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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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 이동도서관

영혼의 양식, 무의식 속의 천국을 만날 때- 오드리 니페네거 김소원 (만화연구가, 만화포럼 위원)‘책’이라는 단어에서 내가 떠올리는 오래되고 선명한 기억의 하나. 유치원에 다니던 때이니 아마 여섯 살 무렵이었을 것이다. 집 근처에 작은 ...

2016-10-31 김소원
영혼의 양식, 무의식 속의 천국을 만날 때 
- 오드리 니페네거 <심야 이동도서관> 

김소원 (만화연구가, 만화포럼 위원)

 ‘책’이라는 단어에서 내가 떠올리는 오래되고 선명한 기억의 하나. 유치원에 다니던 때이니 아마 여섯 살 무렵이었을 것이다. 집 근처에 작은 헌책방이 있었다. 어머니가 이따금 그 헌책방에서 학습 만화며 어린이 잡지를 사다 주셨고 언제부터인가는 내가 직접 헌책방에 가서 책을 골랐었다. 다 읽은 책을 가져가면 책방 아저씨는 얼마의 값을 쳐줬고 돈을 조금 더 보태면 다른 책으로 바꿔올 수 있었다. 읽기가 끝난 책과 바꿀 다른 책을 고르느라 헌책방 여기저기를 들추고 다닐 때에는 주인아저씨의 은근한 짜증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난 제법 오랫동안 그 헌책방의 귀찮은 단골이었다. 만화가게나 도서관 서고에서도 맡을 수 있는 오래된 책 냄새는 어릴 때의 그 헌책방을 떠오르게 한다. 온전히 혼자 힘으로 책을 읽을 수 있게 된 후 나는 지금까지 어떤 책들을 몇 권이나 읽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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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 여행자의 아내>의 작가 오드리 니페네거가 그림과 글을 모두 담당한 <심야 이동도서관>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읽은 모든 텍스트가 순서대로 정리되어 있는 도서관이라는 판타지를 그린 작품이다. 알렉산드라는 어느 늦은 밤 남자친구와 다투고 길을 걷던 중 ‘심야 이동도서관’을 만나게 된다. 캠핑카를 개조한 이동도서관에는 여러 책들과 교과서, 전화번호부, 성경책, 시리얼 상자까지 주인공이 살아오며 읽었던 모든 인쇄물이 소장되어 있다. 주인공은 도서관 사서로부터 자신이 읽은 모든 책들과 잠깐 읽고 버린 인쇄물과 잡지까지 모아두었다는 설명을 듣는다. 알렉산드라가 추억을 더듬으며 행복함을 느낀 것도 잠시 동이 트면 문을 닫아야 하는 도서관에서 내려야 하는 시간이 온다. 이 믿을 수 없는 경험으로부터 알렉산드라는 간절히 원하던 무엇인가를 손에 넣었다 빼앗긴 것 같은 상실감에 빠지고 만다. 자신의 이야기를 믿어주지 않는 남자친구는 그러한 상실감에 아무런 위로가 되질 않는다. 알렉산드라는 그날 이후 활자에 중독된 듯 책 읽는 일에 몰입한다. 자신이 읽는 활자가 눈으로, 머리로 흡수된 후 하나의 형태로 다른 차원에 존재함을 안 순간부터 알렉산드라의 독서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오드리 니페네거는 이 작품에 대해 “책이 독자를 사로잡는 이야기이면서, 내면의 삶과 외면의 삶 사이의 불균형에 대한 이야기, 텍스트의 유혹을 경고하는 이야기”라고 했다. 알렉산드라는 미친 듯이 책을 읽고 새로운 공부를 통해 도서관 사서가 되고 결국 도서관 관장이 된다. 그녀는 남자친구와 살았던 집을 온통 책으로 채우지만 많은 책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을 느낀다. 내면과 외면의 불균형이다. 결국 알렉산드라는 자신의 천국과도 같은 도서관으로 가기 위해 죽음을 택한다. 단순한 독서행위 만으로는 채울 수 없던 빈 공간을 완성하기 위한 행동이다. 의외의 결말이지만 작가는 알렉산드라를 통해 독서의 매력을 작가 특유의 환상적 세계관에 투영한다.
 정말 내가 읽은 모든 인쇄물이 모여 있는 도서관이 있다면 다시 읽고 싶지만 이제는 찾기 힘든 책이나 누군가에게 빌려줬다 돌려받지 못한 책, 결말까지 읽지 못해 그 끝이 몹시도 궁금한 그 책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나의 도서관은 자랑스럽게 누군가에게 문을 열어 보여 줄 수 있을 만큼 충실한 공간일까? 문명사회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책을 읽고 글을 읽는다. 그리고 그렇게 읽은 글들은 어떠한 형태로든 그 사람의 생각과 삶을 만들어낸다. 누군가의 서가를 보면 그 사람의 관심사며 취미, 지적능력을 알 수 있음은 당연하다. 
 어느 날 뉴스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 믿을 수 없는 특종, 많은 이들이 짐작은 했으나 그들의 상상을 훨씬 넘어서는 진실이 대한민국의 많은 국민들을 참담하게 만들고 있는 지금, 문득 그 누군가의 ‘도서관’이 궁금해진다. 자신의 글이 아닌 누군가에 의해 고쳐지고 윤색된 낱장의 종이들이 채우고 있을 것만 같은 그 황량한 도서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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