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만화(디지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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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 부끄럽지 않은 생에 대하여 - 억수씨 작가의

<지금, 만화> 제22호(2024. 7. 22. 발행) ‘나의 한 칸’에 수록된 기사입니다.

2025-04-15 허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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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Ho!>,

부끄럽지 않은 생에 대하여


억수씨 작가의 <Ho!>

 

글 허서현(월간 객석 기자)

 

때는 스물여섯, 나는 미묘한 타락을 경험하고 있었다.

어쩌면 착한 아이 콤플렉스를 가지고 산 것일지도 모른다. 선의를 베풀면, 그것이 선의로 돌아오는 삶. 성실과 인내가 최고의 미덕인 인생은, 그때까지 내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클래식 피아노를 전공하고, 여전히 대학원을 다니며 더 아름다운 소리를 찾는 게 전부인 일상이었으니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했다. 우물 안의 개구리였을까. 삶은 늘 아름다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삶은 순수하며 동시에 편협했다.

점점 더 많은 사회생활을 하게 됐다. 삶이 얼룩덜룩하다는 것을 아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호의를 베풀었는데 호구 취급을 받은 날도, 나보다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이 인정받는 걸 지켜보는 날도 있었다. 심지어는 무조건 참고 견디는 게, 더 안 좋은 결과를 낳기도 했다. 약간의 충격과 상처를 받은 후에는, 마음 한편에 질문이 자리 잡았다. 무엇을 옳은 기준으로 삼고 살아야 할까. 조금 더 입체적인 인생을 과제로 받아든 나에게, 새로운 명제가 필요했다.

 

<Ho!> 출처:네이버웹툰

 

웹툰 <Ho!>를 보게 된 것이 그즈음이었다.

부끄럽지 않은 인간이 되시개. 자네는 잘할 수 있을개야

막노동 현장에서 만난 할아버지 범석은 주인공인 원이에게 이 쪽지를 남기고 떠난다. 그 후로 원이의 삶은 부끄러울 일이 많았다. 첫사랑에 대한 1차원적인 욕망, 미숙한 첫 연애, 견디지 못하고 잠수를 타버린 첫 직장, 게임 폐인 같은 생활. 누구에게나 있는, 들키고 싶지 않은 인생의 한 페이지들이다.

작가인 억수씨의 전작 <연옥님이 보고계셔>부터, 그의 작품에는 숨기고 싶은 심리들이 가감 없이 그려져 있었다. (만화비평잡지에 보내는 글에 적기에는)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소리지만, 나는 꽤 안다고 자부하는 나름 만화 애호가였다. 학원 밑 만화방이 300원에 한 권씩을 대여해주던 중학생 시절, 거기에 있던 만화책을 장르 불문 거의 다 봤다는 것이 우스운 근거. 억수씨의 웹툰을 그림 보는 맛이 있다며 좋아한 것도 다 이런 류의 허세였다. 당시 웹툰은 일상툰이 보편적이었던 터라 작화나 구도에 신경 쓴 작품을 본다는 자부심(!)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림을 통해 전달되는 섬세한 생각과 감정들은 사춘기 시절 만화에 몰입했던 감수성을 일깨웠다.

<연옥님이 보고계셔>는 길고 복잡해, 스토리라인을 따라 읽는 만화책을 보는 듯한 감각은 덜했다. 그에 비해 <Ho!>원이가 청각장애인 를 만나 자신의 찌질한 인생 한 페이지를 조금 덜 흔들리고걸어 나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나를 더 나은 사람이라고 믿어주는, 아주 작지만 분명하게 따뜻한, 그 기적 같은 동행이 원이의 삶을 해피엔딩으로 끌어나간다. 적어도 에게 부끄럽지 않은 인간이 되겠다는 것. 그 기준을 읊조리며 걸어 나가는 그의 뒷모습은 오랜만에 만화책 읽듯 이야기 속에 빠진 나의 뇌리에 오래 기억에 남았다.

 

부끄럽지 않은 인간이 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부끄럽지 않은 인간이 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의 말처럼, 부끄럽지 않은 인간이 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나 또한 실수투성이였으니까. 첫 회사에서는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2주나 무단결근을 하다가 출근해 사무실 한가운데 서서 엉엉 울었던 적도 있었다. 나답지 않은 연애를 이어가며 자괴감에 빠진 날도, 사랑하는 가족에게 상처를 입힌 날도, 동료의 실수를 덮어주지 않는 날도 있었다. 내 마음의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운 날들이었다.

지금도 그 혼란은 여전하다. 실수는 줄었지만, 책임이 늘었다. 무책임한 상사에겐 어느 정도의 예의를 지켜야 하는지, 불만을 털어놓는 후배의 마음을 어디까지 살펴줘야 하는지 매 순간 고민이다. 그 시간이 무겁게 느껴질 때마다, 나도 원이처럼 중얼거리게 되는 것이다. ‘적어도, 부끄럽지 않은 인간이 되자’. 타인의 어떠함에 기대지 않고, 최소한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나의 안간힘을 위안하는 마법 같은 문장이다.


<HO!> 출처:네이버웹툰


하도 되뇌어서일까, 언젠가부터 부끄럽지 않은이라는 말이 나를 소개하는 하나의 인용구가 됐다. 부디 오늘 써내려가는 이 글이, 나를 사랑하고 신뢰해준 이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것이 되길 바라며.


필진이미지

허서현

공연예술지 <월간 객석> 기자. 클래식 음악을 전공하고 예술과 대중 사이의 유쾌한 전달자를 꿈꾸며, 부끄럽지 않은 문장을 위해 고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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