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나 쉬쉬 할 것만 같던 단어 ‘페미니즘’이 강남역 살인사건과 소설『82년생 김지영』을 선두로 불같이 타올라 2017년부터 대중문화 주류 키워드로 자리잡았다. 가부장제에 의거한 성차별 사회구조가 목숨의 위협이 될지도 모른다는 위협은 수많은 여성들을 거리로 나오게 만들었고, 이어 ‘탈코르셋’, ‘미투 운동’ 등으로 활발한 여성 인권 운동이 온라인과 오프라인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대중문화의 중심인 콘텐츠 업계에도 여성 인권 문제를 언급하는 작품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졌다. 작품 내에서 ‘몰카’ 에피소드를 심각하게 다룬 웹툰도 자주 찾아볼 수 있다 (‘소녀의 세계’, ‘오직 나의 주인님’, ‘공대에는 아름이가 없다’, ‘내 ID는 강남미인’ 등).
대중의 취향과 반응도 변했다. 남자 캐릭터들의 박력을 빙자한 폭력성(손목 잡아 끌기, 확 끌어안기 등)은 이전에는 남성성으로 미화되었지만 이제는 네티즌들의 의해 곧바로 데이트 폭력임이 지적된다. 조금이라도 사회적 약자의 입장을 배려하지 못했다는 여지가 보이면 가차 없이 비판한다. 이처럼 콘텐츠를 심사하는 독자들의 도덕적 기준은 그 어느때보다도 첨예하게 설정되어 있다. 동시에, 작중 에피소드에 한정되지 않고 더 과감하게 대중의 욕구를 채워줄 콘텐츠를 바라고 있다.
네이버에 연재되는 <화장 지워주는 남자>는 대중의 바람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노골적으로 여성들의 꾸밈 노동에 대해 이야기하겠다고 선전포고한 작품이다. 작정하고 메시지 전달용으로 만든 콘텐츠들이 공익 광고성의 진부함을 지우기 어려웠던 것과는 달리 <화장 지워주는 남자>는 흥미진진한 토너먼트 식의 전개를 택했으며, 흔히 생각해내기 어려운 독창성을 녹여내 꾸준한 독자층을 형성했다. 대결마다 각기 다른 주제와 컨셉트를 선정한 참가자들을 통해 우리나라에서 외모지상주의와 여성의 꾸밈노동에 관한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 볼만한 시간을 만들어준다.
1987년에 흔한 이름이 김지영이었던 것처럼, 90년대 생 중에 흔한 이름인 예슬이는 대학만 가면 예뻐지고 남자친구도 생긴다는 미신을 믿으며 하라는 대로 열심히 공부한 인물. 하지만 그런 이야기는 옛날 이야기인 것 같다. 중학생 때부터 예뻐져야 한다는 은근한 압박으로 미디어를 통해 꾸미는 법을 배워 온 이시대 대학생들은 연예인 뺨치는 외모의 소유자들이 되어 있다. 매 화마다 크게 지면을 할애하지 않고도 여성 문화에 가부장제가 미친 요소들을 자연스럽게 묘사하는 것도 이 웹툰이 가진 장점이다.
특히, 초등학생 참가자가 성인의 섹시함을 표현하는 화보에서 전혀 이질감을 느끼지 못하는 대중의 모습과 성인 참가자가 흡사 아동을 연상하는 이미지로 등장하는 모습을 대조적으로 그린 에피소드는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해당 에피소드는 당시 모 아이스크림 브랜드의 광고가 아동의 성 상품화로 논란이 되었던 시기여서 더욱 화제가 되었다.
사실 메이크업을 소재로 하는 웹툰들은 자칫 뻔한 내용을 담기 쉽다. 평범하거나 못생긴 여자 주인공이 메이크업으로 외모의 결점을 커버해서 잘생긴 남자를 만난다는 이야기로 전락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외모지상주의를 비판하려고 시작한 이야기인가 싶다가 제대로 발등 찍히는 전개를 담고 있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화장 지워주는 남자>의 경우 반대로 꽃미남 남자 주인공이 사실 화장을 지우면 얼굴도 못 알아본다는 설정이라 웃음도 놓치지 않는 참신한 미러링을 선보였다.
여타 웹툰에서는 남자 주인공의 재력이나 능력 등의 전적인 도움이 필수로 동반되어야 했다면, <화장 지워주는 남자>에서는 여자주인공의 주도적인 진행과 기획 능력으로 남자 주인공은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여성 캐릭터의 진보적인 역할이 돋보였다. 예를 들면, 경쟁팀의 방해로 빨강 색조 화장품을 쓰지 못하게 된 상태에서 사진을 전공한 예슬이의 아이디어로 사진 기법을 활용하여 기발하게 통과한다는 식이다.
예슬이 이외에도 주희원이라는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는데, 스스로가 꾸밈 노동의 대표 주자로서 많은 여성들의 롤모델이 되는 인물이다. 자신이 서 있는 위치의 딜레마를 깨닫고 극복하려는 노력을 이어간다는 것에서 유명인들이 자신의 위치에서 여성 인권 신장을 도모할 수 있도록 고민할 꺼리를 던져준다. 이외에 다른 등장인물들도 각자의 고민과 딜레마를 마주하는데, 화장과 꾸밈 노동은 남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만족이라는 생각이 결국은 모순이었음을 깨닫는 에피소드가 대표적이었다. 꾸미지 않을 자유가 없는 꾸밈은 결코 자기 만족이 될 수 없다는 메시지로 독자들의 공감을 샀다.
이처럼 <화장 지워주는 남자>는 매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들이 차츰 자신이 처한 불합리하고 모순적인 현실을 직시하며 조금씩 강해진다는 이야기를 차근차근 보여주려는 작가의 노력이 여실히 드러나는 작품이다. 페미니스트들이 잔뜩 등장하는 웹툰이 하위권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페미니즘이 대중문화의 일부로 자리잡았음을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하다. 소위 '페미코인'을 노리고 적당히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작가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가 묻어나는 웹툰이어서 더 관심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