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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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거기 있었다

“설 연휴 전 새파란 상사 놈이 내가 바친 송로버섯을 보다 카르티에 카탈로그의 시계 하나를 톡톡 찍어줄 때 난 결심했어, 더 이상 이런 모욕을 참아야 할 이유가 없어졌다고, 무언가를 인내하고 견딘다는 건 그 대가의 크기에 비례한다. 무슨 말이냐면 지켜야 할 게 클수록 ...

2010-12-08 유호연
“설 연휴 전 새파란 상사 놈이 내가 바친 송로버섯을 보다 카르티에 카탈로그의 시계 하나를 톡톡 찍어줄 때 난 결심했어, 더 이상 이런 모욕을 참아야 할 이유가 없어졌다고, 무언가를 인내하고 견딘다는 건 그 대가의 크기에 비례한다. 무슨 말이냐면 지켜야 할 게 클수록 맷집도 두둑해진단 말이지, 그렇게... 60년을 살아왔다. 내가 꼭 지켜야 할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에, 있을 거라 믿었기 때문에....” “혼자 자는 남편”, “연씨별곡”, “수상한 아이들”, “야후”, “로망스” 그리고 요즘 한참 화제가 되고 있는 웹툰 “이끼”까지, 고우영, 이두호, 허영만, 이현세, 김수정, 이희재의 뒤를 이어 한국 남자 만화작가의 화려한 계보를 이어가고 있는 ‘정통파’ 만화가 윤태호, 그의 신작이 출시되었다. 제목은 “당신은 거기 있었다”, 언제나 독자들의 기대치를 만족스럽게 충족시켜주는 그의 이번 신작은 ‘역시 윤태호!’라는 감탄사를 뱉어내기에 아주 충분하다. 윤태호의 작품 연표를 천천히 살펴보면, 왜 그가 현재 한국 만화계의 차세대를 짊어지고 갈 작가인지를 단박에 알 수 있다. 허영만의 문하로 만화계에 입문한 그는 첫 단행본인 “혼자 자는 남편”에서 앞으로 그의 작품의 주요 정서로 자리 잡게 되는 ‘일상 속의 비일상’을 완벽하게 구현해내었고, 풍자와 해학의 코드까지 접목시켜 작품에 재미까지 주는 신인답지 않은 관록을 뽐내었다. “연씨별곡”에서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전래동화 ‘흥부와 놀부’를 자신만의 상상력으로 재창조해내면서, 말 그대로 ‘기가 막힌 웃음의 코드’를 만들어내는데 나쁜 흥부와 착한 놀부라는 역전된 캐릭터 하나만으로도 읽어가는 내내 사람들의 배꼽을 빼놓는다. ‘풍자와 해학’이라는 단순한 단어만으로는 이 작품의 재미를 표현하는데 부족함이 있고,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힘들지만, ‘윤태호만의 작품코드’가 구체적으로 완성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 후 그는 무리한 일정을 소화하는 에너자이저처럼 살인적인 스케쥴을 소화해가면서 작가로서의 내공을 쌓아가는데, 격주간 만화잡지에 한국 최초의 “사회파 SF”라고 불릴만한 작품 “야후”를 연재하면서, 동시에 스포츠 신문 “굿데이”에 일일 연재작 “로망스”를 연재하기 시작한다. “야후”와 “로망스”는 작화, 설정, 색깔, 스토리 등 모든 면에서 같은 시기에 한 작가가 동시에 창조해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다른 장르의 두 작품이다. “야후”는 한국 현대사의 어둡고 음습한 면에 정면으로 메스를 갖다 댄, 무겁고 진지하며 비극적이기까지 한 정통파 극화였고, “로망스”는 한국 사회의 노인들이 겪는 소소한 일상을 자잘하면서도 유쾌한 느낌으로 풀어낸 재미있는 카툰이었다. 몇 년간의 휴식기이자 침체기를 거쳐 드디어 정통파 스릴러 “이끼”로 온라인에 데뷔한 윤태호는 ‘3600만 클릭’이라는 어마어마한 반향을 일으키면서 작가로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가 창작한 “이끼”를 원작으로 삼아 충무로 최고의 흥행사라 불리는 강우석 감독이 동명의 영화로 제작하면서 2010년 극장가를 가장 뜨겁게 달굴 영화로 주목받게 되는데, 개인적으로는 연재가 중단되며 아직까지 결말을 맺지 못한 그의 작품 “발칙한 인생”이 나에게는 최고의 작품이지만, 대다수의 독자들에게는 ‘이끼’가 그의 대표작으로서 남을 것 같다. “내가 지켜야 했던 건 가족이었고....내가 버리기로 한 것 또한 가족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윤태호는 그 나이에 걸맞게, 자신에게 자양분을 준 선배작가들의 장점만을 흡수한 잘 조련된 사냥개 같은 느낌이 있다. 그의 작품 속에는 이두호의 사회의식이 있고, 허영만의 드라마가 있으며, 이현세의 비장미, 김수정의 날카로우면서도 따뜻한 웃음, 이희재의 서민들의 삶에 녹아있는 소소한 페이소스까지 모든 것이 갖춰져 있다. 아마도 나이가 더 들면 고우영의 ‘삼국지’처럼 고전을 자기 색깔로 완벽하게 각색하는 작업도 얼마든지 가능하리란 생각이 든다. 그러한 그의 작가로서 현재 좌표는 “이끼”와 “당신은 거기 있었다”라는 두 작품의 중간 어딘가쯤에 어중간하게 위치하고 있는 것 같다. 사회의 부조리함에 분노하면서도 동시에 사회의 부조리함에 순응하기도 하는, 그런 대한민국 40대의 어중간한 위치쯤에 말이다. 이러한 애매모호함과 부유하듯 떠다니는 그의 작가적 사고는, 현실 속에서 그가 창작해내는 작품에 엄청나게 좋은 영향을 끼치는 것 같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저 흘러가는 것들을 바라보는 일반적인 관찰자적 태도와 치밀하게 날선 시선으로 세상의 어느 부분을 집요하게 파악하려는 작가적 시선이 오묘하게 혼합되면서 최고의 화학작용을 일으키는 경우랄까? 요즘 “이끼” 때문에 너무나 가려져서 세상에 묻혀버린 느낌이 강하지만, 최신작 “당신은 거기 있었다”도 아주 잘 만들어진 수작이다. 윤태호 특유의 시선과 연출, 구성이 지면 안에 적절하게 표현되어 있어서 읽어가다 보면 작품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내러티브 구조를 갖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윤태호의 컬러풀한 웹툰보다는 이런 흑백의 종이만화가 더 좋다. 특히 ‘보수화가 지나쳐 수구꼴통처럼 변해버린 젊은이’의 표상 같은 주인공 김형사나 나이를 먹어갈수록 세상을 바라보는 깊이와 균형 감각이 더해진 관록의 형사반장님 같은 캐릭터는 윤태호만이 창조해낼 수 있는 무게감 있는 캐릭터라 하겠다. 뭐니뭐니해도 이 작품의 압권은 한 가족의 가장의 죽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수많은 사건들의 전개에 있다. 윤태호는 치밀하게 배치된 구성으로 한 남자의 죽음을 둘러싼 주위 사람들의 치명적인 비밀 하나하나를 양파껍질 벗기듯 교묘하게 선보인다. 작품의 말미에나 가서야 보여 지는 반전 역시 윤태호가 의도한 대로 작품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고개가 끄덕여지는 상황이 오게 되는데,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이 왜 윤태호의 장점을 보여주는 작품인지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끼”에 비해 작화가 조금은 밋밋하고 주연 급을 제외한 등장인물들의 구분이 조금 애매모호하다는 점에 있다. 딸들이나 아들의 비밀이나 아내의 비밀 역시 크게 독자들의 예상을 벗어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렇게 일반적인 기준에서 조금 더 깊은 곳에 있는 비밀들이야 말로 가장 진실된 비밀들일 수 있다. 너무나도 거대한 악(惡)이라거나 요즘 한국에서도 가끔씩 출몰하는 싸이코패스 같은 설정은 오히려 더 멀게만 느껴진다. 이렇게 ‘일상 속에 숨어있는 비일상’을 가장 효과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윤태호의 장점이자 미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