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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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관하여

사려 깊은 죽음의 미학 - 시니, 혀노 김소원 (만화연구가, 만화포럼 위원)신장 175cm, 30대 중후반, 빈티지룩을 선호하는 남자, 처진 눈썹에 찢어진 눈, 덥수룩한 머리와 수염. 그리고 늘 입에 물고 있는 담배. 에서 ...

2017-04-10 김소원
사려 깊은 죽음의 미학
- 시니, 혀노 <죽음에 관하여>
 
김소원 (만화연구가, 만화포럼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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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장 175cm, 30대 중후반, 빈티지룩을 선호하는 남자, 처진 눈썹에 찢어진 눈, 덥수룩한 머리와 수염. 그리고 늘 입에 물고 있는 담배. <죽음에 관하여(시니 글, 혀노 그림)>에서 묘사된 신()의 모습이다. 종교의 유무와 관계없이 많은 이들이 가지고 있는 신의 이미지에서 완전히 벗어난 파격적인 절대자와 죽음에 이른 망자(亡者)들의 이야기를 그린 이 작품은 네이버에서 20128월부터 총 스물아홉개의 이야기로 연재된 웹툰이다. (현재 5화 이후는 유료화 되어 네이버 스토어에서 볼 수 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누구 앞에서든 담배 연기를 뿜어대는 이 시니컬한 신은 아무것도 없는 의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 30대 남자의 모습을 하고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죽은 자들을 맞이한다. ‘죽음은 시공간을 초월해 모든 인류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자 극복의 목표였다. 육신의 영생이란 불가능하며 죽음을 완벽하게 피할 수 없음을 알았지만 최대한 늦춰 보려는 노력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의학의 발달은 죽음을 인류로부터 한 발 물러서게 했다. 그럼에도 음악, 그림, 문학많은 예술은 여전히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죽음에 관하여>죽음을 주제로 인간의 을 그린다.
이 작품은 옴니버스식 구성으로 죽음이란 소재를 다룬다. 죽은 사람이 신을 만나고 환생의 문으로 걸어가는 동안 인간이 신과 나누는 대화나 지나온 삶에 대한 기억이 스토리를 이룬다. 죽음에 대해서는 인간 누구나 막연할 수밖에 없다. 현재 살아 있는 이들은 당연히 직접 경험한 적이 없는데다 간접 경험의 대부분은 슬프고 아픈 기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죽음은 특별할 것 없이 다가온다. 잠에서 깨면 맞는 아침처럼 새하얀 공간에서 눈을 뜬다. 좀 다른 것이 있다면 눈앞에 불쑥 얼굴을 내밀고 자신을 신으로 소개하는 남자가 있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이렇게 죽음과 신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 매회 허를 찌르는 반전으로 감동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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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길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다. 자살을 기도한 청년, 친구와 오토바이를 타다 사고로 사망한 학생, 젊은 부부를 살해한 연쇄 살인범, 에베레스트 등산길의 정상 부근에서 동사한 친구들, 동료를 죽음에서 구해내고 순직한 베테랑 소방관 등 작품에 등장하는 망자들의 나이와 성별, 직업도 다양하다. 이들은 신 앞에서 자신의 죽음을 억울해 하거나 지나온 삶을 후회한다. 혹은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만든 누군가를 원망하기도 한다. 물론 죽음을 덤덤히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다. <죽음에 관하여>는 인간들이 죽음을 맞이한 순간 신을 만나며 반추하는 죽음과 삶의 의미를 그린다. 이야기는 억지 눈물과 교훈, 권선징악의 해피엔딩 대신 독자들에게 이 가진 의미를 진지하게 묻는다. 작품 속에는 드라마틱한 죽음도 있고 천수를 다한 평온한 죽음도 있다. 어떤 죽음이건 거기에는 그 사람의 인생과 살아온 궤적이 존재한다. 한 점의 후회와 아쉬움도 없는 죽음은 없겠지만 이 작품 속의 죽음에는 모두 깊은 사연이 있다.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채 엄마의 뱃속에서 낙태당한 아기의 영혼조차 자신의 엄마와 아빠가 느낀 그대로의 느낌을 태중의 행복한 기억으로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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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죽음을 이야기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웹툰은 인생을 이야기한다. 행복한 죽음이란 결국 어떠한 삶을 살았는가에 좌우된다. 작가의 말처럼 죽음은 그리 멀지 않으며 어렵지도 쉽지도 않고” “항상 곁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죽음이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인지하지 못한다. 다만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생명을 소중히 여겨야 함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생각만큼 자신의 인생을 소중히 사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어떠한 인생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교훈과 가르침은 차고 넘치지만 어떠한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가에 대한 가르침은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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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자신을 의심하는 망자들에게 여러 가지 외형-거대해 지기도 하고, 여성이 되기도 하며 동물이 되거나 때로는 슈퍼 히어로의 모습으로 바뀌기도 한다-을 바꾸어 보여주는 것으로 존재를 증명하는 이 장난스러운 신은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선 이들에게 관용을, 때로는 그들의 잘못된 생에 대한 응징을 내리기도 한다. 죽음에 대한 교훈이고 가르침이다. 삶이 힘겨워 자살을 기도했던 청년은 다시 생을 얻어 잊고 있던 꿈을 위해 노력하기 시작한다. 아내와 아이들을 남겨두고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은 오랜 시간 아내를 기다린 끝에 할머니가 되어 저승으로 온 아내와 재회한다. 연쇄 살인범에게는 희생자들의 고통을 처절하게 경험하도록 한다. 자신이 살해한 사람이 되어 죽는 순간의 고통을 경험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뻔한 권선징악의 결말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신이 말하듯 반전은 숨 쉴 때만주어진다. 죽음 이후는 어디까지나 살아 있는 동안의 결과인 것이다. 신은 억울하고 안타까운 삶을 구원 해주지 않는다. 자신의 삶을 바꾸는 선택은 인간에게 달려있다. 그러나 이러한 소극적인 감동의 개입에도 독자들이 공감하는 것은 결국 결말의 반전에 있다. 희생자인 줄 알았던 사람이 사실은 가해자 이거나 홀로 쓸쓸히 버려진 줄 알았던 등장인물이 결국 친구들과 함께 죽음을 맞는다는 설정처럼 착한 반전은 독자들을 안심시킨다. 16화는 대사 한 줄 없이 여섯 명의 친구들이 함께 찍은 여러 장의 사진과 국화꽃만으로 스토리를 보여준다. 교복을 입었다가 군복을 입고, 아기를 안고, 얼굴의 주름이 하나씩 늘어가는 인물들의 변화는 시간의 흐름과 사진 속 주인공들이 가꿔온 긴 우정을 이야기한다. <죽음에 관하여>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은 독자들을 질리거나 지치게 하지 않는 스토리의 완급 조절이다. 큰 굴곡 없이 부드럽게 흘러가지만 결말에서 부드럽게 발산되는 에너지는 제법 치명적이다. 매회 많지 않은 분량으로 스토리를 압축해 하나의 에피소드를 이끌어가는 구성이 촘촘하다. 그러나 잘 짜인 복선과 반전의 스토리와 달리 그림에는 투박한 매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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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 세계는 흑백으로 생전의 모습은 컬러로 그려진 이 작품은 컬러 원고가 보편적인 웹툰 스타일에서는 다소 벗어난 듯 보인다. 게다가 흑백 원고는 덜 여문 거친 느낌도 든다. 말끔하게 다듬어진 디지털 작화 보다는 손으로 그린 느낌이 아날로그적 감성을 담고 있다. 화려한 컬러 웹툰의 시대에 이처럼 흑백의 담백한 표현은 오히려 새롭다. ()의 세계를 표현하기 위한 것일지 모르나 극도로 절제된 공간의 여백은 화면을 꽉 채운 배경 없이도 독자들을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몰입시킨다. 무뚝뚝한 표정의 신과 달리 인물들의 표정은 다채롭고 자유로운 펜선의 질감은 무심한 듯 시크하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매력은 모든 이들에게 자유로울 수 없는 죽음에 대한 관조와 해석에 있다. ‘죽음은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으며 예측 또한 불가능한 것이다. 독자들은 일상처럼 타인의 죽음을 듣고 본다. 작가는 신의 입을 통해 죽음이란 것이 늘 가까이에 있지만 기다리거나 쫓지도 않으니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고 이야기한다. <죽음에 관하여>는 대학 동기인 그림 작가와 글 작가가 놀랍게도 스물 셋의 나이에 연재한 작품이지만 이야기에는 작가들의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무게가 있다. 오랜 인생을 경험한 듯 관조와 달관의 시선마저 보인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작품이 이들의 정식 데뷔작 이라는 것이다. 이들이 죽음을 바라보는 깊은 시선은 글 작가의 특별한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군복무를 소방서에서 하면서 구급차에서 많은 죽음을 겪었고 그러한 타인의 죽음이 작품의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작가 스스로가 일상적으로 느꼈던 어디에나 있지만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는 죽음에 대한 경험이 작품의 근저에 탄탄히 깔려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근엄하고 현학적인 교훈 대신 일상과 바로 맞닿아 있는 죽음을 이야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