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비 (말을 하려고 하면서 아직 못 함)
그간 우리가 봐왔던 만화의 화법과는 모양새가 완전히 다른 만화를 만났다. 작가 ARIA의 [비비(??)]. 제목에 쓰인 ‘비’는 다소 생경한 한자인 ‘표현 못할 비’자다. 이 글자를 두자 연속으로 쓰면, ‘말을 하려고 하면서 아직 못함’이란 뜻을 가진다. 작가 ARIA...
2014-02-20
김현국
그간 우리가 봐왔던 만화의 화법과는 모양새가 완전히 다른 만화를 만났다. 작가 ARIA의 [비비(??)]. 제목에 쓰인 ‘비’는 다소 생경한 한자인 ‘표현 못할 비’자다. 이 글자를 두자 연속으로 쓰면, ‘말을 하려고 하면서 아직 못함’이란 뜻을 가진다. 작가 ARIA가 만화 [비비]를 통해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은 무엇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만화는 그림으로 이야기의 바탕을 세운다. 그리고 그 위에 말칸과 그 안에 대사를 배치시켜 그림과 조응하며 캐릭터의 성격과 서사의 디테일을 지어나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이 만화에는 말칸이 아예 없다. 기존의 만화와는 다른 DNA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익숙하게 봐왔던 만화가 아니라서 얼핏 보면 일러스트의 나열에 덧붙여진 텍스트가 마치 지문이나 나레이션처럼 보일 수도 있다. 굳이 작가가 말칸을 배제한 이유가 궁금하기도 하고 일반적 형식을 일탈한 것이 왠지 새롭게 느껴지는 이유도 궁금하다. 만화의 도입 부분에 이렇게 적혀 있다. ‘잔혹하고 지독히도 긴 전쟁이었다. 살생이 더 이상 살생으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모든 감정이 무뎌지는 아수라장.’ 대사인지 나레이션인지, 그리고 화자가 누구인지도 불분명하다. 읽는 이로 하여금 초반부터 중압감을 갖게 만드는 화두이다. 마치 작가가 설계해놓은 ‘판타지 세계’가 독자들에게 노골적으로 싸움을 거는 선전포고처럼 느껴지는 문장 같기도 하다. 이 문장을 넘어서면 독자들은 이제 전쟁에 곧바로 휩싸일 수밖에 없다. 전쟁을 겪고 있는 이 세계는 어떤 곳이고, 어떤 이들이 존재하며,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이야기의 큰 줄기는 작가가 초반부에 드러내놓고 있는 ‘전쟁’이다. 이 전쟁은 신들의 왕인 ‘신황’의 자리를 놓고 그 자리를 빼앗긴 자와 빼앗은 자와의 싸움. 그 싸움의 열쇠를 손에 쥔, 절대 힘을 가진 인간 카이제. 비록 신들이라 할지라도 그에게는 함부로 대항할 수 없다. 이 부분이 이 만화에서 보여주는 특이한 설정이다. 인간의 힘에 굴복한 신들의 모습은 나약하게 묘사되고, 뒤에서 모반을 꿈꾸는 비굴한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런 설정에서 독자들은 그간 견고하게 지탱되고 있던 상식의 일탈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비비]엔 인간과 신 그리고 요정계까지 가세한 세계관이 정교하게 설계되어 있다. 그 세계관을 바탕으로 펼쳐지는 플롯의 얼개 안에서 작품은 인간과 신 그리고 요정은 물리적 힘을 겨루기도 하고 사랑, 연민, 질투, 번뇌의 복잡 미묘한 감정들을 주고 받는다. 카이제의 도움을 받아 새롭게 등극한 신황은 카이제가 가지고 있는 절대적인 힘에 두려움을 갖고 있다. 신황으로 완벽하게 각성을 하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그 두려움은 의심으로 확장된다. 피티는 급기야 카이제의 심장을 요정계의 여왕인 수이의 힘을 빌려 봉인하고 통제하려 한다. “그대는 이 자리에 있을 때 불안하지 않았는가?” 티피는 대답한다. “...왕좌는 참으로 고독한 자리였어.” 절대 권력인 왕좌에서의 불안은 고독은 같은 것임을 의미하는 장면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 왕좌의 힘을 갈구하는 두 신황의 고백담이기도 하다. 마왕의 힘을 얻은 카이제는 너무 강해서 역으로 주변의 모든 것들로부터 적으로 취급당하는 아이러니에 놓인다. 그리고 그 적으로부터 끊임없이 도전을 받는다. 불운을 관장하는 하급신으로 카이제의 주변을 맴도는 ‘연비’, 카이제의 집사이자 긍정적이고 명랑한 소년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테일’과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 집사 ‘리에’. 그리고 카이제와 신황, 전대신황 티피를 오가며 수수께끼 같은 저울질을 하고 있는 요정 여왕 수이. 각성으로 완벽체의 신황이 되고자 했으나, 각성과 동시에 신이면서 자아분열에 이른 신황과 그 틈을 효과적으로 공략해 다시 왕좌를 찾은 티피. 그리고 이미 자신이 처할 비극적 결말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이 티피에 의해 소멸의 형을 당하는 카이제와 그의 또 다른 인격체로 설정된 테일이 뒤엉키면서 분열해 내는 스토리는 읽는 이의 몰입을 이끌어낸다. 거기에 더해 마왕의 힘을 얻은 카이제와 마왕의 힘을 유전적으로 이어받은 연비의 비극적 관계는 이루지 못할 안타까운 러브 스토리의 감성으로 표현해내고 있어 애틋한 순정만화의 감성까지 담아내고 있다. 신보다 강한 힘을 가졌지만, 인간이기에 가질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약점인 ‘따뜻한 마음’ 때문에 번민하는 카이제. 그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든 전대의 황 티피는 자신의 자리를 되찾고, 카이제를 소멸시킨다. 하지만 이야기는 다시 카이제의 분신이랄 수도 있는 테일의 기억으로 되돌아가는 순환 플롯으로 윤회하며 끝을 맺는다. 만화의 처음과 끝이 연결되는 지점을 미리 치밀하게 설정해 놓았다. 그리고 이것은 또다른 이야기를 잉태하고 있는 지점으로도 여겨진다. 등장하는 캐릭터의 감정선이나 행동들이 미묘하게 엮이고 서로의 감정과 반응을 조절해 나간다. 이 만화의 추진력은 화려한 연출도 아니고, 역동적인 장면의 연속도 아니다. 한 장 한 장 완성도 있게 그려진 일러스트의 연속적인 배치와 거기에 걸맞게 뿌려진 대사와 나레이션들이 이야기의 완급을 조절하며 새로운 만화의 영상미를 만들어내고 있다. 어쩌면 만화 [비비]가 주시하고 있는 것은 ‘파격’일지도 모르겠다. 파격의 틀을 가지고 파격의 서사를 독자들과 나누려고 한다. 우리가 관습적으로 받아들인 신과 인간의 관계를 비틀어 버림으로써 통속적 신과 인관 관계의 뼈대를 새롭게 재구성해 냈다. 신보다 우월한 힘을 지닌 인간. 인간의 힘을 두려워하는 신. 인간을 이성(異性)으로 사랑하는 여신과 절대적 ‘힘’에 운명적으로 끌리는 비극적 역할의 요정까지 등장시킨다. 이들의 감정들은 모두가 금단의 선을 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런 ‘낯섦’의 연결들이 자칫 지루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장편 판타지 서사의 함정을 피해간다. 독자는 서사의 순간 순간을 정적으로 채워 연결하는 듯한 연출력과 느리게 점묘하는 스토리텔링에 이끌려 가다 마지막 장을 덮을 때 작가가 치밀하게 구성해 놓은 플롯에 매료되는 순간과 만나게 된다. 작품을 다 읽고 나면 ARIA란 필명의 작가에 대해서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책에 소개된 작가의 이력은 이렇다. ‘2011년 한국 최초 미국 아이북스 30주 연속 카테고리 1위, 2012년 대한민국콘텐츠대상 해외진출유공자부문 문화체육관광부장관 표창’. 그간 해온 작품에 대한 이력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이 작품이 본격 데뷔작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꽤 의미심장한 이력을 쌓았다. 작가는 항공사 직원으로 근무하다, 어릴 때 써놓은 시나리오를 우연히 발견하고 그것을 작품으로 형상화하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동심의 상상으로 그려놓은 이야기에 뒤늦게 창작의 세계로 뛰어든 작가의 결기가 어우러져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새로운 형태의 만화 걸작을 만들어 냈다. [비비]는 모 포털 사이트의 공모작으로 데모 버전이 먼저 소개되었다. 그리고 프롤로그만으로도 독자들의 호응도가 높아 정식 연재도 제안을 받았다. 그러나 작가는 연재를 과감하게 포기하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만화를 만들기 시작한다. 매회 매회 포털 사이트 연재란에서 다른 작품들과 경쟁하고 조회수의 압박을 받으며 연재를 끌고 나갈 호흡의 작품이 아니라는 판단에서다. 그리고 새로운 도전은 미국 아이북스에 전자책으로 작품을 발표로 이어지고 곧바로 주목을 끌며 놀라운 다운로드 수를 기록한다. 2014년 초 전4권으로 완간돼 묶여 나온 만화 [비비]는 이렇게 만화의 또 다른 가능성을 열어놓은 작품으로 인정 받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