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스낵컬처의 시대다. 한 회차에 10분짜리인 웹드라마 시리즈가 쏟아져 나오고, 보기 좋은 인포그래픽에 큼지막한 활자가 정렬된 카드 뉴스가 SNS에 널려 있다. 한 화에 3분 정도, 스마트폰으로 어디에서나 편리하게 볼 수 있는 웹툰도 스낵컬처 콘텐츠의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흥미로운 점은, 그렇게 짧게 즐길 수 있는 웹툰 중에서도 전개가 빠르고 이해하기 쉬운 작품이 쉽게 인기를 끈다는 것이다.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정말 독특한 소재나 눈에 띄게 귀여운 그림체 같은 셀링 포인트가 있어야만 연재 초반에 독자를 끌어모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안타까운 것은 이에 속하지 않는 작품 중에서도 작품성 있고 재미있는 작품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2018년부터 2019년에 연재된 웹툰 <식스틴>도 그중 하나다.
일곱 살 딸을 키우는 스물아홉 싱글맘 인주는 기억상실증이 있어 중학생 때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언제나 딸을 0순위로, 다른 사람들과는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며 거리를 두던 어느 날, 거래처 대표 겸재가 중학교 동창이라며 다가온다. 겸재가 기억나지 않는 인주는 자꾸만 화가 난 듯이 부자연스러운 반응을 보이는 그에게 불편함을 느끼지만, 우연이 겹치면서 겸재와 가까워져 연인으로 발전하게 된다. 하지만 인주가 기억하지 못하던 인주와 겸재 사이의 과거가 드러나면서 둘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필자가 <식스틴>에게서 가장 먼저 느낀 차별화된 매력은 퍼즐형 전개다. 상황의 배경과 원인을 먼저 밝히지 않고 현재를 보여준 후, 인물들의 감정에 따라 과거의 이야기를 교차시키는 것이다. 작품 초반부에 독자는 인주의 입장에 서서 자신이 왜 그러는지 말해주지 않으면서 인주에게 집착하는 겸재에게 불편함을 느낀다. 이후 겸재가 인주에게서 받은 상처가 있다는 사실이 일부 드러나고, 인주가 왜 기억을 잃게 되었는지에 대한 조각들이 하나씩 수면 위로 떠오른다. 현재의 두 사람이 갈등을 겪으면서, 드디어 열여섯 살 두 사람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인지 밝혀진다. 이처럼 <식스틴>은 정돈된 줄거리를 한 번에 알려주지 않고, 진실의 파편을 조금씩 내미는 방식으로 내용 전개에 대한 흥미도를 높였다. 특히 인주 시점의 독자들과 겸재 사이의 정보의 비대칭성을 통해 긴장감을 연출함으로써 여타 멜로 장르물과는 다른 분위기의 매력을 만들어냈다. 친절하지 않은 전개 방식 때문에 처음에는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다’, ‘답답하다’는 반응이 주를 이루기도 했으나, 퍼즐 조각들이 어느 정도 맞춰지면서부터는 다음 내용을 궁금해하며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지 추측하는 독자들이 많아졌다.
더불어 <식스틴>은 느린 호흡의 미학을 여실히 보여준 작품이다. 73화 동안 전개되는 주요 플롯은 인주와 겸재의 만남, 두 사람이 가까워지는 과정, 겸재가 회사를 정리하게 되면서 시작되는 갈등, 인주에게 둘 사이의 과거를 알려주는 겸재의 회상과 기억상실증을 앓게 된 이유를 고백하는 인주의 회상, 그리고 모든 진실이 드러난 후 두 사람의 이야기뿐이다. 대단한 반전이 펼쳐지지도, 둘 사이의 관계가 다양한 계기로 업다운을 반복하지도 않는다. 각 회차는 스펙터클한 사건보다는 인주와 겸재의 감정의 미묘한 변화들로 채워진다. 일주일에 한 화씩, 17개월 동안 연재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딘 전개라고도 볼 수 있다. 자칫 내용이 부실하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었겠으나, <식스틴>은 오히려 몰입도 높은 감정선을 만들어냈다는 호평을 받았다. 느린 호흡을 통해 소위 ‘빌드업’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플롯을 다시 한번 살펴보면 사실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전형적인 구성을 따르고 있다. <식스틴>이 느리다기보다는 오히려 독자가 예전에 비해 발단과 전개 과정을 견디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퍼즐형 전개와 느린 호흡이 <식스틴>의 완성도를 높이는 지점이면서 동시에 연재 초반에 인기를 떨어뜨린 요인이라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호흡이 길고 의미심장한 것보다는 짧고 이해하기 쉬운 콘텐츠를 원하는 우리가, 어쩌면 스낵 중의 스낵만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긴박감 있게 전개되는 강렬한 작품도 좋지만, 서사의 완결성을 가지는 작품이 사라지지는 않기를, 천천히 쌓이는 서사로 마음을 움직이는 작품도 종종 있어 주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