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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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준지의 공포세계

2020-08-04 김하림



이토 준지의 공포세계


  이전에 살던 방식과 조금 다르게 살고 있는 2020년도 절반이 지났다. 작년 이맘때, 여름 휴가계획을 짜며 즐거운 고민을 했는데, 올해에는 생소하기만 하다. 스스로 위안을 하며 휴가비 아끼는 샘치고 휴가여행 대신 주말이면 서점을 카페 가듯이 들리고 있다.

  우리 동네 서점에는 만화책 코너가 따로 있는데, 별도의 공간처럼 꾸며져 있어서 만화책에 둘러싸인 형세라 어릴 적 꿈이었던 만화방 주인인 된 것 같은 대리만족을 느끼게 해준다. 일반 서적은 서서 읽기가 가능하나, 만화책은 비닐 랩으로 봉해져 있어 불가능하다. 그러다 보니 좋아하는 만화작가의 신작이 나오면 구매를 하곤 한다. 최근 만화책 코너 입구에 배치되어 있는 선반에 신간도서로 나온 도서 중에 눈길을 잡은 도서가 있었으니, 일본 공포만화를 대표하는 작가 <이토 준지의 단편집 BEST OF BEST>이다.

△ 그림1. 2000년대 만화잡지에서 연재되었던 이토 준지 작가의 단편 모음집


 이토 준지 작가의 단편집은 판형 사이즈부터 눈에 띠었다. 기존 일본 만화 단행본 판형이라 하는 B6(128*182mm)나 한국만화나 웹툰 출판만화 사이즈인 A5(148*210mm)가 일반적이다. 그보다 더 큰 사이즈가 마블이나 DC코믹스와 같은 그래픽 노블 만화는 출간 판형이 B5(182*257mm)로 출판되고 있는데, 이토 준지 단편집이 같은 사이즈였다.
거기다 누가 봐도 이토 준지 작가의 화풍이 느껴지는 강렬한 이미지이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거기다 이유를 더 달자면 여름과 찰떡궁합인 공포 만화이기 때문이다.

이토 준지의 공포세계
  공포만화하면 바로 떠오르는 작가가 바로 이토 준지이다. 그의 작품은 으스스한 분위기와 불안함이 가득한 눈동자, 공간 자체도 공포의 대상으로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흔히 요괴만화의 대가라 불리는 <게게게의 기타로> 미즈키 시게루 작가와는 다른 노선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에서는 괴담, 저주, 오컬트, 괴이 현상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특히 1998년에서 1999년까지 출판사 소학관의 월간 만화잡지인 <빅코믹 스피리츠>에서 연재한 <소용돌이>가 그의 대표작으로 영화, 애니메이션화 된 작품이다. <소용돌이>는 저주 받은 어느 마을에서 일어난 괴상한 현상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소용돌이 마크가 마을의 곳곳에서 등장하고 장소가 아닌 사람들에게서도 소용돌이 마크가 나타나게 된다. 알 수 없는 공포 그 자체에 인간이 먹혀버리는 과정을 이토 준지 색채로 묘사되었다. 이 작품을 읽고 난 뒤 소용돌이 마크에 눈길을 피하는 후유증이 있다 할 정도로 묘한 공포감을 준 작품이다.

  단편집에서는 <아미가라 단층의 괴기>가 <소용돌이>와 유사한 스토리 전개를 보여준다. 거대 지진으로 인해 거대한 단층이 생긴 어느 마을에 외부인들이 모여든다. 단층은 사람 모양을 한 수많은 구멍이 뚫려 있는 불가사의한 형태였던 것이다. 이곳을 찾아든 사람들은 자기 체형과 같은 구멍을 TV 중계에서 보게 되어 찾아왔다고 한다. 단층에 도착한 사람들은 자기 몸과 같은 사이즈의 구멍을 찾게 되면 홀린 것처럼 그 구멍에 다들 들어가게 된다. 집단 체면에 걸린 군중의 실종에서 끝나지 않는다. 지진으로 사람 모양이었던 구멍은 온데간데없이 없어지고 형언할 수 없는 모양으로 바뀐다. 여기서 독자는 그 구멍을 보며 상상을 통해 이토 준지 작가가 만들어낸 공포세계에 빠져들게 된다. 직접적인 두려움이 아닌 구멍에 들어간 사람들의 불행과 고통에 공감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독자의 상상력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구멍 속을 들어다 본 조사단의 눈을 통해 그 속에 갇힌 비틀어진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끝을 낸다. 독자 각자가 그려낸 공포의 존재를 실제로 보여주는 식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작가 본인이 이야기의 주도권은 놓지 않겠다는 의사 표명이라고 볼 수 있다.

△ 그림2. 단편 [아미가라 단층의 괴기]에서 사람 모양을 한 구멍에 홀린 듯 들어가는 사람들

 

 단편 <아미가라 단층의 괴기>에서의 인간 모양을 한 구멍에 홀린 듯 사람들이 빨려 들어간다는 점은 어떠한 인과관계가 없는 비과학적인 현상이라고 한다면 공포장르라고 정의내릴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꾸며진 이야기에 두려움, 공포, 징그러움 등과 같은 감정이 일어난다. 그것은 이토 준지 작품의 공포 세계는 인간의 무의식을 훑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모양을 한 그림자 같은 구멍에 빨려 들어가는 모습은 인간의 사고와 행위가 구조의 법칙에 종속된다는 구조주의적 관점을 비유하고 있다. 단층의 구멍은 처음에는 각자 인간에게 맞는 사이즈 맞춤형 의상과 같은 존재였다가 점차 그 의도를 잃고 은폐하고 왜곡하는 이데올로기로도 해석될 수 있다. 그의 세계에서 나타나는 이(異)현상은 현실 사회의 거대 담론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토 준지가 재해석한 작품
  이토 준지 작가는 독특하게 코미컬라이즈에도 참여하였다. 대표작은 다자이 오사무 작가의 사소설로도 분류되는 [인간실격(1948)]을 출시하였다. 주인공인 요조는 방탕한 생활과 여성편력, 술, 약물, 좌익사상에 빠지며 스스로를 나락으로 던지는 인물이다. 텍스트로 읽었을 때는 요조와 세 명의 여인의 치정극과 염세주의가 전반에 깔린 작품이라고 생각했는데, 이토 준지의 손을 통해 재해석된 <인간실격(2017)>에서는 새로운 작품이었다. 요조의 절망적인 심리가 이토 준지 작가의 세계관에 의해 공포 정서로 극대화 되었다.

  <이토 준지 단편집 BEST OF BEST>에서는 일본 탐정소설 대표작가인 에도가와 란포의 소설 [인간 의자]와 [이 세상 밖의 사랑] 두 편을 만화화 하였다. 그 중 <인간 의자>는 가구 공방을 들린 한 여성에게 오래된 의자에 얽힌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풀어내는 <인간 의자>는 욕망의 등가교환법칙을 그려낸 작품이다. 의자에 기생하며 사는 한 남자는 작가 지망생인 여성의 창작 활동을 돕는 대신 여성은 의자 인간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기브 앤 테이크 원칙이 존재한다. 현실적 관점에서 <인간 의자>는 꿈을 가진 여성들을 노리는 의자 인간의 스토킹 행위로 인한 불안한 정서를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해당 작품은 썩 유쾌하지는 않다. 하지만 이런 불편한 감정은 원작 소설 기반으로 전개하였기 때문에 어느 정도 허용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이토 준지 작가의 이야기 주도권은 이 작품에서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저주가 얽힌 인간 의자가 또 다른 소설가 지망생인 여성의 집에 배달이 되고 그 의자는 꼬물거리며 마지막 장면을 장식한다. 의자를 배달한 배달원 두 명이 있지만 결국 그녀의 운명은 비극적인 엔딩을 맞이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 그림3. 좌) 욕망의 등가교환의 법칙을 표현한 [인간 의자]의 표지 / 우) 마지막 장면



이토 준지 작품에서 해피엔딩이란
  이토 준지 작가의 작품에서 엔딩은 거의 대부분 열린 결말이지만, 결코 해피엔딩을 기대할 수는 없다. 주인공이 살아남는 것이 공포만화에서 그나마 해피엔딩이라 할 수도 있겠다. 공포만화 장르에서 스토리는 원점에서 시작해서 마이너스로 점점 흘러간다. 이야기의 정점이라 하는 부분은 마이너스 곡선이 심해 바다의 바닥을 찍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그런 연유로 공포만화의 가장 긍정적인 부분은 이야기 시작점인 0의 단계라고 볼 수 있다.

  그럼, 이토 준지의 공포세계에서 클라이맥스는 마지막 컷이라 할 수 있다. 결정적 장면은 없다. 그렇다고 결론을 확실하게 내리는 것도 아니지만, 마지막 장면이 일어나기 딱 1초 전의 증거 사진과 같은 형태로 남겨진다. 마지막 컷 생략은 작가와 독자의 암묵적인 룰을 통해 완성된다. 마지막 장면까지 주도권은 작가인 이토 준지가 이끌고 왔으나, 최고의 장면이자 공포의 결정체는 독자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공포의 깊이에 따라 만들어지는데, 이 점이 이토 준지 월드의 최고의 묘미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