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레이유
“신은 인간을 평등하게 만들었다, 라는 말은 거짓이다.” 화려한 조명, 아름다운 드레스, 쉴 새 없이 터지는 카메라 플래쉬, 세상을 지배하는 상류층 사람들과 그 곳에 들어갈 것을 허락받은 한줌의 인간들만이 존재하는 희소성의 세계, 자본주의의 총아이자 상징이라 불리...
2009-12-03
유호연
“신은 인간을 평등하게 만들었다, 라는 말은 거짓이다.” 화려한 조명, 아름다운 드레스, 쉴 새 없이 터지는 카메라 플래쉬, 세상을 지배하는 상류층 사람들과 그 곳에 들어갈 것을 허락받은 한줌의 인간들만이 존재하는 희소성의 세계, 자본주의의 총아이자 상징이라 불리는 “패션”업계의 이면을 다룬 만화가 출시되었다. 제목은 “솔레이유”, 프랑스어로 ‘태양’이라는 뜻의 이 만화는 우연한 계기로 패션모델의 세계에 발을 담근 한 소녀의 성장기를 심도 깊고 치밀하게 다루고 있다. “만화잡지 그라비아 담당 15년, 내 동료는 만화 일편단심이지만 내 주특기는 여자를 보는 눈, 네게 재능이 있듯이 내 재능은 내가 ‘발굴한 자’의 성공으로 증명되는 거니까....” 이 만화에는 “패션”이라는 큰 카테고리 안에 여러 가지의 직업들이 등장한다. ‘발굴’의 역할을 맡고 있는 잡지사의 사진기자나 취재기자, ‘육성’의 역할을 맡고 있는 모델 에이전시나 연예인 기획사, 모델 스쿨, ‘마케팅’의 역할을 맡고 있는 방송, 언론사, ‘제작’의 역할을 맡고 있는 패션 디자이너, 의류업체 관계자, 사진작가 등 ‘모델’이라는 특정 직업을 중심으로 그와 관련된 큰 산업 전반을 만화적 재미를 덧붙여서 파헤쳐간다. 단순히 업계의 이면을 부각시키거나 흥미 위주의 스토리로 진행되는 만화가 아닌, 모델이 되고자 하는 한 소녀의 충실한 성장기이기 때문에, 이런 분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만화를 통해 무척이나 큰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파도야....새로운 파도...평범한 사람이 쌓아올린 수많은 모래성을....한순간에 휩쓸어버리는 새로운 파도....재능에는 용납이란 게 없어.” “솔레이유”의 장점은 무엇보다도 리얼함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꿈을 가져야 한다고 말들은 쉽게 하지만, 사실 성공의 운명을 타고난 자는 거의 대부분 날 때부터 정해져 있다. 운동선수, 뮤지션, 사진작가, 화가, 소설가, 만화가, 배우, 모델, 디자이너 등등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부와 명예를 거머쥐고 일반인들의 선망과 질시를 한 몸에 받는, 소위 말하는 ‘스타’ 또는 ‘아티스트’들은 다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이다. 일반인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도달할 수 없는 그 어떤 영역을 너무도 쉽게 도달하는 사람,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화려한 광채를 발하는 그들은 정녕 신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는 예체능계에만 해당되는 진리가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과학자, 법관, 학자, 사업가 등등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많은 전문직 중에서 노력만으로 정상에 오른 사람들은 없다. 공부도 재능이고, 균형감과 선구안도 재능이다. 인정하긴 싫지만, 세상은 특별한 재능을 지닌 천재들과 그렇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이 “솔레이유”가 밑바닥에 깔고 가는 ‘리얼’한 주제의식이다. “솔레이유”는 이렇게 ‘특별한 재능’을 타고난 자와 그런 ‘재능’을 스타 또는 상품으로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러나 결코 간과해선 안 되는, 무서운 진리는 바로 다음의 대화다. “그림의 가치는 누가 정하는가? 그리는 사람이? 보는 자가? 작품 그 자체가?” “사는 자의 의지입니다”, 우린 자본주의라는 무서운 세상에 살고 있고, ‘재능’이든 ‘노력’이든 이 대화의 틀을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이 정말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