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천루
로봇과 인공생명체를 통해 본 인간상실의 모순과 부조리 이시구로 마사카즈를 처음 만나는 독자라면, 의 독서 경험은 신선하다 못해 충격적이다. 서점에서 야한 책을 확보하기위해 치밀한 작전을 구사하는 세 소년들의 은밀한 모의로 시작하는 이 만화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
2013-11-28
황민호
로봇과 인공생명체를 통해 본 인간상실의 모순과 부조리 이시구로 마사카즈를 처음 만나는 독자라면, <외천루>의 독서 경험은 신선하다 못해 충격적이다. 서점에서 야한 책을 확보하기위해 치밀한 작전을 구사하는 세 소년들의 은밀한 모의로 시작하는 이 만화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그러나 책의 마지막 면을 덮는 순간, 그렇게 시작한 만화가 다양한 알레고리를 동원하여 많은 상념의 근거들을 안겨주더니 이렇게 씁쓸하게 끝날 줄을 몰랐다는 의외성의 무게에 짓눌려 한동안 할 말을 잃게 된다. 무엇보다 <외천루> 라는 제목이 주는 중압감이 만만찮다. ‘미스터리 이공간 외천루’ 라는 표지의 모호한 카피를 쫒다보면 어마어마한 마천루와 그곳에서 벌어지는 미스터리한 사건의 전개를 연상하기 쉽다. 그렇지만 막상 작품을 들여다보면 ‘외천루’는 그저 증축, 개축을 많이 해서 내부가 미로처럼 생겨먹은 공동주택건물일 뿐이고 더욱 어이없게도 ‘외천루’라고 불리게 된 것도 ‘외천루’라는 팀 이름을 가진 폭주족들이 건물외벽에 다녀갔다고 남긴 낙서 때문에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설정을 확인하는 순간 비로소 <외천루>라는 제목에서 자유로워 질 수 있다. 단지 사건이 벌어지는 공간이외의 의미는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천루>는 결코 편하게 읽을 수 없는 만화이다. 무엇보다 도입부부터 만화의 정체성이 의심스러울 만큼 스토리 전개가 산만하고 혼란스럽다. 1화에선 야한 책을 보고 싶어하는 아리오, 세리자와, 다이치 세 소년과 아리오의 누나인 키리에가 등장하여 소년들의 성적 호기심과 욕망의 분출을 다룬 만화인가 싶더니 2화에선 10년이란 시간이 경과하여 어른이 된 아리오와 다이치가 조우하고, 느닷없이 액자소설의 프레임을 빌어와 다이치가 출연한 드라마를 통해 로봇의 세계로 진입해 들어가더니 3화는 로봇을 학대하는 주인이 알고 보니 그 또한 로봇이었다는 작은 반전이 펼쳐지면서 본격적으로 로봇을 다룬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러나 4화에선 로봇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첫 번째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이 만화는 모두 9화로 구성되어 있는데 절반에 가까운 4화가 진행되도록 작품의 맥락이 잡히지 않는다. 등장인물이나 소재로 볼 때 특별한 연관성이 없는 별개의 작품으로 구성된 단편집 같아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후반부에서 펼쳐질 극적 반전을 염두에 둔 작가의 계산된 테크닉이다. 세 건의 살인 사건이 우연이거나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모두 유기적인 연관성을 지니고 있으며 단절된 내용들 같지만 전반부에는 나머지 후반부를 유지해 나가는데 필수적으로 소요되는 많은 단서와 복선들이 무수하게 깔려있다. 일테면 의미없어 보이는 외천루 B312호의 클로즈업, 반복해서 나타나는 하드를 입에 문 소녀, 꼼꼼한 작전을 구사하고 치밀한 추리를 해내던 세리자와의 집요한 성격묘사 등은 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결코 소홀히 보아 넘길 수 없는 요소들이다. 4화부터 줄을 잇는 살인사건은 외견상으로는 이 만화를 유지해 나가는 가장 큰 재미 요소이다. 우선 외천루 403호 남자가 집에서 시신으로 발견된다. 야마가미 형사에 의하면 외천루는 ‘상식이 안 통하는 곳’이다. 그래서 상식 밖의 미스터리한 살인들이 줄을 잇는다. 5화에서는 인간이 만들어 사고 파는 인공생명체 페어리의 규제에 대한 토론회가 개최되던 토론회장에서 규제 반대파였던 인공생명학자 키쿠치 박사가 다잉 메시지를 남긴 채 피살되는 두 번째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두 사건의 공통점은 피살자가 모두 페어리와 관계있는 인물이란 것인데 이것을 페어리에 대한 동시다발 테러로 규정한 사쿠라바 형사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방법으로 무리한 수사를 진행해 나간다. 선배형사를 대상으로 무리한 현장 확인을 감행하는가 하면 키쿠치 박사의 다잉 메시지를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죄없는 용의자들만 양산해 낸다. 그러나 사쿠라바 형사의 역할은 후반부의 반전의 효과를 극대화시켜주기 위한 계산된 장치이다. 작가가 독자들의 뒤통수를 후려치기 위해 이 만화에 배치한 특수임무 요원인 셈이다. 독자가 사쿠라바 형사에 휘둘려 살인사건의 핵심을 놓치는 동안 만화는 극적인 반전을 위해 치닫는다. 6화에서는 로봇공학자 세리자와 박사가 외천루 C404호에서 시신으로 발견되는 세 번째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그리고 세리자와의 피살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어 나가는 과정에서 1화의 B312호와 소년 아리오가 다시 등장한다. 결국 1화의 뜬금없어 보이던 이야기는 일찌감치 6화의 살인사건을 해결하는데 필요한 중요한 단서로 필요했던 셈이다. 7화에서 키쿠치 박사의 실체와 아리오의 누나인 키리에의 정체가 드러나면서 이 만화의 실체가 안개 걷히듯 드러나기 시작한다. 별개의 이야기가 두서없이 진행되는 것 같아 산만하고 혼란스럽던 만화는 비로소 치밀하게 잘 짜여진 완벽한 미스터리 만화라는 느낌을 안겨 된다. 9화의 극적인 반전이 주는 충격에 비하면 7화의 실체는 아무것도 아니다. 마지막 두 화에서 모든 비밀이 밝혀지는데 만화의 전반을 통해 개별적으로 전개되고 진행되었던 사건들은 마치 흩어져 있던 퍼즐 조각들이 모여 형체를 드러내듯이 완벽한 이야기의 마무리를 보여준다. <외천루>는 세 건의 살인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 사람과 로봇, 인공생명체 페어리가 공존하는 시대의 불안감, 위태롭고 부조리와 모순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인공생명학이나 로봇공학이 인간을 위해 더욱 발전해야 할 분야라고 믿는 키쿠치가 살해된 것은 그의 그런 견해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이다. 구형 고물 로봇인 S-12를 내다버리고 메인 배터리를 박살낸 소녀역시 모델명 P99S의 로봇이었다는 아이러니한 사실은 같은 인간이 인간 위에 군림하는 인간 세태에 대한 알레고리다. 여섯 명을 죽인 것보다 한 명을 죽인 죄가 가벼울 것 같아서 키쿠치 박사를 살해했다고 거짓말 했다는 용의자 M은 자신이 죽인 사람들이 사실은 로봇이었다는 것을 알자 ‘로봇 여섯 대 부순 것 밖에 없고 그렇게 인간처럼 안 생겼으면 착각해서 그런 거짓말은 안했을 거’라며 생명경시의 사고와 로봇과 인공생명체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여실히 드러내 보인다. 등장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작가는 인간성 회복의 메시지를 숱하게 강조하고 있다. 뿐만아니라 결국은 죽음에 이른 키쿠치나 세리자와처럼 닥쳐올 로봇과 인공생명체의 시대에 관련된 정보와 지식을 사사로운 일에 활용한다면 세계는 혼란에 빠지고 불행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경종도 함께 울려주고 있다. 아리오와 키리에의 라스트 씬은 많은 것을 생각게 한다. 인간의 존엄성을 모르는 인간세상에 인공생명체가 가당키나 한 것인지... 한 권의 만화가 주는 무게감은 이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