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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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발자국 - 짐승의 시간

‘텍스트’는 종이 위에 인쇄된 글이나 그림만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만화책을 이루고 있는 모든 요소가 텍스트다. 칸과 프레임 밖의 표지나 기타 부분에서도 독자는 무언가를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박건웅의 만화 단행본을 처음 접한 독자는 560여 페이지 분량...

2014-11-28 장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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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는 종이 위에 인쇄된 글이나 그림만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만화책을 이루고 있는 모든 요소가 텍스트다. 칸과 프레임 밖의 표지나 기타 부분에서도 독자는 무언가를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박건웅의 만화 <짐승의 시간> 단행본을 처음 접한 독자는 560여 페이지 분량과 하드커버, 그것을 담고 있는 케이스에 심리적으로 압도된다. 한 손으로 가볍게 이 단행본을 드는 성인 여자가 있다면, 쫓아가서 그 팔뚝을 확인해보고 싶다. 처음에 한 손으로 들어봤던 성인 남자라도 어느새 두 손으로 단행본을 들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짐승의 시간>이란 텍스트는 처음부터 독자의 오만을 허용하지 않는다. 

만화 <짐승의 시간>은 김근태가 1985년 9월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10차례에 걸쳐 고문을 당한 기록을 재구성한 작품이다. 이 책을 집어든 독자는 대략 그 정도 사실은 이미 안다. 

<짐승의 시간>의 물리적 무게감에 눌린 독자는 반격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케이스 안에서 알맹이를 꺼내려 시도해본다. 그러다가 갑자기 케이스를 의식하게 된다. 단순한 회색 케이스가 아니라, 그 표면 전체가 어떤 의도로 디자인이 된 결과물임을 직감한다. 알고 보면 김근태를 가두어두고 고문한 7층짜리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 벽돌 건물과 똑같은 디자인이다. 케이스 디자인은 촘촘하게 맞닿은 짙은 회색 벽돌들의 시퀀스, 그 총체로서 대공분실 건물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짐승의 시간>의 종이 텍스트 속 주인공은 이미 대공분실 건물 안에 갇혀 있는 셈이다.

케이스 상단에 네 개의 세로 창이 나 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이 건물의 창 안에 고문실이 있다. 가로는 짧고, 세로는 길어 사람의 머리통 하나도 내밀 수 없는 창이다. 네 개의 창 안에 어떤 행동을 하거나 당하는 사람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벌써 고문이 시작됐거나, 현재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독자가 <짐승의 시간> 케이스에서 책을 꺼내는 행위는 주인공 김근태를 고문의 공간에서 해방시키는 일이다. 만화 텍스트를 읽기도 전에 독자에게 선행을 베풀도록 하는 장치다. 그러나 케이스에서 책을 분리해내는 일은 과연 손쉬운가? 또한 그렇지 않다. 대공분실 건물을 상징하는 케이스는 566페이지를 둘러싼 하드커버 앞뒷면을 꽉 조이고 있다. 책이 나오는 부분을 땅바닥으로 기울이면 ‘스스슥’하는 소리와 함께 텍스트가 미끄러져 내려온다. 천만다행이다. 

책을 케이스에서 해방시킨 독자가 레지스탕스의 기분을 만끽할 여유는 별로 없다. 하얀 하드커버 표지 가운데 놓인 ‘붉은 십자가’ 때문이다. 사실 이건 십자가가 아니다. 김근태가 묶여 있던 고문대다. 더 정확히는 피로 물든 고문대. 십자가는 원래 처형대다. 독자는 인류 구원을 위한 희생의 상징을 몰아내고 야만적인 처형대로서의 십자가를 불러들인 작가의 대담한 해석에 흠칫 놀란다. 고문대는 십자가이고, 십자가는 고문대다. 십자가 디자인이 독자의 가슴에 꽉 박히고, 그 상처에서 흘러내린 독자의 피가 고문대를 다시 붉게 물들인다.   

독자는 피 흘리며 하드커버 앞장을 넘긴다. 양면 전체에 태고의 밤하늘 같은 검은 세계가 펼쳐진다. 그 밤하늘에 나선형 계단, 벽돌, 고문대, 욕조, 변기, 침대 등이 별자리가 되어 어스름하게 빛난다. 독자는 조만간 다가올 암흑의 디스토피아를 예감하게 된다.  

작가는 독자와 거래를 할 줄 안다. 목차가 지나간 후엔 멀리 새가 날고 있는 허공이 한 페이지 전체로 제시된다. 그 페이지 하단엔 서울 시내의 한 건물이 걸쳐 있어 시공간을 짐작하게 한다. 이 페이지로 인해 독자는 숨을 쉬게 된다. 그 옆 페이지에선 사랑과평화의 1978년 히트곡 <한동안 뜸했었지>의 노랫말이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의 세로 창을 연상시키는 세로로 길게 내려진 세 개의 칸을 연결한다. ‘웬일인가 궁금했었지’, ‘혹시 병이 났을까’, ‘너무 너무 답답했었지’라는 노랫말이 음표와 함께 세 개의 칸 윗부분을 장식하며 가로로 흐른다. 독자는 세 칸의 바인더 역할을 하는 노랫말을 따라가면서 본격적인 이야기에 올라탄다.  

566페이지 전체가 흑백 톤이다. 이 안에 담긴 만화는 따라서 읽는 것만으로도 벅찬 고문의 기록이다. 김근태가 남영동 건물 5층 맨 끝 방에서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고문을 10차례 당하는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고문이란 무엇인가’라는 호기심을 가지고 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또 다른 주인공은 ‘고문 기술자’ 이근안을 포함한 고문자들이다. 그들 역시 김근태와 반대편에 서 있는 주인공이다.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목차를 보면 분명하게 드러난다.  


수배자 
돼지 
연행 
1985년 9월 4일 새벽 5시 30분 
칠성대 
1985년 9월 4일 오전 7시 30분 
1985년 9월 4일 오후 8시 
장의사 
1985년 9월 5일 오후 8시 
개구리 
1985년 9월 6일 오후 7시 
1985년 9월 8일 오전 10시 
선데이서울 
1985년 9월 8일 오후 7시 
밥 
1985년 9월 10일 오후 7시 
최후의 만찬 
1985년 9월 13일 밤 10시 
오늘도 무사히 
1985년 9월 20일 오후8시 
빛 
1985년 9월 26일 오후 3시 
당신과 나  

목차는 아예 고문 시간으로 짜여졌다. 독자는 책장을 넘기는 거의 마지막 순간까지 나체가 된 채 물고문, 전기 고문, 전기봉 고문, 심리 고문을 쉴 ??? 없이 당하는 1985년의 김근태를 만난다. ‘심신허약자, 노인, 어린이, 임산부는 보지 마시오’라는 경고문구를 달아야 할 만한 장면이 이어진다. 김근태를 케이스로부터 해방시킨 덕분에 독자는 고문실로 따라 들어가 고문 과정에 동참하게 된다. 아무리 각오했다 하더라도, 더 이상 읽고 싶지 않은 지점이 올 수도 있다.  

그런데 <짐승의 시간>의 작가는 현명하다. 그는 만화를 제작하기 전 독자의 입장을 먼저 생각했다. 똑같이 김근태의 고문을 다룬 영화 <남영동 1985>을 본 관객들이 “너무 피곤하다”고 말하는 것을 참고했다. 독자 자신이 고문실에 갔다 온 느낌을 주는 방식을 버렸다. 김근태의 일대기로 접근하는 방식도 사용하지 않았다. 독자가 이 이야기를 자신과 별개의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김근태의 고문사건과 독자의 현재를 연결시키는 방법을 찾고자 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렇다. 장상용이란 독자는 560여 쪽의 이 무겁고, 버거운 이야기를 중간에 단 한 번 쉬고 끝까지 다 읽어버렸다. 그건 독자의 의지와 별개로, 작가의 스토리텔링이 성공적이었다는 뜻이다. <짐승의 시간>의 도입부는 김근태와 부인 인재근의 연애 이야기다. 똑같이 지명수배 중인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는 어떤 독자도 호감을 갖고 읽을 수 있다. 만약 <짐승의 시간> 도입부가 ‘연행 - 1985년 9월 4일 새벽 5시 30분’부터 다루었다고 가정해보자. 독자는 숨이 꽉 막히는 느낌일 거다. 그 다음부턴 고문실에서 계속 지지고, 볶고…. 어느 순간 책장을 덮지 않을까. 연애 시절을 떠올리는 김근태의 회상 신이 등장하기도 전에. 영화와 달리, 만화는 책장을 덮는 독자의 선택이 훨씬 쉽다.     

작가는 ‘과거’와 ‘현재’를 교차한 구성으로 독자에게 중간 중간 숨 쉴 여유를 불어넣는다. 과거 편의 주인공이 김근태와 고문자들이라면, 현재 편의 주인공은 어쩌면 작가의 분신일지도 모르는 기영이다. 기영은 현재의 시점에서 김근태가 고문당한 발자취를 취재해 나가는 순수한 청년이다. 독자는 기영의 시점에 들어서면 고문실에서 한 발짝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살짝 쉬면서 그 다음 고문을 지켜보기 위한 ‘맷집’을 기를 수 있다. 김근태와 기영이 교차하는 틈이 생기를 불어넣는다. 

‘2014부천만화대상’ 대상에 빛나는 이 작품은 직시(直視)와 증언의 힘을 일깨운다. 이 세상 도처에 부조리가 얼마나 많은가. 요즘은 SNS까지 발달에 부조리가 백일하에 드러난다. 세월호 같은 사건에 가족과 관계자들만 상처받는 것이 아니다. 전 국민이 자신도 모르게 트라우마를 겪는다. 그런 뉴스를 보면 삶이 힘겨워진다. 그래서 피해버린다. 피한다고 문제가 해결될까? 피하는 자들의 마음 한 구석엔 죄책감이 싹튼다. 

모두가 눈을 감거나 돌리더라도 누군가는 똑바로 보아야 한다. 노근리 학살사건이건, 김근태 고문사건이건, 모두가 알면서도 들여다보고자 하지 않는 쓰라린 과거다. 이 사건의 당사자인 고 김근태는 2009년 전남대학교 시국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거대 국가 폭력 앞에 인간은 나약하다. 그렇다고 포기하면 지는 거다. …부조리한 사회에 눈 감고 애써 현실을 외면해 버리는 우리의 무관심과 싸워야 한다.”  

박건웅은 <노근리 이야기> 때와 마찬가지로 <짐승의 시간>을 통해 이 사건을 직시한다. 작가는 두 눈 부릅뜨고 고문 과정과 고문당하는 자의 심리를 시간대 별로 디테일하게 포착해냈다. 고문 시간을 기록한 11개의 목차, 하나하나가 심리적 허들이며 장벽이다. 작가는 그것을 정면으로 돌파한다. 생략하거나 건너뜀 없이. <짐승의 시간>이란 텍스트는 어디에도 공개하지 않고 2년 간 홀로 책상에 앉아 완성한 결과물이다. 그 뚝심, 무시무시하다. 그래서 직접 만나서 작가의 팔뚝을 쳐다보았다. 작가의 팔뚝 피부가 별로 좋지 않다는 사실만 확인했다.             
작가는 그 공을 증언자들에게 돌린다. 가장 중요한 증언자는 김근태 자신이다. 김근태가 직접 쓴 <남영동>, <열린 세상으로 통하는 가냘픈 통로에서 : 김근태 옥중서간집>, <희망의 근거 : 김근태 사회비평집>, <희망은 힘이 세다>가 <짐승의 시간>의 서브 텍스트가 됐다. 심하게 고문을 당한 사람에겐 그 장면을 떠올리는 것 자체가 고문이다. 김근태는 자신이 당한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어둠의 기억들을 끄집어내 증언으??? 남겼다. 또 다른 증언자는 미망인 인재근 여사다. 작가는 미망인과 2번 만나 또 다른 증언을 이끌어냈다. <짐승의 시간>이란 텍스트를 통해 독???는 5공이 고문기술자들을 동원해 어떻게 권력에 복종하게 만들었고, 기억조차 바꾸어놓았는가를 알게 된다. 

텍스트 마지막 부분에 <만남>이란 단편만화가 에필로그 형식으로 삽입돼 있다. 여기서 다루는 핵심 주제는 용서의 문제다. 우리는 고문기술자 이근안을 용서해야 하는가? 훗날 김근태가 이근안을 만난 것 자체가 용서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작가는 ‘용서한다고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던지면서 <만남>의 마지막 두 개의 칸 안에 자신의 예술적 역량을 응축시킨다. 

마지막에서 두 번째 칸을 A, 마지막 칸을 B라고 하자. A는 목사가 된 이근안이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하늘에서 햇빛이 내려와 그의 몸에 내리쬐는 장면이다. 독자는 이근안이 용서받았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B에서 반전이 일어난다. B는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 건물을 멀리서 보여준다. 대공분실 건물은 5층 이하는 창문이 작고, 햇빛이 들지 않는다. 햇빛이 드는 공간은 6층 이상이다. 이근안은 여전히 대공분실 건물에서 편안하게 지내고 있는 것이다.       
  
독자는 비로소 뒷면의 하드커버를 덮는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난 것인가? 훌훌 털어버리면 되는가? 직시와 증언의 힘, 그 자체인 이 텍스트는 결자해지의 책임을 독자에게 남겨놓는다. 완독한 책을 대공분실 건물 자체인 케이스에 다시 끼워 넣어야 하는 일이다. 김근태를 그 곳으로 유배시킨 것 같은 찜찜함을 느끼는 독자는 언젠가 그를 또 다시 해방시킬 날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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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용

작가, 만화평론가
초이락컨텐츠컴퍼니 웹툰사업팀장, 前 부천국제만화축제 사무국장, 前 일간스포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