묻힐 자리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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