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절기
어느 날 갑자기, 난데없이 끝도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과 정면으로 마주친 중년의 여자가 있다. 그녀 앞에 던져진 고통의 날들. 눈에 뻔히 보이는 절망의 연속이 될 것임에 분명하다. 하나뿐인 아들도 다 키워놓았고 남편은 외국에 나가 사업도 잘하고 있었다. 그런데 불쑥...
2013-12-02
김현국
어느 날 갑자기, 난데없이 끝도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과 정면으로 마주친 중년의 여자가 있다. 그녀 앞에 던져진 고통의 날들. 눈에 뻔히 보이는 절망의 연속이 될 것임에 분명하다. 하나뿐인 아들도 다 키워놓았고 남편은 외국에 나가 사업도 잘하고 있었다. 그런데 불쑥 눈앞에 펼쳐진 모습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다. 교통사고를 당해 언제 깨어날지도 모를 의식 불명인 아들 수현도 힘겹기만 한데 게다가 외국에서 사업을 하며 떨어져 사는 남편은 이미 자신을 배신한 상태임을 깨닫는다. 그러나 그녀를 더 큰 고통으로 내몰고 있는 존재가 있다. 아들과 함께 교통사고를 당했지만 저만 멀쩡한 친구 용준이 바로 그다. 어머니란 존재의 속성은 아들의 가장 친한 친구 역시 아들처럼 여기는 게 자연스럽다. 고교 시절부터 절친한 사이였던 아들 수현과 용준이었다. 우울증 때문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어머니를 둔 아들의 가장 친구 용준. 홀로 세상에 던져진 용준. 어머니라면 어찌 그 아이에게 맘이 가지 않을까. 군대에 간 수현을 대신한 아들. 함께 면회를 가주며 챙겨주는 용준은 그녀에게 또 다른 아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날의 교통사고만 아니었다면, 그리고 영원히 깨어날 것 같지 않은 잠에 빠져버린 아이가 수현이 아니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렇게 불면과 불안과 고통의 나날을 보내는 그녀는 아들 수현과 용준 사이를 이어놓고 있는, 용납할 수 없는 끈의 실체를 눈치 채게 된다. 아들처럼 여겼던 용준은 이제 증오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증오를 겉으로 양껏 드러내지 못하며 끙끙댄다. 그녀가 드러낼 수 있는 미움의 표현은 하나밖에 없다. 관계의 단절. 더 이상 찾아오지 말라며 단호하게 밀어내는 것. 그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의사 표현이자 그녀 마음 속에 불같이 일어나고 있는 화를 대신할 수 있는 최소한의 몸짓인 것이다. 그녀는 결국 모든 아물지 않는 상처를 다시 추스르며 수현을 데리고 누구도 찾지 않을, 누구도 다시 대면하지 않을 요양원에 둥지를 튼다. 시간과의 싸움, 죽음과 삶의 경계에선 아들을 붙잡고 있는 손에 다시 힘을 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러나 힘에 부친다. 남들과 비슷하게 사는 거 정도만 바라온 인생이었다. 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해 식물인간이 될지도, 믿고 의지하던 남편이 배신할지도 몰랐다. 그리고 아들이 남들처럼 평범하게 이성을 만나 사랑을 하게 될 줄 알았다. 아들이 엄마한테 해선 안 되는 세 가지 말이 있다. ‘나 스님 될래’와 ‘나 오토바이 탈래’, 그리고 차마 직접 언급하지 못하는 나머지 하나. 그 나머지 하나 때문에 결국 아들은 식물인간이 되었다고, 그런 상황에 빠졌기 때문에 남편이 배신한 거라고 생각하니 미칠 지경이다.용준. 그는 수현과 둘만의 여행길에서 맞닥뜨린 불행에 온몸을 던져버리고 스스로 형벌을 내리고 있었다. 운전대를 수현에게 넘겨주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사고였다. 수현 대신에 자기가 식물인간이 되었어야 했다. 아마도 그 편이 훨씬 더 감내하기 쉬울 것이다. 감당해야 할 모든 것이 자기 탓이다. 원망스럽다. 제일 원망스러운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다. 성장기에 맞이해야 했던 어머니의 죽음도. 아버지와 형과의 단절도. 그리고 사랑하는 친구 수현의 사고도. 다시는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고 매몰차게 몰아내는 수현의 어머니를 뒤로 하고 절망은 더 깊어진다. 수소문 끝에 요양원을 찾아온 용준. 그나마 수현의 어머니가 서서히 용준에 대한 거부의 눈길을 거둬 들이는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이다. 요양원에서 다시 맞은 수현의 생일. 바라는 것이 없냐는 수현의 어머니의 물음에 용준은 답한다. 무언가를 바라면 늘 안 되는 삶이었으며 어쩌다가 욕심이라도 내면 다 빼앗기는 삶이었다고. 그래서 이젠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세상에 태어나 한줌의 ‘희망’도 원하지 못하는 삶을 살아가는 용준.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말로 하지 못하는, 바라는 것이 딱 하나 있을 것이다. 바로 수현이 깨어나는 것. 그렇지만 용준은 그냥 아무 일도 안 생겼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용준의 말에, 수현의 어머니도 나지막이 읊조린다. “그래, 아무 일 없는 게 어쩌면 제일 좋은 거지.” 때론 절망을 견뎌내다 보면 뜻밖의 선물을 손에 쥐어주는 게 인생이다. 기적처럼 깨어나는 수현. 그리고 이제 훌훌 모든 것을 털어버릴 수 있을 때, 용준과 수현은 다시 그 질박한 관계의 끈을 다시 맺는다. 상처는 아물 것이다. 사랑으로 덮일 것이다. 이 만화는 표면적으로 ‘동성애’라는 코드를 다루고 있는 듯 보인다. 수현과 용준은 육체 관계를 맺을 만큼 깊은 사이다. 그러나 굳이 ‘동성애’에 대한 너그러운 사회의 이해를 구하거나 상투적으로 동성애자들의 인권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저 사람과 사람이 나눌 수 있는 사랑의 몇 가지 모습과, 그로 인해 받을 수 있는 상처와 지탱하고 있는 믿음이 붕괴되었을 때 나타나는 상흔과 통증에 대한 이야기일 뿐이다. 그것들을 정갈하고 절제된 그림으로 담담하게, 솔직하게, 속삭이듯 꺼내놓고 있다. 그래서 읽는 내내 마음이 더 아프다. 하지만 아픈 마음을 스스로 다독거리며 읽어내고, 책장을 덮을 즈음엔 어느새 속으로부터 새살이 돋아나와 상처를 말끔히 채워주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남들에게나 있을 법했던 갑작스런 사고. 내 가족은 피해갈 수 있으리라 여겼던 불행. 그리고 가족의 해체. 그러나 그 어둡고 긴 터널을 묵묵히 걸어내다 보니 새로운 의미가 삶에 부여되고 있음이 다행스런 일이다. 내가 피해가는 고통이 타인에겐 숙명처럼 다가갈 수도 있다. 남들이 운 좋게 피해버린 불행은 또 어느 날 불쑥 나를 찾아와 고통으로 몰아넣는다. 우리는 어떻게 아픔과 불행과 그로 인해 생기는 상처를 덮어가야 하는가? 그렇게 희비가 교차되며 반복되는 인생에 대한 답이 읊조림으로 들려오는 듯하다. 비록 그것이 정답이 아닐지라도. 아니 정답이 없을지라도 그 소리를 이 만화를 통해 한번 들어볼만 한 것이다. 인생은 상처와 위로의 시간으로 다가오는 환절기인 것이다. 만화 <환절기>는 글 이동은, 그림 정이용, 두 작가의 처녀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이 예사롭지 않다. 절제된 연출과 이야기의 중요한 모티브가 되는 변곡점에서도 굳이 말을 아껴가며 스토리를 풀어놓는다. 그러나 장면의 연출과 서사의 흐름에 관해서는 오히려 플래시백을 남용하듯이 사용하고 있다. 시간과 공간의 벽을 능수능란하게 넘나드는 것은 물론 씨줄과 날줄을 과감하게 엮어가며 이야기를 짜맞춰나가는 것이 놀라울 정도다. 캐릭터의 미세한 얼굴 표정을 순간순간 절묘하게 잡아내며 감정 표현을 극대화한다. 말 칸 안의 텍스트는 스토리와 할 이야기들을 굳이 다 쏟아내지 않는다. 대신에 그림과 조화를 염두에 두고 절제와 축약을 통해 읽는 이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도록 유도하는 장치를 해 놓았다. 이제야 만화 <환절기>로 첫 작품을 내지만, 이 두 작가가 그간 얼마나 만화에 대해서 깊이 공부하고 성찰해 왔는지 충분히 짐작이 간다. 그래서 이 두 작가가 앞으로 얼마나 함께 공동 작품을 해나갈지는 모르겠지만, 다음 작품에 대한 기대를 한껏 가지기에 충분하다. 작가들의 이런 만화 작화 방식이 독자들에게 몰입을 선물하는 것은 당연하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이야기(이동은) 얼개에, 거침없어 보이지만 최대한 절제를 담아낸 선과 먹으로 표현한 그림(정이용)이 완벽하게 조화된다. 즉흥적인 재미와, 짜릿한 반전, 그리고 화려한 수사들로 가득한 만화도 좋지만, 가끔은 이렇게 조용한 울림을 던져주는 만화와 접하는 것은 긴 노동 끝에 간신히 얻은 휴식처럼 달콤하다. 비록 담고 있는 이야기는 더없이 아프고 피하고 싶은 것이지만, 결국 만화 <환절기>가 독자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희망의 목격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