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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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아파트 공경비

과거 아파트 경비직은 은퇴한 노인들의 전유물이었다. 하지만 평생직장의 개념이 사라지고 정년을 채우지 못하고 타의로 회사를 그만둬야 하는 중년들이 많아지면서, 요즘의 아파트 경비직은 은퇴한 아버지들뿐 아니라 많은 중년 남성들 사이에서 경쟁률 높은 일자리로 칭송되곤 한다....

2014-02-10 이가온
과거 아파트 경비직은 은퇴한 노인들의 전유물이었다. 하지만 평생직장의 개념이 사라지고 정년을 채우지 못하고 타의로 회사를 그만둬야 하는 중년들이 많아지면서, 요즘의 아파트 경비직은 은퇴한 아버지들뿐 아니라 많은 중년 남성들 사이에서 경쟁률 높은 일자리로 칭송되곤 한다.
 
그러나 경비원이라는 일자리의 경쟁률을 떠나 일자리 자체의 속성을 살펴보면, 아파트 경비원은 밤낮 할 것 없이 아파트 입구에서 주민들의 일상을 구석구석 살피며 때로는 가족보다 그들의 속사정을 더 잘 아는 존재이기도 하다. 몇 호에 사는 남편의 퇴근길 한숨소리가 늘었다든지, 몇 호에 사는 고등학생 딸이 지하 주차장에서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든지.
 
아픈 할아버지 대신 임시로 경비원으로 일하게 된 고시생 공병문을 주인공으로 한 웹툰 <장미아파트 공경비>는 한 지붕 아래 사는 가족들도 미처 발견하지 못한 상처를 어루만지는 따뜻한 공경비의 이야기다. 낮에는 고층 건물 유리벽을 닦고 밤에는 대리운전 아르바이트를 하는 공병문은 사실 몇 년째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20대 후반 청년이다. <장미아파트 공경비>는 겉으로는 공병문의 이야기를 통해 청년들의 취업난을 건드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회가 거듭될수록 공병문의 눈으로 바라본 아파트 주민들의 다양한 아픔을 담아낸 작품이다.
 
공경비의 눈에 가장 먼저 띈 인물은 하루에 학원 일곱 군데를 다니는 초등학생 재형이다. 아들의 기분이나 감정이 아닌 오로지 사교육에만 열을 올리는 재형 엄마는 아들의 유일한 친구인 강아지 ‘슬기’를 키우는 것을 반대한다. 심지어 아들과 한 마디 상의 없이 아파트 한복판에 버린다. 이런 엄마를 재형은 마녀라고 부른다. 재형이 가족과 함께 하고 싶은 일은 거창하지 않다. 찜질방에 가서 수건으로 양머리를 만들고 삶은 계란과 식혜를 먹는 것이다.
 
재형의 사소한 소망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사람이 바로 공경비다. 재형 엄마가 버린 강아지를 경비실에서 키우며 재형을 안심시켜준다. 가출을 감행한 재형이 가장 먼저 연락한 사람도 엄마가 아닌 공경비다. 결국 공경비는 재형 엄마를 찜질방으로 가출한 재형에게 데려다주고, 모자의 화해를 돕는다. 덕분에 재형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강아지를 키울 수 있게 됐고, 천천히 엄마에게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이 뿐만이 아니다. 공경비는 왕따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된 여고생 장숙의 외로움도 달래준다. 부모님은 매일 야근이나 회식 때문에 바쁘고, 장숙은 어두운 집에서 혼자 잠들기 일쑤다. 그런 장숙에게 “밥은 먹고 다니냐”는, 누구나 물어볼 수 있지만 그동안 아무도 물어봐주지 않았던 공경비의 따뜻한 말 한마디에 감동을 받는다. 그녀는 공경비가 끓여준 사발면 하나에 따뜻한 정을 느끼며 서서히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한다.
 
중학교 시절 왕따를 당했던 장숙은 당시 부모님이 자신을 감싸주기는커녕 부부싸움의 불씨가 됐던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다. 중학교 시절 친구들에게 맞고 삥 뜯겨도 네 잘못이니 전학 가라고 강요당했고, 고등학교에 입학해 남들이 자신을 괴롭히기 전에 먼저 친구들을 괴롭혔더니 그것도 네 잘못이라고 지적받았다. 어떻게 해도 늘 자신의 편은 아무도 없었던 셈이다. 공경비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공경비는 초등학생 재형의 외로움, 여고생 장숙의 억울함을 모두 감싸줬다. 그렇게 공경비가 바꿔놓은 장미아파트 풍경은 사소하지만 실로 중요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슬프게도, 정작 공경비 자신은 “연애도 사치”라고 여기며 경비 일과 고시 준비를 병행하는 청년이다. 그런 공경비와 로맨스를 만들어가는 대상이 편의점 알바는 기본이고 하객 알바부터 맞선 대행까지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는 현경이라는 점은 꽤 의미가 깊다. 두 사람의 로맨스를 통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들의 서글픈 모습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공경비와 현경의 첫 만남은 공경비가 대리운전 아르바이트를 하던 때였다. 현경은 공경비가 대리 운전하던 자동차 뒷좌석에서 성희롱을 당하고 있었다. 첫 만남부터 달콤한 로맨스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공경비가 일하는 아파트에 사는 현경은 그 이후로도 종종 공경비와 마주치며 그에게 도움을 받는다. 술에 취해 떨어뜨린 휴대폰을 찾아주고, 하객 아르바이트 뒷풀이로 인해 만취한 자신을 업어주고, 면접 보러 가는 길에 잃어버린 수험표를 갖다 주는 등 공경비가 현경에게 베푸는 도움도 두 사람이 발 딛고 있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아름답게 포장하지 않아 더욱 아름다운 20대의 로맨스. 편의점 알바생 현경이 공경비에게 고마운 마음을 담아 건넨 첫 선물은 유통기한이 하루 지나 팔지 못한 삼각 김밥과 샌드위치들이었다. 분위기 있는 커피숍 대신 자판기 커피를 마시고, 술자리에서도 달콤한 고백 대신 씁쓸한 신세한탄만이 오간다. “좋은 호텔 커피숍에 갈 수 있을 땐 자판기 커피가 낭만, 없어서 오는 거면 생활”이라는 현경의 신세한탄처럼, 20대들이 살기 쉽지 않은 세상이다.
 
그래서 더욱 공감이 가는 로맨스다. 공경비와 현경은 서로 현실에 찌들어 힘들어할 때 나타나 도와주는 존재다. 현경이 면접에 지참해야 되는 수험표를 잃어버렸을 때, 병문이 입주민의 억지주장에 아무 말도 못하고 있을 때처럼. 그리고 그럴 때마다 자판기 커피를 나눠 마시면서 말없이 서로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낸다. 서로 비슷한 처지에 공감하면서 호감을 키워가는 병문과 현경의 로맨스는 이 시대 수많은 취업 준비생들에게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공병문의 할아버지는 손자에게 경비직을 임시로 맡기면서 이렇게 말한다. “한 달 알바 죽어라 해서 88만원, 아파트 경비직 88만원. 엎어치나 매치나, 매한가지 아니여? 요즘 세상에 경비는 쉬운 줄 알어?”라고 말이다. 처음엔 펄쩍 뛰던 병문도 할아버지의 따끔한 현실 직시에 할 말을 잃는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20대는 가장 아름답고 반짝반짝 빛나야 할 시절임에도 비싼 등록금에 취업난까지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다. 오죽했으면 연애, 결혼, 출산 세 가지를 포기한 세대라는 뜻의 ‘삼포세대’라는 신조어가 생겼을까. <장미아파트 공경비>의 공병문과 조현경 역시 예외는 아니다. 거대한 꿈을 안고 사법고시 준비를 했지만 매번 돌아오는 결과는 낙방뿐이다. 할아버지 대신 일하는 경비원 자리도 감지덕지해야 되는 처지다. 현경도 수없이 이력서를 넣지만, 면접을 보는 것조차 하늘에 별 따기다.
 
이처럼 주인공들의 우울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장미아파트 공경비>가 결코 어둡지 않은 건, 공병문의 긍정적인 성격 덕분이다. 10년 가까이 고시생 신분이지만 사랑까지 포기하지는 않는다. 현재 자신의 처지에 연애가 사치라는 사실을 알지만, 적어도 자신의 감정을 부정하진 않는다.
 
공경비는 아파트 주민들의 남모를 상처를 보듬어주면서 이제는 경비직에 보람까지 느끼고 있다. 물론 현실에서도 이런 경비원들이 존재하는지는 알 수 없다. 오히려 타인의 관심을 간섭으로 치부하는 세상에서 공경비가 베푸는 호의 같은 것들은 도리어 ‘당신이 뭔데 참견이냐’는 비난의 화살로 돌아올 수도 있다. 요즘 아파트 입주민들에게 경비원은 택배를 대신 받아주는 사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존재로 각인된 경우가 많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