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과 잿빛의 세계
“오빠, 내 운동화 못 봤어?” “군청학사”, “메아리의 골짜기”가 한국어판으로 출간되면서 한국 독자들에게도 자신의 존재를 강렬하게 어필하고 있는 일본 작가 이리에 아키의 신작 “란과 잿빛의 세계”가 출간되었다. 이리에 아키의 신선하면서도 독특한 감수성을 좋아하는...
2010-12-13
석재정
“오빠, 내 운동화 못 봤어?” “군청학사”, “메아리의 골짜기”가 한국어판으로 출간되면서 한국 독자들에게도 자신의 존재를 강렬하게 어필하고 있는 일본 작가 이리에 아키의 신작 “란과 잿빛의 세계”가 출간되었다. 이리에 아키의 신선하면서도 독특한 감수성을 좋아하는 독자들이라면 상당히 반가운 신간 소식이 될 듯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란, 엄만 이미 갔다. 그 마을엔 강력한 힘을 가진 마녀들이 교대로 맡아야 할 중요한 임무가 있어, 오래 자리를 비울 수 있는 일이 아니지.” “란과 잿빛의 세계”는 이리에 아키답게 마법을 소재로 한 판타지다. 다만 “군청학사”나 “메아리의 골짜기”에서 보여주었던 독특한 느낌의 판타지가 아니라 장편연재를 염두에 둔, 조금 더 스토리에 집중한 서사의 느낌이 강한 판타지다. 주인공인 란, 란의 오빠 진, 이들의 엄마 시즈카, 그리고 아빠까지 모두 마법사인 기상천외한 가족이 등장하는 좌충우돌 판타지인 이 작품은 매 회마다 사소하거나 신기한 사건들을 하나씩 보여주면서, 마법사 가족만이 알 수 있는 거대한 스토리 하나를 작품의 복선처럼 매 에피소드의 밑에 깔아놓는 방식으로 극의 진행을 이끌어 가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주인공들의 능력이 각기 다르다는 것인데 아직 1권이어서 모든 것이 밝혀지진 않았지만, 일단 주인공인 란은 자신이 좋아하는 운동화를 신으면 귀여운 꼬마아가씨에서 아름답고 섹시한 숙녀로 변하고, 오빠인 진은 자신의 변신도구를 입으면 거대한 늑대로 변 해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곤 한다. 이 재미있고 유쾌한 책을 읽어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가족 중에서 유일하게 따로 살고 있는 대마녀, 엄마 시즈카가 맡고 있는 비밀스러운 임무에 포커스가 맞춰지는데, 아직 1권이어서 구체적이고 상세한 이야기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엄청난 실력을 가진 마법사임은 확실하다. “내 마음에 들면 돌려보내 주지.” 1권의 말엽에 가면 새로운 인물이 하나 등장하는데, 초고층 빌딩의 펜트하우스에 살면서 기이한 행적을 일삼는, 돈 많고 버릇없는 왕자님 오타로다. 오타로는 란의 모습이 변신상태인줄 모르고 아름답고 섹시한 모습일 때 반해버리는데, 기이하고 신기했던 첫 만남 이후 란의 스토커처럼 그녀를 미행하기 시작하고 그의 등장으로 인해 이야기는 점점 풍부해진다. 어찌됐든, 이리에 아키의 신작 “란과 잿빛의 세계”는 재미있다. 그리고 유쾌하다. 새로운 소재도 아니고 그리 대단한 설정도 아니지만, 이 작가 특유의 감수성과 스토리텔링 방식이 있다. 사실 전작에서도 느낀 것이지만, 이 작가는 “군청학사”같은 옴니버스식 단편보다는 이런 식의 장편이 훨씬 더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2권을 손꼽아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