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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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수의 달인 (맛의 진수)

“그날 점심시간에 무심코 들어간 카레집의 치킨 카레...그것이 제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의식주(衣食住)가 인간사의 기본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문명이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이 ‘삶의 기본’은 더 이상 ‘필요’의 대상으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

2011-12-19 김진수
“그날 점심시간에 무심코 들어간 카레집의 치킨 카레...그것이 제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의식주(衣食住)가 인간사의 기본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문명이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이 ‘삶의 기본’은 더 이상 ‘필요’의 대상으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향유’의 대상 또는 ‘욕망’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할수록 세 가지의 요소 모두가 엄청난 변화를 보여주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식(食)’에 관한 부분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이젠 ‘미식(美食)’, 또는 ‘미식가(美食家)’라는 단어가 대중들에게 일반적으로 쓰일 정도가 되었다. “먹는 것”, 또는 “먹는 행위”가 ‘본능’이나 ‘생존’같은 단어가 의미하는 ‘삶을 영위하기 위한 기본 행위’가 아니라, ‘미(美)’라는 쾌락의 영역, 문화의 영역, 예술의 영역으로 진입한 가치나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쉽게 얘기해서 사람들은 이젠 단순히 ‘먹을 것’을 찾아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맛있는 먹을 것’을 찾아서 움직인다는 뜻이고, 이것은 자본주의의 시스템 하에서 관련업계 내의 치열한 경쟁을 통해 ‘우위성’을 입증한 ‘음식’ 또는 ‘요리’가 ‘잘 팔린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먹을 것을 선택한다’는 ‘사치’는 지구의 어느 곳에서 아직도 굶어죽는 어린아이들이 나오는 현실이 존재하는 한 참으로 불편한 진실이다. ‘섭생(攝生)’이라는 인간이 삶을 영위하기 위한 가장 신성하고 기본적인 행위가 자본주의의 대표적 ‘상품’으로, 경쟁을 통해 비싼 값을 치러야만 얻을 수 있는 ‘거래의 대상’으로, 자신의 높은 지위나 허영심을 증명하는 ‘사치품’으로 변질된 것은 참으로 언짢고 짜증나는 일이다. 원래 신간만화 한 편 소개하자고 쓰는 이 리뷰에서 사회학 박사논문처럼 너무 거창하게 들어간 것 같은 느낌이 없지는 않으나, 이렇게 거창하게 서두를 꺼낸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허영만의 ‘식객’ 성공 이후로 슬슬 ‘요리만화’, ‘음식만화’에 대한 수요가 발생하고 관련된 작품이 서서히 증가하는 추세이다. 그 중에서는 순정만화잡지 ‘윙크’에 연재된 조주희의 ‘키친’같은 한국적인 감수성이 음식과 절묘하게 결합된 수작(秀作)도 등장했고, 일본산(産) 요리만화의 플롯이나 스토리, 설정을 그대로 따라한 부끄러운 표절작품이 있기도 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장르의 기본으로 참고하고 있는, 매월 수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다양한 장르의 일본산 요리만화는 어떤 뼈대를 갖고 있는가? 그리고 그들의 한계는 과연 어디까지일까? 이 막연한 궁금증이 학습의 동기를 유발했고, 나름 시간과 노력을 들여 학습하자, 나는 일본산 요리만화에 존재하는 일정한 형태의 ‘틀’을 깨달았다. 위의 거창한 서두는 내가 깨달은 일본산 요리만화의 기본적인 ‘틀’에 녹아있는 중요한 흐름 중 하나이고 본론에서 내가 찾은 ‘뼈대’들에 관해 풀어볼까 한다. 물론 이 리뷰는 “육수의 달인”이라는 ‘전형적인’ 일본산 요리만화의 소개글이며 내가 발견한 ‘틀’을 적용해 소개하도록 하겠다. “전 세계에 불과 70명뿐인 별 셋짜리 셰프가 우리를 위해 요리를 만든다, 오늘 밤은 그 화려한 사치에 흠뻑 취해봅시다.” 일본산 요리만화의 첫 번째 뼈대는 ‘가장 자본주의적인 설정을 뒤엎는 주인공의 존재’다. “육수의 달인” 주인공인 천재요리사 다이고 야타는 과거에 “유럽사교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전설의 출장요리사”다. 수많은 셀러브리티들과 권력자들이 그의 요리를 맛보기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거금을 걸고 예약을 해댔고, 말로는 형용키 힘든 ‘엄청난 맛’을 선보이던 그는 어느 날 부와 명예를 뒤로 한 채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수년이 지난 후 고향인 일본에서 자신이 ‘의뢰’를 선택해 나타나는 출장요리사로 다시금 발견된다. 그러나 다이고 야타는 더 이상 소수의 권력자나 부자, 유명인들만을 위해 요리를 만들지 않으며, 그들이 허영과 사치의 도구로 자랑하는 희귀한 고급재료를 쓰지도 않는다. 그저 다만, ‘손님의 웃는 얼굴’을 보기위해 출장요리를 고집할 뿐이다. 예산이 적으면 적은 대로, 많으면 많은 대로, ‘자신의 목적’에만 충실할 뿐이다. 이런 유형의 주인공은 일본산 요리만화에 많이 등장하는 패턴으로 소위 말하는 무협지에 등장하는 ‘은거한 절정 고수’ 스타일인 것이다. “육수의 달인이 우려낸 육수에.... 돼지의 생명이 깃들었다.” 일본산 요리만화의 두 번째 뼈대는 ‘주인공만의 명확한 무기’다. 모든 요리만화에는 ‘장르’가 있는데 ‘와인’을 주제로 한 “신의 물방울”의 주인공은 천재적인 ‘미각’과 ‘후각’이 무기고, ‘초밥’을 주제로 한 “미스터 초밥왕”의 주인공은 타고난 재능에 엄청난 노력으로 갈고닦은 ‘쥐는 기술’이 무기다. “육수의 달인”의 주인공은 음식의 기본이 되는 ‘육수’를 최상의 것으로 만들어내는 ‘재능’과 그걸 뒷받침하는 ‘기술’이 무기다. 다이고 야타는 출장요리의 기본인 ‘상황과 무대’에 맞는 ‘최적의 육수’를 뽑아내 마술 같은 요리를 선보이는데, 이것이 이 만화의 클라이맥스를 책임지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고작 한 접시의 요리가 사람의 인생을 바꿔간다.” 일본산 요리만화의 세 번째 뼈대는 ‘휴머니즘’이다. 너무 판에 박힌 이야기라 뼈대라 부르기도 오글거리지만, 사실이 그렇다. 요리나 조리법, 재료에 대한 엄청난 양의 ‘정보’가 주인공이나 주변인들을 통해 설명되어지고, 주인공의 ‘무기’에 의해 타인으로부터 ‘권위’와 ‘정통성’을 부여받은 ‘음식’이라는 결과물이, 스토리의 완결을 위한 휴머니즘을 불러일으키는 위대한 ‘상징’으로 변한다. 그의 음식을 맛본 사람들은 옛날의 추억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고민에 찌들었던 자신의 절망감을 희망으로 바꾸기도 하며, 엇갈렸던 사랑이 다시금 관계를 회복하기도 하는 ‘마법의 재료’로 변해 사람에게서 감동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그럼, 정리해보자. 내가 발견한 일본산 요리만화의 패턴, 즉 “틀”은 장르와 소재를 불문하고 위의 세 가지 뼈대를 그 안에서 충실히 구현한다. 첫 번째, 엄청난 실력을 지녔으나 부와 명예를 쫒지 않고 항상 서민의 편에 서있는 주인공, 두 번째, 그의 엄청난 실력을 완성시키고 대결을 승리로 이끄는 그만의 확실한 무기, 세 번째, 반드시 감동을 이끌어내야만 하는 휴머니즘에 충실한 결말, 이 세 가지가 일본산 요리만화의 ‘틀’을 유지하는 “뼈대”인 것이다. 엄청난 양의 음식에 관한 ‘정보’도, 탁월하고 차별화된 ‘소재’도, 주인공을 위협하는 강력한 ‘라이벌’도, 모두 이 ‘틀’과 ‘뼈대’안에 녹아있는 재료일 뿐이다. 여기에 소개하는 “육수의 달인”도 이 패턴을 충실하게 재현한 ‘전형적인’ 일본산 요리만화다. “맛의 달인”이나 “현미선생의 도시락”같은 이러한 일반적인 패턴을 뛰어넘은 일본산 명작 요리만화도 분명히 존재한다. 위에 기술한 나만의 ‘틀’은 이 만화를 소개하기 위한 나만의 방편이자 일본산 요리만화의 ‘전형성’을 판별할 때 개인적으로 적용하는 기준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