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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준의 사진으로 보는 만화야사 05 : 초기 만화의 토대를 세운 김동성과 노심선, 안석주

1919년의 3.1 운동 사건 후, 국제 정세의 시선을 돌리기 위한 조치로 문화정치를 표방하며 민간 신문 발행에 대한 규제가 다소 완화되었다. 1924년 3월 5일 창간된 <조선일보>에 이어서 3월 31일에는 <시대일보>, 그리고 4월 1일 창간된 <동아일보>가 대표적 민간지로 등장하게 되었다.

2015-06-09 박기준

초기 만화의 토대를 세운 김동성과 노심선, 안석주

1919년의 3.1 운동 사건 후, 국제 정세의 시선을 돌리기 위한 조치로 문화정치를 표방하며 민간 신문 발행에 대한 규제가 다소 완화되었다. 1924년 3월 5일 창간된 <조선일보>에 이어서 3월 31일에는 <시대일보>, 그리고 4월 1일 창간된 <동아일보>가 대표적 민간지로 등장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4컷 신문만화 형식을 시도한 기획자 김동성은 다양한 작품을 발표하였으며 <동아일보>에 독자투고 공모를 최초로 도입하여 정착시킨 인물이다. 이어서 <야담>지에 김규선이 그린 <봉이와 김별장이>라는 만화가 등장했다. 이상의 것들이 초기 신문과 잡지 만화였다. 만화의 작업도 이때부터는 새로워져서 이전에는 붓으로 그렸던 그림을 펜으로도 그리기 시작했다. 

1920년 3월 5일 신문 4컷 연속 유머 카툰 <멍텅구리 윤바람>이 최초로 한국화가 노수현(필명 노심선)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일보>에 연재되기 시작한다. 이것이 김동성의 기획과 이상협, 안재홍의 문안으로 구성된 분업만화 형식의 효시라 할 수 있다. <조선일보>는 창간 3년이 넘도록 만화 형태의 그림을 전혀 싣지 않았었는데, 1924년 9월 운영권이 새로운 경영진으로 바뀌면서 지면 혁신으로 전환하게 된다. 이런 방향 전환의 배경에는 인문학 연구차 미국 유학을 하고 <동아일보>에 시사 카툰 등을 종종 발표해 왔던 김동성이 <조선일보>로 자리를 옮겨 왔던 영향이 컸다.

<멍텅구리 윤바람>은 대조적인 성격을 가진 최멍텅과 윤바람 두 사람이 콤비를 이루어 미모의 신옥매를 두고 벌이는 애정행각을 소재로 하여 그려진 작품이다. ‘연애경쟁’, ‘헛물켜기’, ‘자급자족’, ‘가정생활’, ‘세계일주’ 등 유머러스하게 그려졌는데, 이 소재는 당시 대도시에 부는 새바람이나 사회현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기도 했으므로 많은 성인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폭소탄이 되어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500회라는 장기간에 걸쳐 연재된 <멍텅구리 윤바람>은 인기의 여세를 등에 업고 1926년 흑백 희극영화로도 제작되어 성공을 거두었다. 이 작품은 유학시절 만화 연구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김동성이, 1913년부터 미국의 <아메리칸 저널>지에 연재되어 인기를 끌었던 생활 오락만화 <매기와 지그스>라는 역시 콤비 등장 스타일을 우리 것으로 잘 활용한 덕분이라 할 수 있다.

그 시절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언론계의 최대 라이벌이었다. 그런데 <멍텅구리 윤바람>이라는 연재만화로 시대의 유행에 한발 앞서 갔던 덕분에 신문의 구독률까지 높였으니 톡톡히 그 덕을 본 것이다.

이에 <동아일보>도 그냥 포기할 수는 없었다. 만화에 대한 인식을 바꾼 <동아일보>는 1925년 1월 30일 역시 안석주의 <허풍선의 기담>이라는 유머 카툰을 연재하기 시작, 라이벌지에 맞불을 놓게 된다. <허풍선의 기담> 시리즈는 실속이라곤 전혀 없고 허우대만 멀쩡한 허풍쟁이를 주역으로 등장시켜서 ‘소년시대’, ‘교원생활’, ‘고생살이’ 등 각종 에피소드를 그려낸다.
신중한 기획으로 내놓은 작품이었던 만큼 과연 <허풍선의 기담>은 <멍텅구리 윤바람>에 대적할 만한 폭소 오락만화로 인정을 받는다. 두 만화는 팽팽한 라이벌로 좋은 대조를 이루며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허풍선의 기담>을 그린 안석주는 최초의 신문소설 삽화가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잊히지 않고 불리는 ‘우리의 소원’ 이라는 노래 가사를 쓴 것으로도 유명한 사람이다. 그는 필력도 갖추었기 때문에 줄거리를 만들고 그림까지 직접 그려서 경쟁에 동참하였다. 안석주는 1924년 경부터 중앙 3대지와 잡지 등에 각종 만화와 연재소설, 삽화, 그리고 만화 컷, 캐리커처까지를 망라하는 전천후 만화가로서 1930년대 말까지 화려한 활동을 하였다.

<시대일보>는 조선과 동아일보의 뒤를 이어 1년 후 창간된 신문으로 당시 3대 민간지로 불렸던 신문이다. 육당 최남선이 발행했던 <주간 동명>을 일간신문으로 바꾼 것이다. 1922년 9월에 창간되었던 <주간 동명>은 한때 김동성에 의해 국내 최초로 만화 그리는 법을 12회나 연재하며 만화연구의 길잡이 역할도 하였다. 이런 전력을 지니고 새 출발한 <시대일보>는 창간호부터 인기 해외 만화를 번역해 싣는 등 잡지 형태의 신문으로서 만화 문화의 저변 확대에 크게 한몫을 했다. 그러나 1926년 8월 자금난으로 인해 채 2년을 버티지 못하고 휴간에 들어가게 되었다.

1914년 당시의 세계적 유행은 흑백TV와 영화가 대세였다. 채플린과 함께 월트 디즈니의 미키마우스가 시청자를 사로잡고 전 세계를 폭소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었으니 자연 우리 만화계에서도 그 영향을 받게 된다.
<동아일보> 창간에도 참여했던 언론인 김동성은 미술에도 뜻이 있어 1918년 미술가들이 만든 서화협회에도 참여하였다. 이때 친하게 지냈던 노수현, 안석주, 이상범 등에게도 만화라는 새로운 장르가 있음을 알려주어 만화의 붐을 조성시키는 등 한국만화사에서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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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리구 김동성(1890-1969)
동아일보 기자, 초대 공보처장 역임. 최초 만화이론을 신문잡지에 기고, 만화연구의 기초를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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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심선(노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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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의 4컷 생활유머 카툰 <멍텅구리 헛물켜기>(노심선) 조선일보 연재(1924.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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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멍텅구리 헛물켜기> 등장캐릭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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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필우 감독에 의해 영화가 되어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