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묵화의 농담(濃淡)으로 빚어낸 낯섦의 미학 - <아 지갑놓고나왔다>
서은영(만화포럼위원)
낯설다. 이 웹툰을 처음 접했을 때 느꼈던 첫인상은 “낯섦”이다. 사실 <아 지갑놓고나왔다>를 읽으며 ‘생경함’, ‘생소함’, ‘낯섦’, 이 세 단어를 떠올렸다. 세 단어 모두 ‘익숙하지 않다’는 의미를 공통적으로 내포하고 있지만, 그 가운데 “낯섦”을 택한 것은 ‘생경함’과 ‘생소함’에는 ‘어색하다’나 ‘서투르다’는 부정적인 의미 항이 교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웹툰은 세 단어의 어디쯤에 해당할지 가늠하며 읽는 것도 웹툰을 읽는 묘미를 더해준다.
다행히 <아 지갑 놓고 나왔다>는 ‘낯섦’이었다. 이 웹툰은 발상에서부터 스토리, 이미지, 캐릭터, 연출에 이르기까지 낯설지 않은 것이 없다. 단연 눈에 띄는 낯섦은 수묵화 느낌의 이미지다. 수묵화의 중후한 느낌은 웹툰이 던지는 화두의 묵직함과 조화를 이루었고, 최소한의 선의 사용으로 인한 간결한 그림은 자칫 어두울 수 있는 이 웹툰을 한결 편안하게 읽을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수묵화 선의 농담(濃淡)을 통해 전체적인 이야기를 이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짙은 페이소스를 느끼게 한다.
웹툰의 시작은 교통사고로 죽은 아홉 살 소녀와 그 소녀의 엄마 이야기를 예고로 한다. 제목인 <아 지갑놓고나왔다>에서 예측되는 일상성은 예고편에서부터 배반되며 호기심을 자극하지만, 정주행하다 보면 그것이 바로 작가의 역량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웹툰은 크게 소녀 노루의 시점과 엄마 선희의 시점, 두 개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9살 때 친족 간 성폭행을 당한 엄마는 그 충격으로 사람의 얼굴을 새(鳥)로 인식하는 장애를 앓게 되고, 이는 상대방의 표정을 알 수 없게 만들어버림으로써 그녀를 향한 날 선 시선들을 제어한다. 또한 그녀는 미성년임에도 스스럼없이 남학생들과 성관계를 하고 급기야 임신에 이르지만 낙태할 시기마저 놓쳐버린다. 성관계와 출산까지, 주변인들이 경악할 만한 사건의 연속이지만 그녀는 늘 무덤덤하다. 그녀의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일련의 행동과 감정들은 끔찍한 기억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일종의 방어기제다.
그녀의 나이는 법적으로도 허용한 성년이며, 사회적 나이 역시 출산이라는 통과의례를 거친 성년이다. 그러나 이는 물리적인 것일 뿐, 그녀의 진정한 성년은 아홉 살 그 날의 사건으로 인해 더 이상 진행될 수 없었다. 그녀를 둘러싼 다양한 폭력들은 한 인간을 피폐하게 해버렸으며, 성장할 수 없게 만들었다. 노루는 그녀가 낳은 아이지만,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의 또 다른 자아다. 엄마를 끔찍이도 생각하는 아홉 살 소녀 노루의 시점은 폭력에 성장이 멈춰버린 아홉 살 선희의 고통스러운 자아를 분리해 내는 과정이다.
△ 1부 2-2 중, 사람의 얼굴이 새(鳥)로 보이는 엄마 선희의 시점
선희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방어기제를 깨고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하게 되는 과정은 무겁고 어두운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이 웹툰은 음울함을 지양한다. 군데군데 발산되는 뜬금없는 유머들은 극의 진행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적절히 연출됨으로써 음울한 분위기를 덜어주기도 한다. 선희의 비정상적인 무덤덤함과 노루의 과잉된 성숙함이 독자들로 하여금 페이소스를 느끼게 하지만, 수묵화의 농담은 감정의 강약을 대변하듯 연출됨으로써 더욱 강렬한 페이소스를 발산한다.
이 웹툰은 익숙함을 찾는 것이 더 어려운 것 같다. 다양한 웹툰들이 등장했지만, 수묵화의 붓놀림을 웹툰으로 만나게 된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다. 재미있는 것은 말풍선이라는 도상적 기호마저도 우리나라 최초의 만평이라 일컫는 이도영의 ‘삽화’(1909년)를 떠올리게 한다. 초기 만화의 촌스러움이 웹툰에서는 오히려 참신함이 되었으며, 동양화의 질감을 살리기 위한 재치 있는 선택이었다. 또한, 작가는 다소 무겁고 철학적인 화두를 많은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구성으로 전개했다. 이승과 저승이라는 공간 설정과 그 안에서 사연을 풀어가는 인물들의 전개가 친족 간 성폭행, 가족의 책임회피, 미혼모라는 무거운 화두를 마냥 무겁지 않게 느끼게 한다. 게다가 가해자에 가하는 저승의 저주는 통쾌함마저 준다. 안타깝게도 이승에서는 그 통쾌함을 맛볼 수 없지만, 가해자에 대한 우리 모두의 분노가 통쾌함이 되는 것이 비단 저주로부터 비롯되는 것은 아닐 게다. 저주는 가해자에게 향해 있기에 우리 모두는 지금껏 가해자만 바라보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가해자를 벌하는 것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은 당연 피해자를 향한 공감이라는 것을 새삼 떠올리게 한다. 이 또한 그동안 우리 사회에선 익숙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불온한 시선을 거두고 피해자가 폭력으로부터 벗어나 행복하길 바라는 것. 우리는 이 지점에서부터 이야기를 다시 만들어 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