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진이 사나워>-“작가님 못생긴 거 못 그리죠.”
비평가로서 가장 두려운 순간은 작품을 사이에 두고 독자와 괴리가 생길 때이다. 끝까지 나의 평가를 관철 시킬 수 있을까. 흥행한 작품이 좋은 작품이라 생각이 들지 않을 때 그 고민은 깊어진다. 물론 흥행과 반드시 작품성이 반드시 비례한다는 법은 없다. 그러나 왜 인기가 있는지 설명할 수 없으면 정말 난감해진다. <일진이 사나워>가 딱 그런 순간이다. 군데군데 연출 미흡을 보면 실소가 나오면서도 네이버웹툰 월요일 조회순 19위라는 기록을 생각하면 분명 놓친 부분이 있을 거란 불안감이 엄습한다. 단평하자면 Ylab이라는 브랜드를 생각하면 아쉽고 신인 작가라 생각하면 대단하다.
예쁘고 공부 잘하는 ‘평범’한 학생 차유정에게 ‘갑자기’ ‘모델급 비율의 미남’ 일진 도준혁이 접근한다. 도준혁은 다짜고짜 차유정에게 사귀자며 겁박하고 이를 계기로 전혀 안 맞는 둘이 갑자기 사귀면서 ‘헤프닝’이 벌어진다. 왜 잘 나가는 일진이 평범한 학생에게 다짜고짜 사귀자고 하는가?’라는 호기심으로 2화를 누르게 된다. 그러나 그 호기심의 대답은 무려 1년 6개월 만인 74화에 도착해서야 드러난다. 일진이라던 도준혁은 알고 보니 영화 「<신세계」(2013) ‘골드문’과 같은 기업형 조직 ‘CB그룹’의 후계자였고, 후계자 수업으로 청부살인을 수행하던 중 차유정이 명단에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차유정은 어릴 적 우연히 같이 논 아이었다. 그는 차유정을 보호하기 위해 다짜고짜 사귀자고 한 것이다. 차유정의 아버지는 MH기업의 대표로, 라이벌 기업에서 MH기업 때문에 막대한 손실이 일자 CB그룹에 살인 청부를 의뢰한 것이다. 이를 안 도준혁은 타 조직과의 문제를 혼자 처리하는 조건으로 차유정을 보호해줄 것을 CB회장이자 아버지에게 딜을 한 것이다. 일진 연애물인 줄 알았던 작품이 알고 보니 기업 간 암투가 난무하는 범죄 느와르(?)이었음을 알리기까지 작품은 참으로 오랜 방황을 한 흔적들이 역력하다.

핍진성(逼眞性)이라는 말이 있다. 쉽게 얘기하자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납득할 수 있는 정도’라고 풀어볼 수 있다. 어떤 이야기가 핍진성이 높다는 말은 그 이야기가 구축한 세계관이 탄탄해서 독자가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라 보면 된다. 현대극의 경우 별다른 설명이 없어도 우리는 현실의 배경지식을 작품 안에 녹여서 이해한다. 그러나 판타지나 SF처럼 아예 현실과 동떨어진 배경이라면 작가는 세계관을 이해할 수 있는 보충 설명을 녹여 핍진성을 높여야 한다. 가령 <포켓몬스터>에서 직접 사람이 싸우면 될 문제를 굳이 동물들 학대해 대신 싸우게 하는 이유나 <유희왕>에서 초국적 기업 ‘카이바 코퍼레이션’의 대표이사 카이바가 고작 카드게임에 인생을 거는 이유가 납득되는 것은 작품 안에 충분히 핍진성을 쌓았기 때문이다.
<일진이 사나워>는 핍진성을 쌓는 과정이 없이 CB그룹이라는 범죄 조직을 등장시키면서 붕괴한다. 일진과의 연애라는 점에서 지난 글인 <일진에게 찍혔을 때>를 예를 들면 일진 지현호가 평범한 학생 김연두와 우연히 엮이고 오해와 사과를 거듭하다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는 귀여니류의 ‘인소’라는 경험이 깔려있기 때문에 별 다른 설정 없이 이해가 된다. 물론 그 이해의 범위는 ‘인소’라는 장르 안에서 허용된다. 그러나 <일진의 사나워>의 경우, 기업형 범죄조직 CB그룹의 등장을 불안감을 조장하는 서스펜스로 활용했고, 기업형 범죄조직은 ‘인소’라는 상식을 벗어나기 때문에 설명이 필요했다. 즉, CB그룹이라는 거대한 세계관은 처음부터 설명했어야 했지 천천히 풀어낼 소재가 아니었다.
‘무서운 겉모습, 스스로 자각도 못 할 정도로 난폭함이 몸에 밴 남자 주인공이 평범하지만 솔직한 매력을 가진 여자 주인공에게 접근하며 벌어지는 해프닝’ 입니다. 이제는 많은 사람이 알고 있긴 하지만, 옛날엔 남자답다고 받아들여졌던 ‘강압적인 태도’는 나쁘다고 분명하게 말하는 순정 만화를 만들고자 합니다. 잘 해낼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1)
강환영 스토리작가의 인터뷰에서 ‘해프닝’, ‘강압적인 태도’, ‘순정 만화’라는 키워드가 눈에 들어오는데 정황상 기획 의도는 데이트 폭력에 저항하는 여성을 담은 순정 만화였던 것 같다.(작품에서 묘사된 적은 없으나 제목에서 유추가 가능한) ‘일진’이라는 단어에서 우리는 ‘익숙한’ 일진을 떠올리게 된다. 14화에 ‘CB 도준혁님’이라는 명명이 등장하기 전까지 도준혁은 일진이라는 역할기대로 폭력적인 모습과 친절한 모습을 번갈아가며 차유정을 대했고, 차유정은 그런 도준혁을 오해하고 사과하면서 동시에 잘못된 데이트 폭력을 지적했다. 이 단짠단짠의 반복은 이미 <치즈인더트랩>의 유정을 통해서 충분히 익숙해진 스토리전개였다.
그렇기 때문에 CB그룹이라는 범죄조직은 충분한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었다. CB는 대체 어느 정도 규모이기에 대낮에 거리 한복판에서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납치하는 걸까. 차유정은 평범한 고등학생이라 했는데 그 여자애가 뭐라고 CB라는 대기업에서 못살게 구는 걸까. 분명 주인공은 ‘일진’이라고 했는데 고작 고등학생이 전문 경호원들을 주먹 한 방에 쓰러뜨릴 수 있는 걸까. 경찰을 왜 등장하지 않는 걸까. 그 와중에 토성그룹은 또 뭐하는 기업일까. 친구(도준혁) 때문에 아들(반미르)이 폭력사건에 휘말려 병원에 입원했는데 아버지는 왜 이렇게 침착한 걸까? 갑자기 또 등장한 MH기업은 뭘까?
CB 그룹이라는 (알고 보니) 가장 중요한 토대를 다지지 않았기에 현실에서 핍진성을 끌어와야 했으니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상황으로 변질된 것이다. 게다가 강압적인 태도는 나쁘다고 분명하게 말하는 순정 만화를 만들고자 했던 작가의 바람과 달리 납치, 협박, 살해위협 속에 피 흘리길 반복하는 폭력은 오히려 수탈당하는 여성 이미지에 가깝다. 무엇보다 남성이 없으면 진전이 안 되는 서사 속에서 여성의 역할에 대해 묻고 싶다.

액션 연출도 원래 글, 그림 작가가 서로 합의가 안 된 부분인 듯싶다. 몇 가지 미흡한 부분을 짚어보자면 때리는 장면만 표현할 뿐 맞는 장면은 보여주지 않는다. 맞는 장면을 생략하거나 혹은 프레임 밖으로 프레임 밖으로 인물을 밀어버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효과음으로 맞는 부분을 가린다. 풀샷에서 1점 투시를 활용한 운동성 강조나 2점 투시를 활용한 다찌마와리(
たちまわり, 드잡이; 싸움; 난투) 구도도 보이지 않는다. 효과음 서체 역시 운동의 방향성과 소리의 크기를 표현할 수 있음에도 작품은 이를 활용하지 못 한다. 즉 매회 주인공과 악당들은 서로 때리기 바쁜데 연출은 원래 액션만화가 아니었던 것처럼 보인다. 글, 그림의 불협화음으로 한 가지 예를 들면 42화 악당 정태은이 여주인공 차유정을 납치하고 남자주인공이 도준혁이 구하러가는 시퀀스에서였다. 도준혁은 악당들을 제압하며 계단을 오르고 있었고 동시에 악당 한태은은 차유정에게 주인공 도준혁의 정체를 알려주고 있었다. 이때 한태은은 “적이 많은 조폭의 후계자니 호신술은 생각의 문제였다고. 그런 준혁이가 태극권을 익힌 이후론 나도 위험할 정도야. 여기 인원 전부가 떼거지로 몰려가도 절대 못 이길걸?”이라는 대사를 하는데 바로 다음 장면에서 도준혁은 태극권이 아닌 암바를 걸었다.
“작가님 못생긴 거 못 그리죠.”
32화에서 읽은 한 댓글은 독자들이 무엇을 기대하고 작품을 읽는지 가장 함축적으로 표현한 문장이었다. 외모찬양으로 시작해서 외모찬양으로 끝나는 댓글들은 좋게 말해 캐릭터의 소구력2)이 엄청 뛰어나다는 뜻이다. 1회성 등장인 캐릭터마저 “미르 아버지도 유전자가... 크흠 유부남한테 이러면 안 되는데...”라는 댓글이 달릴 만큼 앞선 단점들이 캐릭터의 힘으로 극복되는 어마어마한 작품이다.
1) https://blog.naver.com/ylabacademy/221434337853 네이버 웹툰 <일진이 사나워> 강환영 작가 데뷔 인터뷰
2) 소구력(訴求力) 방송 광고가 시청자나 상품 수요자의 사고나 태도에 영향을 미치는 힘.(고려대한국어대사전)
CB그룹이 등장하기 전까지 남자 주인공 도준혁과 그의 친구들이 서브 주인공의 포지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반미르, 백선호, 임재원은 각각 모두에게 친절한 스위트 가이, 곰 같은 우직한 미남, 게임 좋아하는 오타쿠이면서 싸움 잘하는 반전매력 등의 개성이 부여됐다. 그러다 CB그룹 이야기가 시작되면서 백선호, 임재원을 아웃시키고 ‘도준혁-차유정-반미르’ 삼각관계를 구축한다. 폭력적이지만 알고 보면 여린 도준혁과 언제나 친절하고 키다리 아저씨처럼 나를 지켜주는 반미르는 <꽃보다 남자>의 구준표-금잔디-윤지후의 관계와 같다. 고작 여고생하나가 뭐라고 대기업에서 납치, 협박을 반복하는데도 받아들일 수 있는 건 ‘내가 위험에 빠졌을 때 나를 지켜주는 잘생긴 남자’라는 판타지를 끊임없이 재현하기 때문이다. 그 현장은 합법과 불법을 넘나들고 온당과 불온이 뒤섞여있다. 사랑하는 여자를 지키기 위해 치아를 뽑는 고문 현장을 보여줘도 나를 지키는 잘생긴 남자가 행했기에 멋있고 섹시하다. 이것이 이 작품의 셀링 포인트가 될 것이며, 이러한 전략으로 작품을 인기궤도에 올린 완성형은 정태은이라는 캐릭터이다.
정태은은 도준혁의 최대의적(Archenemy)이다. CB회장이 후계자로 키우기 위해 양자로 맞이했지만 사실은 친아들인 도준혁의 라이벌로서 도준혁이 각성하도록 자극하는 역할이었다. 그 사실을 안 정태은은 도준혁에게 모든 걸 빼앗기게 될 것이라 압박을 느끼고 그의 모든 것을 빼앗으려한다. 그 대상에 도준혁이 좋아하는 차유정이 있어 차유정을 끊임없이 괴롭힌다. 납치, 협박, 폭행, 폭언, 살해위협, 성추행까지. 차유정에겐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힌 캐릭터로 아무리 사연 없는 일진 없다지만 명백히 극악 범죄자이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작품을 견인하는 가장 호감캐릭터가 되었다. 사이코패스 범죄자에서 시작해 나쁜 놈으로 바뀌더니 어느 순간 나쁜 남자 되고 ‘갓태은’이 되어 여성독자들의 마음을 흔든다. 솔직히 77화에서 차유정을 강압적으로 침대에 눕혀 키스를 하려는 장면에서 섹시하다고 말하는 독자들의 반응을 읽으며 상식이 무너진 것 같았다.

무시 못 할 재능이다. 가장 바닥에 있는 비호감 캐릭터를 몇 화만에 가장 호감 있는 캐릭터로 탈바꿈 시키는 기획력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정태은을 호감 캐릭터로 바꾸는 다음과 같다. 우선 기존의 서브남자주인공이었던 반미르를 빼내고 ‘도준혁-차유정-정태은 구도’를 만든다. 그 후 새로운 악당을 만들어 정태은이 더 이상 악역을 맡지 않도록 한다. 새로운 악당은 기존의 CB와 같은 범죄자가 아닌 교사와 학생이라는 현실 속 인물이다. 동시에 도준혁을 포함 기존의 인물들은 차유정을 돕지 못하도록 만든다. 이때 그를 도와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 정태은이다. 차유정의 상식이 자기를 공격하자 유일한 해결책은 범죄자 정태은의 폭력적 해결밖에 없다. 차유정은 어쩔 수 없이 정태은의 도움을 받는다. 정태은의 ‘어쩔 수 없었던’ 과거를 보여주어 독자들이 그에게 공감할 수 있도록 틈새를 만들고 차유정을 통해 그간 정태은을 오해하고 있었다는 부채의식을 만들어낸다. 정태은의 범죄는 삐뚤어질 수밖에 없었던 아픔으로 면죄가 되고 오로지 차유정을 지키기 위한 보호수단으로 포장된다. 중범죄자가 나쁜 남자로 탈바꿈하는 프로세스에는 잘생긴 외피뿐만 아니라 잘생기도록 만드는 수많은 설정들이 녹아있다.

앞서 Ylab이라는 브랜드를 생각하면 아쉽고, 신인 작가라 생각하면 대단하다는 말은 엉성한 세계관과 갈피를 못 잡는 스토리 라인이라는 단점과 그 단점을 덮어버리는 캐릭터 구축이라는 엄청난 장점을 의미한다. 개인적으로도 혼란스러웠던 모든 것과 타협하며 작품의 세계관을 받아들이니 마치 2000년대 「스타 서바이벌 동거동락」처럼 그 안에 캐릭터들의 매력발산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일진’이라는 생각과 연결하여 오늘날 인기 작품들이 캐릭터 쇼라는 생각을 해본다. <외모지상주의>, <프리드로우>, <복학왕>, <싸움독학>등 부터 <유미의 세포>까지 매력 있는 캐릭터가 스토리를 압도하며 작품을 견인한다. 무서운 신인들의 기량은 이 흐름에 일치한 것이다. 일단 빠지게 된다면 헤어나올 수 없다. 그래, 빠지게 된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