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한 분야일 수록 도전하기 어렵다는 건 다들 익히 알 것이다. 특히나 '마니아'들이 포진한 분야일 수록 더더욱 그렇다. 역사로 예를 들어볼까. 한국사도 유독 인기있는 파트가 있으며, 그 중에서도 세종대왕님과 이순신 장군님 같은 '역사 덕후들의 건들여선 안될 성역의 아이돌' 이 있는 것 처럼. 다른 역사도 마찬가지다. 고대, 중세, 근대와 각 지형별 다양한 역사들 중에서도 유달리 '마니아들이 포진한'시대와 국가가 있으니. '옛날 사람들이 옛날이라고 불렀던' 너무 옛날이라 파도 파도 끝이 없는 고대 이집트가 그렇고, 강대한 문명과 풍부한 자원이 만들어낸 '오스만 제국'이 그렇다.
술탄, 하렘, 사막, 커피……십자군 전쟁과 천일야화를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오스만제국과 관련된 이야기는 넘쳐난다. 역사적으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화려한 문물을 지닌 강대국이란 점도, 그러한 연유로 자료가 풍부하단 점도 인기에 한몫했을 것이다. 창작물 역시 마찬가지다. 다양한 소설과 게임, 영화와 만화에 영향을 끼쳤다. 특히 그중에서도 <술탄과 하렘> 에 대한 이미지는 온갖 창작물에 다채롭게 퍼져있다. 절대 왕권을 지닌 남성 지배자 만을 위한 여성집단이란 점이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한 탓일까? 본래 왕실의 문화가 곧 나라의 문화처럼 알려진다고는 하나 <하렘>에 대한 문화는 다양한 곳에서 나타난다.
한국 만화의 경우 서문다미, 서문다실 작가의 단편집인 <행복한 미식가> 에 하렘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 있고, <하늘은 붉은강가>로 유명한 시노하라 치에의 <꿈의 물방울 황금의 새장> 은 주인공이 이슬람 왕실의 하렘에 들어간 첩실이다. 그리고 지금 이야기하려는 <하렘 생존기> 역시 마찬가지다.
<이 작품은 역사적 사실을 모티브로 하였으나 실제 역사와는 다른 픽션입니다.>라는 경고문구를 단 만화, <하렘 생존기>는 독특한 작화와 어딘지 사람의 감정을 꺼림칙하게 만드는 연출로 유명한 (긍정적 뜻이다.) 오리발 작가의 신작이다. 매력적이고 참신한 소재로 화제가 됐던 <단과 하나> 로 데뷔, <비밀 줄리엣>과 <일생에 변태를 세 번 만날 확률>, <용한 남자>를 연재한 뒤 보인 신작.

술탄이라는 절대 권력자를 모시기 위한 금남의 여성구역, 하렘에서 생존하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할까. 외척세력을 방지하기 위해 점령지에서 납치해온 노예들로 채워진 하렘에서 여인들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가꾸고, 술탄의 아이를 갖기 위해 노력하고, 제 배로 낳은 아이를 술탄 자리에 올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거기에는 선과 악이 없으며 오직 생존만이 존재한다.
보라빛으로 덮힌 <하렘 생존기>의 프롤로그는 화려하게 치장한 두 붉은 머리칼 여자의 대화로 시작된다. 같은 붉은 머리와 녹색 눈동자의 친구였던 두 여자는 원래 어떤 사이였으며, 또 어쩌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된 걸까. 독자들의 궁금증을 유발하며 한 여자는 차를 받아들고, 결국 쓰러진다. 섬뜩하기 그지 없는 상황이건만 자신이 죽인 시체 앞에 눈물흘리는 여자의 모습은 역설적이게도 아름답다.
궁금증을 자아낸 프롤로그를 뒤로 하고, 하렘에 팔리기 위해 납치당한 아름다운 여자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새로 즉위한 술탄을 위해 왕궁 하렘에 새 여자들을 채우고 있으며, 그를 위해 곳곳에서 아름다운 여자들을 납치한 것이다.
'어차피 주인이 바뀌는 것 뿐' 냉소적인 여자와 집에 돌아가고픈 여자, 정신이 나가버린 여자, 다른 여자를 챙기는 여자. 그리고 '상황을 분석하는'여자. 프롤로그의 두 여자 중 하나로 추정되는 붉은 머리 여자는 여자들에게 '탈출'을 제안하는데, 상황 판단과 대범함이 압권이다. 창고의 위생상태와 간수들을 모두 확인한 뒤 치밀한 계획을 세우는데 이는 아래와 같다. 먼저 간수가 오면 전염병에 걸린 것 처럼 군다. 둘째, 다른 간수가 오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멀쩡히 군다. 이를 반복하여 간수들 사이에 의심을 심어놓는다. 다 죽어가는 척을 하다 방심한 간수를 처리하고 탈출한다. 2회만에 이런 긴장감을 선사하기란 쉽지 않다.

무사히 탈출한다고 해서 탈출한 이후에도 모든 것이 순조롭게 돌아가진 않는다. 이 때 작가의 역량이 돋보이는 것은 단순히 그림체뿐만 아니라 한 화에서 캐릭터별 뚜렷한 특징을 독자들에게 각인시킨 후, 바로 다음화에서 이를 뒤집어버리는 것이다. 그저 다정하게 다른 이들을 챙기는 것으로만 보였던 아이의 냉철한 비판을 뒤집어 쓴 비관. 냉소를 뒤집어 쓰고 안정을 영위했으나 진심이 아니었던 여자. 그리고 탈출 계획을 세웠음에도 결국 남아버린 여자. 바로 작품의 주인공인 나스챠다.
나스챠는 스스로 말한 것 처럼 영리하고 아름답다. 혼자 남아 남자들에게 둘러쌓인 위험한 상황에서도 차분하게 계산 된 행동을 선보인다. 일부러 죽이지 않고 놔둔 남자를 희생양 삼아 도망간 여자들에게 쏠린 주의를 돌리고, 자신의 죄 역시 줄인다. 본래 목숨이 걸린 일에서 냉철해지기란 쉽지 않은 일인데도,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저울질하며 상황을 조종한다. 희생양인 남자가 바로 이해할 수 없도록 고향의 언어를 써 자신의 말을 이해한 집단의 우두머리가 희생양 남자를 즉결처분 하도록 만들어 증거 인멸까지 완벽히 끝낸다.
암투와 모략이 가득한 하렘에서 나스챠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결국 홀로 바다를 건너게 된 나스챠. 앞서 보여준 영리함 덕택에 독자들은 나스챠를 향한 신뢰를 쌓았지만 나스챠는 어리고, 왕궁은 평생을 생존을 위해 타인을 이용한 사람들로 가득한 곳이다. 과연 그런 곳에서 나스챠가 어떻게 살아남을지, 모두가 적으로 가득한 하렘에서 어떻게 '친구'를 만나고 또 배신당하게 되는지가 기대된다. <하렘 생존기>는 다음웹툰에서 매주 일요일에 연재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