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담항설
박희정
가담항설은 강력한 힘을 가진 지배자 ‘신룡’의 잔혹함을 충격적으로 드러내며 시작한다. 신룡은 ‘완벽한 신’을 갈망한 인간들에 의해서 탄생했다. 그의 천명은 그가 정한 것이 아니었으며 그는 한 번도 의문을 품어본 적 없는 채로 그 목적에 충실한 삶을 산다. 그러나 권력 유지에 불안을 느낀 선대 왕은 신룡을 죽이고자 계획을 세웠고 가장 먼저 신룡을 지키는 사군자 중 신룡을 부활시킬 힘을 지닌 춘매를 죽인다. 신룡은 ‘감정의 집합체’인 춘매를 잃고 삶의 목적도 욕망도 잃어버린 채 죽은 것과 진배없는 삶을 살게 된다.
그 고통 속에서 신룡을 지배한 것은 분노 이전에 불안이었다. 나는 죽을 수 있는 존재이며, 권력을 욕망하는 인간들이 나를 또 죽이러 올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만든 불안. 그 불안에 대응하기 위해 신룡은 저항의 싹을 봉쇄하는 압도적인 공포로 인간을 통제하고자 한다. 인간을 침묵하게 하고 저항의 의지를 부숨으로써 지배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니 저항이 침묵을 깨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은 당연하다. 침묵을 깬다는 것은 그저 소리 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지배자에게 포획된 언어를 해방해 새로운 의미를 찾는 것이다. 인간은 언어로서 존재와 세상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가담항설의 세계에서 언어가 활용되는 방식은, 그러한 점에서 특히 주목된다.
이 세계에서 힘은 그가 가진 학식의 깊이를 바탕으로 한다. 누구라도 말의 뜻을 이해하고 글로 쓰면 그 뜻에 해당하는 힘을 쓸 수 있다. 이해가 깊어지면 글로 적는 행위 없이도 바로 대상에 ‘각인’을 새겨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강할 강(强)을 새긴 무기는 단단해지고 날카로울 예(銳)를 새긴 칼은 베는 힘이 세진다. 이 힘은 무엇을 파괴하는 속성만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회복할 복(復)을 새기면 부서진 사물 또는 다치거나 훼손된 몸을 되돌릴 수 있다. 무엇을 가두거나(방어결계) 사람의 눈을 속이는 허상을 만드는 힘(허상결계)도 있다. 이것은 언어를 통해 삶을 형상화할 수 있을 때 갖게 되는 영향력에 관한 유비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타인을 상처를 입힐 수도 있고, 반대로 치유할 수도 있다. 언어는 세상을 이해하고 감각하는 우리의 인식 또한 지배한다.
가담항설은 욕망, 마음, 의지, 감정 같은 ‘지식 외’의 요소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할애하는데, 이것은 ‘안다’는 것의 의미를 우리에게 되묻는다. 신룡의 이성을 지키는 ‘지성’인 추국은 ‘감정의 집합체’인 춘매의 죽음 이후 “더 이상 전부를 알 수 없는 몸”이 되었다고 고통스러워한다. 춘매는 ‘인애’를 상징하며, 가담항설은 원칙과 지성과 신의가 인애를 갖출 때만이 인간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이성과 감정이 분리된 것이며 이성의 우위를 말하는 세계관과는 뚜렷이 다르다.
한편 지성을 추동하는 것은 ‘알고자 하는 욕망’이다. 욕망은 어떤 때 생겨나며, 욕망의 추구는 어떨 때 강력해지는가. 결핍을 인지할 때이다. 그리고 그 결핍을 ‘내가 욕망할 수 있다’고 스스로 받아들일 때이다. 세도가이자 권모술수에 능한 이갑연의 오른팔 암주는 의술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쌓고도 한동안 각인을 새길 수 없었다. 두려움에 떨면서 세상의 요구에 순응하는 동안에도 암주에게 욕망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자신을 욕망의 주체로 인식할 수 없었다.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혹은 원할 수 있는지를 탐색해보기 전에 그의 생각은 이미 특정한 형태로 모양 지어졌다. 그것이 바로 권력의 작용이다.
‘여자 장사’ 홍화의 각성은 앎에 관한 또 다른 이야기를 제시한다. 홍화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부당한 이유로 발생한 상실의 고통이다. 상실의 책임은 외부에 있고 삶의 목적은 행복에서 복수로 대체되었다. 상처에 사로잡힌 홍화는 그 목적 이외의 다른 욕망을 들여다보기 두려워한다. 다시 혼자가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직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로 인해 홍화는 자신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홍화가 그 두려움을 넘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았을 때 그는 자신 안에 늘 존재해왔던 ‘용기’를 인식한다.
가담항설이 펼치는 욕망과 마음에 관한 이야기는 나라는 존재가 어떻게 구성되는가, 무엇이 우리의 인식을 가리고 있는가를 묻는다. 이것은 나를 안다는 것의 어려움에 대한 말이기도 하다. 자기 부정을 강요당하는 이들이 자기를 아는 것은 더 어렵다. 그러나 가담항설은 ‘사회의 버림받은 자’들에게 그러한 현실을 뛰어넘을 가능성 또한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가담항설에는 그 ‘버림받은 자’들이 새롭게 자신을 인식하고 바꾸어내는 이야기가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