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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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2010 스페인 만화대상 수상작)

마침내 하늘을 난 아버지 - 안토니오 알타리바 글, 킴 그림 김소원 (만화연구가, 만화포럼 위원) 우리들은 역사 속의 주요 사건들만 외우고 기억하지만 과거의 시간들이 굵직한 사건들만 찍힌 점선은 아니다. 역사는 끊임...

2016-08-25 김소원

마침내 하늘을 난 아버지

- 안토니오 알타리바 글, 킴 그림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김소원 (만화연구가, 만화포럼 위원)

 

우리들은 역사 속의 주요 사건들만 외우고 기억하지만 과거의 시간들이 굵직한 사건들만 찍힌 점선은 아니다. 역사는 끊임없는 선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선은 무수히 많은 보통 사람들이 모여 그려낸다. 역사 위에 존재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주목받지 못한다.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의 주인공 안토니오도 그랬다. 그는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스페인의 제2공화정 수립과 프랑코의 쿠데타와 독재, 스페인 내전, 2차 세계대전을 겪는다.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가난하게 보냈고 아흔 살이 되어 양로원에서 투신해 생을 마감한다.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은 작품의 시나리오를 쓴 안토니오 알타리바의 아버지가 생전에 들려주었던 이야기와 메모로 남긴 200쪽의 글을 토대로 그려진 ‘아버지의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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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은 안토니오가 양로원 창문으로 뛰어내리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안토니오가 서서히 땅으로 내려앉듯 제4층, 제3층, 제2층, 바닥의 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4층에서는 유년기에서 제2공화정 수립까지를, 제3층은 스페인 내전이 끝난 1939년까지, 제2층은 프랑코의 독재가 시작되는 1939년부터 안토니오가 파산하기까지의 내용을 그린다. 그리고 바닥장에서는 양로원에서 보내는 말년이 그려진다. 굴곡진 현대사는 우리의 그것과도 많이 닮았고 안토니오의 투신과 함께 1910년으로 되돌아간 이야기는 1인칭으로 그려진다. 어느 먼 나라의 픽션이 아닌 내 이야기처럼 제법 묵직하게 다가오는 이유이다. 

하루 종일 쉴새없이 일해도 먹고사는 게 고작인 지긋지긋한 가난 속에서 도시를 동경하던 안토니오는 어머니의 돈을 훔쳐 달아난다. 그렇지만 생활의 터전이 도시로 바뀌었다고 해서 그의 삶도 도시처럼 세련되고 풍요로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도시에서 안토니오의 어깨엔 촌뜨기라는 경멸의 시선까지 얹어진다. 일자리를 잃고 고향으로 돌아간 그는 친구의 불행한 죽음을 목격하고 다시 도망친다. 그리고 그토록 동경하던 도시에 정착해 혁명과 내전, 전쟁을 겪는다. 전쟁이 끝나고 그는 사업을 시작하고 가정도 꾸리고 경제적인 안정, 그리고 무엇 보다 자신의 혈육을 얻는다. 아나키스트 동료들과 납탄으로 만들어 나눠 끼었던 반지를 더 이상 낄 수 없었던 안토니오에게 자신의 손가락을 꼭 말아 쥔 갓난아기의 손은 마치 이상과 혁명을 맹세하던 반지와도 같았다. 그리고 그는 오랫동안 그의 삶을 좌우했던 혁명과 사상에 대한 고민 대신 아들의 밝은 미래만 생각하기로 한다.

아들이 생긴 후 안토니오의 인생은 변한다. 세상의 많은 아버지들이 그러하듯 자식과 가족이 인생의 중심이 된 것이다. 자신이 놓인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지만 늘 물질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궁핍했던 그는 결국 동료의 배신으로 파산하고 외로움 속에서 말년을 보낸다. 그리고 스스로 허공에 몸을 던져 국가 혹은 역사라는 오만한 이름 앞에 짓눌린 90년의 생을 마감한다.

이 작품이 마음을 울리는 것은 스페인 내전에 참여한 한 아나키스트의 이상을 찬양하는 데 있지 않다. 반대로, 그 이상이 전쟁 이후 프랑코 독재 수십 년 동안 어떻게 적당히 타협되고, 굴절되는지에 있다. 그것은 혁명가의 이상이 평범한 소시민의 안락으로 바뀌는 과정을 가혹하게 지켜보는 것이다. 이쯤 되면 왜 안토니오가 자연사해도 이상하지 않을 그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저버렸는지를 깨닫게 된다. 혁명적 열정으로 가득했던 전쟁 이후 수십 년의 삶이란 그에게 이미 죽은 삶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이미 끊어진 정치적 생명을 생물학적 죽음으로 소멸시킨 것이다.

작가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삶에 짓눌린 나의 아버지는 창가에서 하늘로 날아갔다”라고 썼다. 작품의 원제는 , 직역하면 ‘비행의 기술’이다. 작가는 아버지의 삶이 추락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다른 세상으로 비상한 것임을 이야기한다. 이 작품은 ‘역사 속에 희생된 개인’의 이야기일 수도 있고 ‘자신의 삶에 충실했던 아버지’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 순간 거기에 존재했던 수많은 이들을 우리는 종종 잊고 말지만 그들은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열심히 그 순간을 버텨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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