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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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노 앤솔로지 낙인

“너를 살려주겠다. 네가 말한 백성으로 살아 보아라. 아니, 노비가 되어라. 바닥의 바닥에서, 민(民)의 가장 바닥에서 네가 위하는 백성을 너의 몸으로 익혀 보아라. 너의 무엇이 변할 것인지, 어떻게 변할 것인지 너를 지켜보겠다.” 본디 엔솔로지(anthology...

2010-11-09 김진수
“너를 살려주겠다. 네가 말한 백성으로 살아 보아라. 아니, 노비가 되어라. 바닥의 바닥에서, 민(民)의 가장 바닥에서 네가 위하는 백성을 너의 몸으로 익혀 보아라. 너의 무엇이 변할 것인지, 어떻게 변할 것인지 너를 지켜보겠다.” 본디 엔솔로지(anthology)란 선집, 문집을 뜻하는 영어단어이나 만화계에서는 주로 한 단체나 회사에서 지원해 여러 명의 작가들이 하나의 주제나 소재를 놓고 만화를 그려 출판하는 것을 뜻하며, 보통 상업지의 성격을 띠고, 합동지나 동인지같은 비정식 출판물이 아닌 상품등록을 하는 정식 출판물을 출간하는 것이다. 예전부터 이런 시도는 만화계에서 자주 있어왔고, 특히 순정만화계에서 여러 명의 작가들이 모여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각각의 이야기를 하는 기획출판물들이 많이 출간되어 왔다. 여기에 소개하는 엔솔로지는, 2010년 1분기에 대한민국의 온 가정을 강타한 24부작 드라마 ‘추노’를 소재로 한 ‘烙印’이다. 책자의 제목 자체가 “추노 엔솔로지 烙印”으로 되어 있으며, 총 열 명의 작가가 참여해 여덟 작품을 마감, 한 권의 책자로 묶여 세상에 나왔다. (烙印은 가수 임재범이 부른 드라마 주제가의 제목이다) “이미 죽은 훗날의 임금을 아직도 마음에 품고 있는가, 이미 사라진 주인의 나라를 그리며 동방에 중화의 예를 아는 이가 오직 나뿐이라 자위하는 유자의 끄트머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여섯 살 아이를 모시러 간다, 생기 잃은 충절을 긍지로 삼아 죽은 자를 위한 발걸음에 산 자를 끌어 들이는구나.” 2010년 1월 6일부터 2010년 3월 25일까지 KBS2를 통해 24부작으로 방영된 드라마 “추노”는 평균 시청률 30%대를 꾸준히 유지하면서 마지막 회 시청률 35.9%를 기록, 숱한 화제를 낳으며 종영되었다. ‘그간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느낌의 명품 드라마’, ‘민초의 시선으로 그려진 혁신적인 사극의 위력’, ‘탁월한 스토리와 탄탄한 연출, 매력적이고 개성 있는 다양한 캐릭터들의 결합’, ‘종래에 볼 수 없었던 스피드와 영상미가 결합된 예술적인 액션장면’, ‘명품 복근, 명품 드라마’, ‘매출 210억 돌파’, ‘의외성이 주는 쾌감’, ‘짐승남들의 전성시대’ 등등 드라마가 방영되는 3개월여 동안, 브라운관에 혁명을 일으키며 새롭게 등장한 영웅들의 이야기에 언론의 찬사는 끊임없이 이어졌고 대중들에게는 신드롬으로 자리 잡았다. “추노(推奴)”는 조선시대 후기에 실제로 있었던 ‘도망간 노비를 수색하여 연행해 오는 것, 혹은 외거 노비를 찾아가서 몸값을 받던 일’을 소재로 그간 한국의 사극에서는 볼 수 없었던 ‘노비사냥꾼’이라는 직업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저자거리 사극’을 표방하며 신드롬을 일으켰다. 이 드라마에 출연한 배우들, 특히 남자배우들의 탄탄한 근육질 몸매는 연일 화제가 되었고 어느 한 인물에 집중되는 이야기가 아닌 다양한 인물들의 삶을 다채롭게 연출함으로써 종래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느낌의 드라마로 시청자들에게 다가가는데 성공했다. 특히 조선 인조시대에 암살되었다는 소현세자의 이야기를 드라마의 역사적 배경으로 깔고 ‘혁명’을 이루려는 무사와 ‘사랑’을 찾아 떠도는 노비사냥꾼의 이야기가 주요한 갈등으로 다루어진 스토리는 ‘권력’의 음모에 의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노비들의 이야기와 더불어 드라마의 내적인 구성을 더욱 탄탄하게 해주었다. “어쩌긴 그냥 사는 거지, 내일은 뭐 좋은 일이 생기려나...생각하며 사는 거지, 그렇게 살다보면 좋은 일도 생기겠지.” “추노 엔솔로지 烙印”엔 총 여덟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윤지운의 ‘청명(淸名)’, 이정아의 ‘새장’, 전진석, 박설아의 ‘심양일기(瀋陽日記)’, 지애의 ‘꽃길 별길’, 정기림, 김보현의 ‘흑호(黑虎)’, 손효정의 ‘돌아가는 길’, 고야성의 ‘꽃 그림’, 조윤의 ‘300원의 네 칸 극장, 언니들’이 작품집을 이루고 있는 여덟 작품들이다. 드라마의 본 줄기에 해당하는 스토리와 캐릭터에서 소재를 차용해, 각각의 이야기를 꾸린 이 여덟 편의 작품은 각 단편마다 작가들의 개성이 묻어나는 좋은 느낌을 독자에게 전달해준다. 특히 전진석, 박설아의 ‘심양일기(瀋陽日記)’같은 작품은 주인공인 송태하가 어떻게 소현세자에게 마음을 열게 되었나를, 볼모로 끌려간 심양에서 벌어지는 일을 통해 서정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윤지운의 ‘청명(淸名)’같은 경우는 드라마 최대의 악역으로 등장하는 좌의정과 황철웅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면서 송태하라는 인물을 다각적으로 재해석하였다. 또 정기림, 김보현의 ‘흑호(黑虎)’같은 경우는 가장 개성적인 조연으로서 시청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던 천지호의 시선으로, 대길과 첫 인연을 맺는 시점부터 자신이 죽는 시점까지 한 편의 뮤직비디오를 보는 듯한 느낌으로 재구성해 색다른 느낌을 주고 있다. “어쩌면 나는 다 자란 품안의 짐승이 손을 물어뜯기 전에 너를 버려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놈아, 개새끼건 범새끼건 사람새끼건 간에 낳은 정은 없어도 그 놈의 기른 정은 질긴 법이라...키운 것이 나니 묶인 줄 풀어주는 것도 내몫이려니하고 또 너를 이리 부둥켜 안았구나” 이정아의 ‘새장’같은 경우는 언년이를 찾아다니는 대길의 여정에 남사당패 청년의 이야기를 살짝 끼워 넣음으로써 드라마에서는 결코 말할 수 없었던 대길의 언년이에 대한 연정을 대길이 스스로가 살며시 고백하게 하는 센스를 발휘하고 있다. 지애의 ‘꽃길 별길’은 천지호와 함께 많은 사랑을 받았던 조연, 설화의 과거를 잔잔한 느낌으로 구성해 순정만화만이 줄 수 있는 여운을 극대화시켰다. 손효정의 ‘돌아가는 길’은 최강의 악역으로 등장했던 황철웅의 심리상태를 독특한 느낌의 작화로 표현해 아주 색다른 감정을 독자에게 선사한다. 고야성의 ‘꽃 그림’은 ‘야오이’의 느낌을 최대한 살려, 최장군과 대길에게 느끼는 여성들의 에로틱한 상상을 충족시켜주는 가벼운 코미디 물로 구성, 방화백을 화자로 내세운 에피소드로 그려내었다. 조윤의 ‘300원의 네 칸 극장, 언니들’은 4컷 만화로 구성되어 있고 매 단편이 끝날 때마다 쉬어가는 페이지처럼 편집되어 있는데, 작가의 개그센스가 무척이나 돋보여 드라마를 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웃고 지나갈 만한 재미있는 4컷 만화라 하겠다. 2010년 1분기를 뜨겁게 달군 드라마 “추노”에 대한 새로운 해석 “추노 엔솔로지 烙印”은 드라마 “추노”를 재미있게 본, 만화를 좋아하는 여성독자들에게는 최고의 선물일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도 드라마를 본 사람에게는 색다른 재미를 선사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