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序-
2015년 5월 14일, 한국의 극장가에 전설의 명작이 리부트되어 개봉하였다. 호주의 영화감독 조지 밀러가 칠순이 넘은 나이로 자신의 출세작이자 대표작인 <매드맥스>를 35년 만에 다시 만들어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작품 제목마저도 <매드맥스 4 : 분노의 도로>다. 비록 1, 2, 3편의 주인공이자 올드팬들의 뇌리에 강렬하게 각인된 <매드맥스>의 주인공 멜 깁슨은 젊은 배우 톰 하디로 교체되었으나, 35년 만에 돌아온 이 “혁명적인 작품”은 그야말로 “명불허전”이었다.
<매드맥스>는 세계 영화사에서 ‘포스트 아포칼립스(Post-Apocalypse)’ 장르의 선구자로 불리는 SF영화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란 SF의 하위 개념 중 하나로 ‘세계종말’을 테마로 하는 장르를 뜻한다. 핵전쟁으로 모든 것이 무너져버린 세계, 사막으로 변해버린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인류는 물과 식량을 찾아 힘겹게 생을 이어가고, 힘없는 약자들은 강자들의 폭력과 약탈에 신음하며 짐승만도 못한 처지로 내몰려 그야말로 절망의 밑바닥을 헤매고 있다. 그 황량한 세상 속에서 강자들의 위치에도, 약자들의 자리에도 속하지 못하고 그저 떠돌기만 하는 방랑자, 전직 경찰 맥스는 자신이 지켜내지 못한 소중한 사람들의 망령에 시달리며 하루하루를 그저 생존해나가는 것에만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마치 ‘사막의 집시’를 연상시키는 캐릭터다. 그런 맥스가 우연한 계기나 인연으로 인해 약자들의 편에 서서 자신의 능력을 초인적으로 발휘하며 작지만 소중한 가치를 힘겹게 지켜나가는, 독특하고 강렬한 느낌의 액션영화가 바로 <매드맥스>다.
이 ‘혁명적인 작품’은, 그 독특한 세계관과 비주얼, 속도감 넘치고 스펙터클한 액션과 인류에게 던지는 묵직한 메시지로 훗날 장르를 불문하고 수많은 예술작품들에 영향을 끼쳤으며, 그 영향을 받아 탄생한 명작 만화가 하나 있으니, 그것이 바로 <북두의 권>이다.
<북두의 권> 작화가 하라 테츠오는 <소년 점프>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북두의 권은 매드맥스에서 많은 부분을 차용해 만들어졌습니다. 세계가 멸망하고 치외법권이 된 세상에서 주먹 하나만으로 신념에 따라 사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이 글은 ‘혁명적인 영화’에서 영향을 받아 탄생한 ‘전설의 만화’에 관한 이야기이다.
-本-
1. 작품 개요
슈에이사(集英社)의 대표만화잡지 <주간 소년 점프>에 1983년부터 1988년까지 연재된 만화로 단행본으로는 총 27권으로 발간되며 완결되었다. 누계부수로 ‘1억 부’ 이상 팔린 메가히트 만화로서 <소년 점프>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작품의 하나이자 세계로 뻗어 나간 ‘망가’를 상징하는 작품 중 하나다. 동명의 애니메이션, 게임을 비롯한 수많은 OSMU 콘텐츠로 제작되어 엄청난 매출을 올린 작품이기도 하다. 원작은 부론손(武論尊), 작화는 하라 테츠오(原哲夫)가 맡았으며, 나온 지 30년이 넘은 만화지만 외전(外傳), 속편을 비롯한 여러 관련 콘텐츠들이 꾸준히 제작되며 여전히 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명작의 반열에 오른 작품이다. 2001년부터 본편의 과거사(<북두의 권> 주인공인 켄시로의 아버지 카스미 켄시로가 1930년대의 상하이를 무대로 활약하는 스토리)를 그리는 <창천의 권(蒼天の拳)>이라는 속편이 <주간 코믹 번치>에서 연재되었고, 단행본 총 22권으로 완결되었다. (<북두의 권>에서 원작을 맡았던 부론손은 감수 역할로, 실제 스토리는 <북두의 권>을 연재할 당시의 <소년 점프> 편집장이자 <코믹 번치>의 초대 편집장인 호리에 노부히코가 썼다. 작화는 원작과 같은 하라 테츠오)
2. 작품 내용
199X년 핵전쟁으로 세계가 멸망한 후, 18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일자전승(一者傳承)의 암살권 ‘북두신권’의 계승자 켄시로가, 폭력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암울한 세상에서 약하고 선량한 사람들을 지켜나가며, ‘생존’만이 목적인 시대에서 다시금 사랑과 의리를 바로 세워나가는 지난한 과정을, 역동적인 작화와 가슴 뜨거워지는 이야기로 그려낸 작품이다.
작품은 총 3개의 큰 이야기로 구성되어있다. 1부는 사랑하는 연인 유리아를 친구의 배신으로 잃고 암울한 세상에서 생의 의미를 찾아 떠도는 주인공 켄시로가 ‘가슴에 일곱 개의 흉터가 있는 북두의 남자’로서 수많은 처절한 대결을 통해 절망에 빠진 세상의 구세주로 우뚝 서는 이야기다. 작품의 전체 분량 중에서 스토리의 완성도가 가장 높고, 에피소드 별로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매우 매력적이다.
세간에서 ‘북두 4형제’로 불리는, 켄시로와 함께 동문수학하던 의형제들과 복잡하게 얽힌 인연을 비장한 대결을 통해 하나하나 풀어나가는 과정이 1부 스토리의 핵심이며, ‘북두’의 영원한 대칭점이자 라이벌인 ‘남두의 권’ 계승자들과 주인공 켄시로가 다양한 인연들로 엮여나가며 이야기의 종착역까지 묵직하게 나아가는 다층적인 스토리 구조가 수많은 감동적인 에피소드와 매력적인 캐릭터, 영원히 남을 만한 명대사들을 만들어냈다.
1부의 핵심은 ‘북두 4형제’의 맏형, ‘권왕’ 라오우와 주인공 켄시로의 대결이다. 실력과 자질뿐만 아니라 ‘권법가’로서의 모든 면에서 막내인 켄시로보다 북두신권의 계승자에 더 어울렸던 라오우였으나, 주위의 모든 것을 희생시켜서라도 ‘하늘을 쥐고자 하는 욕망’이 강했던 탓에, 스승이자 양아버지인 류켄에게 북두신권의 계승자로 지목받지 못한다.
1800년이 넘는 시간동안 ‘일자전승’의 원칙을 철저히 지켜온 북두신권의 법도 탓에 스승인 류켄으로부터 권법의 봉인을 당할 처지에 놓인 라오우는 류켄을 죽이는 비정한 선택을 하고, 세상으로 뛰쳐나가 공포로 모든 것을 지??하는 절대자 ‘권왕’으로서 우뚝 선다. 아마 작가의 의도는 주인공의 대척점에 서있는 최고의 악역이자 스토리의 ‘끝판왕’으로서 설정한 최강자였겠지만, 캐릭터의 매력이 워낙 강한 탓에 라오우의 인기가 주인공인 켄시로를 웃돌자, 1부의 마지막으로 나아가면서 라오우가 왜 그런 비정한 선택을 하게 됐는지, 라오우가 어떤 신념과 비전을 가지고 ‘공포의 지배자’로서 세상에 군림하려했는지를 좀 더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이야기의 형태를 조금씩 변화시킨다.
작품 속에서 최고의 조연이라 할 수 있는 ‘북두 4형제’의 둘째 토키는, 인간으로서 꿈꿀 수 있는 완벽한 이상형이 한 몸에 담겨진 캐릭터를 작가가 창조해낸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심지어 토키의 첫 등장장면은 그 외모가 ‘예수’를 닮았을 정도다.) 토키는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제압하는 ‘북두유정권’의 달인이자 북두 1800년의 역사상 가장 날카로운 기술과 심(心), 기(氣), 체(體) 모든 면에서 권법가로서 천재적인 재능을 갖춘 남자였다. 원래는 라오우나 켄시로가 아닌 토키가 북두신권의 계승자가 되었어야 하지만, 핵전쟁 때 켄시로와 유리아를 살리기 위해 둘 대신 피폭을 당함으로써, 엄청난 양의 방사능에 노출되어 시한부 인생의 삶을 사는 병자(病者)가 되고 만다. 원래부터 권력이나 야심, 욕망 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부드럽고 따뜻한 성품을 지닌 토키는,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깨닫고 북두신권의 특성을 살린 의학기술을 개발하여 폭력과 무법에 신음하는 약하고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는 성자(聖子)의 삶을 살다가, 라오우와 켄시로의 비극적인 운명에 휘말리면서 자신의 마지막 책무를 다하기 위해 얼마 남지 않은 생을 하얗게 불태우게 된다. 라오우에게는 친동생이며 권법가로서 영원한 라이벌이자, 의동생인 켄시로에게는 따뜻하고 자상한 형이자 권법가로서 스승의 역할을 하는 존재이다. ‘북두의 권’ 캐릭터 중에서는 가장 비극적인, 가슴 아픈 운명의 소유자이자 가장 이상적인 인간에 가까운, 매력적인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북두 4형제’의 셋째인 쟈기는, ‘악(惡)’을 상징하는 캐릭터이자 인간이 가진 추한 욕망이나 본성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인물이다. 1부 초반부에 켄시로에게 처참한 죽음을 당하게 되면서 ‘북두 4형제’의 비정한 싸움을 시작하게 만드는 연결고리를 제공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켄시로는 쟈기의 질투와 욕망으로 인해 가장 친한 친구이자 연적(戀敵)이기도 한 ‘남두 고취권’의 계승자인 신에게 연인인 유리아를 빼앗기고 가슴에 일곱 개의 흉터를 지닌 남자가 된다. 쟈기의 죽음으로 인해 <북두의 권>은 본격적인 스토리로 들어서게 되는데, 작품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악역들과 그리 다를 바 없는 인물인 쟈기가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는 이유는 가장 중심적인 스토리의 단초를 제공하는 ‘북두 4???제’의 셋째이기 때문이다.
작품 속에서 켄시로가 쓰는 무적의 암살권 ‘북두신권’은, 인체의 경락과 혈(血)을 이용해 ‘비공’이라 불리는 급소를 타격하여 육체의 내부로부터 모든 것을 파괴함으로서 상대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권법이다. 암살권이 지닌 가혹한 숙명 탓에 오직 한 사람에게만 계승되는 일자전승의 법칙을 1800년 동안 지켜온 것이며, 이러한 ‘북두신권’에 맞서 대척점에 서 있는 ‘남두성권’은 108개가 넘는 무수한 분파와 그에 따라 다양한 사람들을 제자로 받아들임으로써 ‘또 하나의 최강자 위치’를 차지한 권법이다. 육체를 내부로부터 파괴하는 ‘북두신권’과 달리 ‘남두성권’은 극한의 단련을 통해 자신만의 특기를 강화시켜, 상대의 육체를 외부로부터 파괴하는 일종의 ‘외가권법’이라고 할 수 있다. ‘남두성권’은 ‘남두육성(六星)권’이라 불리는 여섯 명의 강자가 최고의 위치를 점하고 있으며, 그중 수장이라 불리는 자모성(慈母星)의 계승자가 켄시로의 연인인 유리아고, 남두의 수장인 유리아를 지키기 위해 ‘남두오차성’이라 불리는 음지(陰地)의 최강자 다섯 명이 다시금 존재하고 있다.(남두오차성은 그들이 쓰는 권법과 특기에 따라 각각 산, 바다, 바람, 불, 구름을 상징하고 있으며 이들은 1부 후반부에 모두 등장한다)
토키가 작품 속에 등장하는 조연들 중에 ‘종합적으로’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라면, ‘남두 육성권’의 캐릭터들은 각각이 상징하는 별(星)의 특성에 따라 그 매력이 극대화된 인물들이다. 1부 초반부에 등장해 인상적인 죽음을 맞는 켄시로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연적인 ‘남두 고취권’의 계승자인 신은, ‘사랑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순성(殉星)을 상징하는 인물로 그려지고, 켄시로와 깊고 진한 우정을 쌓다가 비장하고 멋진 죽음을 맞는 ‘남두 수조권’의 계승자 레이는, ‘타인을 위해 죽고 타인을 위해 산다’는 의성(義星)을 상징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또한 자신의 두 눈을 스스로 찔러 어릴 적 켄시로의 목숨을 구해준 인물이자 토키와는 또 다른 모습으로 ‘메시아’를 구현하는 인물인 ‘남두 백로권’의 계승자 슈우는, 인성(仁星)을 상징하는 인물로 어린 아이와 힘없는 자들의 편에 서서 폭정과 압제에 맞서며 저항군을 이끌다가 슬프고 장엄한 죽음을 맞는 인물로 묘사된다. ‘남두육성권’의 계승???들 중에서 악역을 담당하는 인물은 극성(極星) 또는 독재의 별로 불리는 장성(將星)의 상징, ‘남두 봉황권’(남두성권 중 유일하게 일자전승의 권???)의 계승자 사우더와 미(美)와 지략을 상징하는 ‘배신’의 요성(妖星), ‘남두 홍학권’의 계승자 유다이다. <북두의 권>이 명작으로 불리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런 매력적인 특성을 지닌 다양한 인물들과 주인공인 켄시로가 복잡하게 얽혀가면서 재미와 감동을 주는 완성도 높은 에피소드들을 연속적으로 선보이며 소년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다는 데 있을 것이다.
이러한 비중 있는 캐릭터들 외에도, 다수의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작품 속에 등장하며 스토리를 탄탄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북두의 권>의 가장 큰 장점인데, 모든 난관과 역경을 극복하고 수많은 벗들의 비장한 죽음을 가슴에 새긴 켄시로가 의형제이자 최강의 라이벌인 ‘권왕’ 라오우와 마지막 대결을 펼치는 1부의 마지막 에피소드는 독자들의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그야말로 신드롬에 가까운 사회적 현상을 일으켰다고 한다.(라오우의 영결식을 팬들이 실제로 치러주는 행사가 개최되기도 했고, 2008년?? 탄생 25주년을 기념하여 주인공을 라오우로 바꾼 <북두의 권 라오우전 하늘의 패왕>이라는 외전을 다른 작가가 맡아 그리고 애니메이션까지 선보이는 이벤트를 했다고 한다)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북두의 권>은 1부를 끝으로 완결했다면 어떨까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드는데, 그 이유는 이후 이어지는 2부나 3부의 내용이 1부에 비해 지극히 함량미달이라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작화나 스토리가 결코 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1부가 워낙 강렬했던 탓에 2부나 3부는 어쩔 수 없이 1부와 비교당할 수밖에 없는, 가혹한 운명인 것이다. 작가도 그걸 알고 있었는지, 라오우의 이루지 못한 소망을 켄시로가 대신 이루어주는 형식으로 2부와 3부를 이끌어간다.
2부는 켄시로와 라오우의 대결이 끝난 후 몇 년이 지난 시점에서부터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1부의 마지막에서 병에 들어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유리아와 북쪽으로 은거하러 떠났던 켄시로가 유리아가 죽은 후 라오우의 말 ‘흑왕’을 타고 다시 황야로 돌아오고, 1부에선 ‘꼬마’에 불과했던 린과 바트가 어느새 성인?? 되어 ‘제도의 폭정’에 맞서 혁명군을 이끄는 상태에서 2부의 스토리가 시작된다. 2부는 켄시로와 다시 만난 린과 바트가 혁명군인 ‘북두군’을 규합하여 ‘천제’가 다스리는 제도를 무너뜨리는 이야기이며 그 과정에서 ‘원두황권’이라는 새로운 권법이 등장, ‘천제’를 수호하려는 원두황권의 계승자들과 켄시로가 장대한 대결을 펼친다. 원두황권과의 대결에서 켄시로가 승리한 후, 린이 천제의 일란성 쌍둥이 동생이었다는 것이 밝혀지고 린은 악당들에게 납치당해 바다 건너 ‘수라국’으로 끌려간다. 린을 구출하기 위해 바다를 건넌 켄시로는 그곳에서 ‘북두신권’의 원류인 ‘북두류권’의 계승자들과 처절한 싸움을 벌이고, 작품 속의 마지막 키워드인 켄시로의 출생의 비밀이 밝혀진다. 바다 건너 ‘수라국’에서는 켄시로의 친형인 효우와 라오우, 토키의 친형이자 라오우의 쌍둥이 형인 카이오가 켄시로와 적으로 맞서며 다시금 드라마틱한 스토리를 이끌어가지만, 1부에 비해 어딘지 억지스러운 설정과 작품 스스로의 관성에 빠진 것처럼 보이는 동어반복적인 장면들이 이어져서 이야기가 지루해지고 긴장감이 떨어진다.
3부는 ‘수라국’을 평정하고 돌아온 켄시로가 라오우의 유일한 혈육인, 류라는 소년을 데리고 여행을 떠나 북두신권의 후계자 수업을 시키는 내용으로 분량도 매우 짧고, 스토리의 연속성이 없어 그냥 ‘외전’을 배열해 놓은 느낌이다.
2부가 1부와 굳이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작품의 배경이 되는 ‘세계관’일 것이다. 핵전쟁으로 모든 것이 소멸되어 척박한 황야와 도시의 폐허만 남은 무법자들의 세계를 압도적인 힘과 공포로 다스렸던 ‘권왕의 시대’가 1부의 세계관이라면, 2부는 환경도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고 문명이 다시금 시작되는 시대로 세계관을 바꾸었다는 점일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다시 전기(電氣)를 사용할 수 있게 되고 굶주림과 치안이 어느 정도 회복되는 ‘천제의 시대’에서도 약자들은 여전히 강자들에게 핍박당하고 짓밟힌다. 1부의 ‘무??? 시대’에서는 그저 힘만을 내세운 조직폭력배 같은 악당들이 약탈과 살인, 방화를 저지르며 약자들을 ‘폭력’으로 억압했다면, 2부의 ‘제도 시대’???서는 정치와 신분, 계급과 빈부 격차 같은 ‘사회의 시스템’이 ‘합법적으로’ 약자들을 착취하고 짓밟는다. 특히 3부에서 라오우의 최고 무장 중 한 명이었던 바르고가 자신의 수하였던 마구간지기 코케츠의 책략에 빠져 소처럼 쟁기를 끌며 황무지를 개척하는 장면은 ‘변해버린 시대의 모습’을 상징한다.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 켄시로는, 시대가 어떻게 변했든 간에 상관없이,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과 의리, 약자에 대한 배려와 자애’라는 것을 온몸으로 설파하며 자신의 두 주먹으로 약자들을 핍박하는 악당들을 철저히 응징한다. 작품의 마지막 장면은 바로 이런 ‘강하고 자상한 남자’ 켄시로의 모습을 극대화한 <북두의 권>다운 엔딩이다. 여전히 힘들기만 한 세상에서 약자를 괴롭히는 악당들을 처치하며 “너는 이미 죽어 있다”는 명대사를 내뱉는 켄시로의 모습은, 약자들의 절박한 마음을 형상화한 ‘절망의 ???대’에서 고통에 신음하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메시아의 현신이다. 악당들에게는 한없는 두려움과 무시무시한 공포를 주는 귀신이지만 약자들에게는 한없?? 자애로운 미륵불의 모습을 한 주인공 켄시로의 이러한 ‘매력적인 양면성’은, ‘강한 사내들의 비장미 넘치는 대결’과 함께 이 작품이 명작의 반열에 오르게 한 가장 큰 요소일 것이다. 한때 소년들의 마음에 강렬한 불을 지폈던 장대한 대서사시 <북두의 권>은 이렇게 막을 내리며, 다시 황야로 떠나는 켄시로의 모습을 클로즈업하며 그 전설의 대미를 장식한다.
3. 작품 분석
<북두의 권>은 두 가지의 콘텐츠에서 작품의 핵심적인 요소를 가져왔다. 작품의 외적인 요소(특히 작화에서)인 캐릭터 디자인이나 작품배경, 세계관 설정 등은 본 글의 서장에 언급한 영화 <매드맥스>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핵전쟁이 일어나 사막으로 변해버린 척박한 황야를 개조한 바이크나 자동차를 타고 질주하는 폭주족들의 모습, 그들이 쓰는 무기나 입는 의상, 그로테스크한 외모, 물과 휘발유가 엄청나게 귀하고 식량을 ???하기가 매우 어려운 상태, 물자를 물물교환으로 구하는 모습, 강자가 약자를 ‘폭력’과 ‘공포’로 억압하며 약탈하는 세상의 풍경 등등 작품의 배경이 되는 설정이나 세계관, 디자인들은 대부분 <매드맥스>에서 차용하거나 만화적으로 변용을 극대화시킨 흔적이 작품 전반적으로 느껴진다.
작품의 내적인 요소인 캐릭터들의 감성이나 성격, 스토리의 구조 같은 것들은 흔히들 세계에서 ‘동북아 3국(중국, 한국, 일본)’이라 불리는, 역사의 공감대를 아주 긴 시간 동안 형성하고 있는 아시아 문화권에서 파생된 콘텐츠들로부터 대부분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이는데, 이 작품에 가장 핵심적인 영향을 준 것은 중국무협영화의 영웅이자 세계적인 무비스타 ‘이소룡’의 이미지인 것 같다. 주인공인 켄시로는 쉽게 생각해보면, <매드맥스>의 주인공 맥스의 의상을 입고 ‘맥스의 세계’를 떠도는 ‘이소룡’이다. 북두신권의 화려한 액션을 보여주는 켄시로의 동작과 표정은 이소룡의 영화 속 모습을 그대로 따온 것처럼 보일 정도로 흡사하다. 이소룡의 대표작인 <정무문>이나 <맹룡과강>, <사망유희>, <용쟁호투>에서 볼 수 있는 수많은 결투 장면이나 무술 동작, 인물의 표정, 대사 등등이 켄시로의 모습에서 거의 여과 없이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이런 까닭일 것이다.
<매드맥스>와 ‘이소룡’, 이 두 가지 콘텐츠를 아주 적절하고 독특하게 버무려 이 작품만의 개성으로 특화시킨 것이 <북두의 권>의 성공 요인이자, 이 작품이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 장르의 최고봉으로 수많은 독자들에게 인정받는 이유가 아닐까.
-末-
<북두의 권>의 스토리 속에 근본적으로 녹아 있는 정신은, 동양에서 수천 년을 이어져 내려오며 ‘윤리와 도덕’ 또는 ‘삶의 진리’로 여겨지는 가치들이다. 인의(仁義) 또는 자애(慈愛), 즉 쉽게 얘기해서, ‘사랑과 의리’만이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는 아주 간결하면서도 절박한 메시지이다. 힘이 있는 강자는 힘이 없는 약자의 편에 서서 ‘세상의 악’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고, 나보다는 남을 배려하는 자애로움을 지녀야만 세상이 평화로워지고 고통에 떠는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상 그런 세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며, 세상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힘없는 약자들은 오랜 세월 동안 때로는 폭력에, 때로는 교묘한 시스템에 억???리며 꾸준히 강자들에게 착취되어 왔다. 약자들이 인류의 역사를 통해 간절하게 현신을 바랐던 ‘메시’는 서양에서는 예수, 동양에서는 미륵이었다.
<북두의 권>에는 주인공인 켄시로뿐만 아니라 다양한 모습과 철학, 신념을 지닌 구세주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위에서 얘기한 것처럼, 악(惡)으로부터 약자를 지켜주고 나보다는 남을 배려하며 때로는 대의나 명분을 위해 자신의 목숨마저도 미련 없이 희생하기도 한다. 이 작품을 읽은 수많은 독자들은 캐릭터들의 이런 면에 열광하고 감동받았다.
그러나 우리가 이 작품을 즐기면서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구세주들은 모두 ‘강자’들이라는 것. 압도적인 힘이 있어야 ‘정의’도 ‘평화’도 ‘사랑’도, 그리고 자신의 ‘목숨’도 지켜낼 수 있다는 무자비하고 냉혹한 메시지가 스토리의 기저에 숨어 있는 것이다.
명작의 반열에 오른 이 작품이 단 한 가지, 아주 좋지 않은 영향을 소년들에게 끼친 것이 있다면, ‘힘이 모든 것의 가치에 최우선한다’는 매우 마초적인 신념일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아주 빈약하고 애처롭기만 하다. 그들은 항상 남자들에게 보호받아야 하며, 악당들에게는 약탈의 대상이고, 때로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한 비현실적인 자애의 상징이다. 아무리 만화라지만 이런 점은 사실 좀 받아들이기 거북하다. 세상은 결코 남자들만으로 이루어져 있지도 않고, 힘이 모든 것에 우선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크나큰 결점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갖는 최고의 미덕이 있다면, 그것은 ‘올바른 방향으로 쓰이는 힘이 얼마나 아름답고 감동적인가’를 보여주는 스토리의 완성도와 압도적인 작화, 이야기의 기저에 흐르는 ‘인의와 자애’라는 지고지순(至高至純)의 가치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