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 앙굴렘 국제만화 페스티벌 조직위원회는 30여 명의 그랑프리 후보자를 발표했다. 그런데 그중에 여성작가가 한 명도 없어서 여성만화가들의 공분을 샀고, 이에 동조하는 몇몇 남성 후보 작가들이 사퇴하면서 사회적으로 큰 논란이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페스티벌 조직위원회는 여성작가가 포함된 새로운 후보자 명단을 내놓으면서 논란을 잠재웠지만, 이 사건은 프랑스 만화계 안의 성차별 문제를 구체적으로 논의하게 만들었다.
성차별 논쟁의 기폭제가 된 앙굴렘 그랑프리 후보자 여성 배제 논란 △ 앙굴렘 페스티발 그랑프리 투표를 위한 인터넷 사이트의 이미지. 앙굴렘 페스티발은 참여작가들에게 투표참여 메일을 보내고 작가들은 사이트에 로그인한 후 투표한다.
앙굴렘 페스티발의 그랑프리는 한 해의 이슈가 되는 ≪작품≫에 수여되는 다른 만화상과는 다르게 전반적인 작품세계를 평가하여 ≪작가≫에게 상을 수여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랑프리 수상 작가는 앙굴렘 페스티발의 심사위원장이 되어 수상작들을 선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그래픽과 포스터, 전시기획에 참여하는 등 페스티발의 전체적인 방향을 정하는데 큰 영향력을 가진다.
△ 성차별 논란 후, 페스티발 조직위를 남성 중심적이라고 비꼬는 그림.
그랑프리 선정방식에 대해서는 항상 어느 정도 논란이 있어왔고 페스티발 조직위원회도 몇 차례 수정을 해왔었다. 대체적인 비판은 국제적인 페스티발이라는 타이틀에 걸맞지 않게 불어권의 50세가 넘은 남성작가들이 수상자의 대부분이라는 것, 그리고 페스티발의 몇몇 사람들에 의해 수상자가 결정되었기 때문에 대중들과 다수 작가들의 의견이 무시되어 왔다는 것이었다. 변화를 거친 2016년 현재의 선정방식은 우선 조직위 측이 수십여 명의 1차 후보자 명단을 내고, 이것을 그 해 페스티발에 참가하는 모든 작가의 투표를 통해 3명으로 압축한 후, 그 3명을 다시 2차 투표에 부쳐 수상자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올해 초 조직위가 발표한 30여 명의 1차 후보자 명단 안에는 여성 후보자가 한 명도 없었고 여성작가들이 이에 대해 `명백한 차별`이라며 이의를 제기하면서 문제가 생겨났다. 150여 명의 여성작가를 회원으로 두고 있는 《성차별에 맞서는 여성만화 창작자 연합(collectif des creatrices de Bande dessinee contre le sexisme)》은 SNS를 통해 투표 보이콧 운동을 벌였고, 히아드 사투프, 조안 스파, 찰스 번즈, 에티엔 다보두 등 수상이 유력시되던 남성작가들도 후보에서 자진 사퇴를 하면서 운동에 동참했다. 곧이어 주요 언론들이 이것을 여성 차별적 사건으로 보도하면서 논란은 커져갔다. 언론의 추궁에 페스티발 조직위원장 프랭크 봉두는, “그랑프리라는 상은 작가의 작품 전반에 관해 주어지는 것이며, 수상작가들은 어느 정도의 성숙도와 연령에 이르러야만 한다.” 면서 “불행하게도 만화역사 안에 그런 여성은 소수이며 그것이 현실이다.”라고 명단발표를 정당화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비난에 조직위는 수정된 명단을 발표해야만 했고, 여성작가 클레어 웬들링이 3명의 결선 후보까지 오르는 변화가 생겼지만, 결국 그랑프리는 72세의 벨기에 남성작가 에르만이 차지했다.

△ 전년도 그랑프리 오토모 가츠히로로 부터 그랑프리 트로피를 넘겨받는 벨기에 작가 에르만(Hermann)
이 사건을 두고 라디오 방송국 《유럽1》의 문화부 기자인 마티유 샤리에는, “후보 명단에 오를 만한 여성작가 20명 정도는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녀들이 이미 명단에 있는 남성들보다 더 자격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자격이 덜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후보자에 여성을 한 명도 넣지 않은 것은 페스티발 조직위원회의 상징적 실수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 수정된 후보자 명단에 따라 3인의 최종 후보에 오른 클레어 웬들링.
△ 클레어 웬들링의 대표작 ≪아말루의 빛≫ 의 표지
한편 만화전문지 조(Zoo)의 올리비에 티에리 기자는 반대의 주장을 펼치고 있는데 페스티발 조직위원회에서 가장 요직에 있는 사람 중 하나인 마리 조엘 바스가 프랑스에서 가장 열렬한 여성 운동가 중의 한명이며, 이 사건을 규탄했던 여성작가들 몇몇이 후보작가 리스트에 오르지 못한 것에 대한 분풀이를 하고 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는 것이 그 근거이다. 그는 프랑스 만화계가 예전에는 예술계나 비즈니스계와 마찬가지로 성차별적이었지만 지금은 훨씬 나아지고 있고 그 때문에 이 논쟁은 쓸데없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또한, 여러 가지 예를 들며 성차별 논쟁에 반박하고 있는데, 프랑스 만화가 중에 여성작가가 차지하는 비율이 15퍼센트에 불구 함에도 앙굴렘의 주요만화상 수상작 후보 중 25퍼센트가 여성작가의 창작물인 것, 페스티발이 주최하는 3개의 젊은 재능 공모전의 1등 상이 모두 여성에게 주어진 것, 특히 오랜 기간 동안 작업하며 다작과 대표작을 동시에 가진 여성작가를 찾기가 너무 힘들다는 것 등이다. (2016년 그랑프리를 수상한 작가 에르만은 50여 년 경력동안 100개가 넘는 작품을 펴냈다.)
프랑스 만화계에는 여자로 사는 것은 어떤가요? 43년의 역사를 가진 앙굴렘 페스티발에서 여성그랑프리는 2000년에 플로렁스 세스탁 단 한 명 뿐이었다. 비율적으로 따져 볼 때 아주 적은 편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이번에 앙굴렘 그랑프리 투표 보이콧을 주도한 《성차별에 맞서는 여성만화 창작자 연합(collectif des creatrices de Bande dessinee contre le sexisme)》은 2013년 작가 리자 멘델(Lisa mandel)이 《만화계에서 여성으로 사는 것(sur le fait d’etre une femme dans la BD)》 이란 주제로 수십 명의 여류작가들에게 설문조사를 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 앙굴렘 페스티발의 여성차별을 비판하는 플로렁스 세스탁의 그림. 그녀는 앙굴렘 페스티발의 유일한 여성 그랑프리 수상자이다.
2015년 봄, 작가 줄리 마로는 벨기에 만화센터로부터 《여자들의 만화(la BD des filles)》라는 주제의 전시회에 참여해 달라고 연락을 받는데 주최자로부터 전시 테마가 “7세부터 77세까지 여성독자를 위한 만화를 전반적으로 둘러보는 것… 여자아이들을 위한 그래픽 노블부터 블로그 만화, 청소년만화, 페미니즘 만화, 혼자 사는 여인들을 위한 로맨틱한 만화, 쇼핑중독자를 위한 만화,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은 다른 것”들 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줄리 마로는 이 전시가 여성 차별적이라고 설명했지만(아마도 혼자 사는 여자들은 로맨틱한 내용을 좋아한다는 고정관념, 쇼핑중독자 만화는 여성용이라는 것과 같은 주최 측의 여성인식이 문제였던 것 같다.) 주최 측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고, 그래서 줄리 마로는 이 문제점을 70여 명의 여성작가에게 메일로 알렸는데 이중 절반이 이미 리자 멘델의 설문조사에 참여했던 사람들이었고 그들이 중심이 되어 만화계의 성차별적 인식을 구체적으로 논의하기 위해 단체가 시작되었다.
모임의 인터넷 사이트에는 《성차별 주의에 대항하는 여성창작자헌장》과 여성작가들의 차별적 경험에 대한 증언 그리고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학술적 논문과 글에 관한 링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성작가들은 증언을 통해,
- 회의 중 동석한 남자작가에게 “니가 젊은 여자애를 좋아해서 내가 하나 데려왔다.” 라고 농담을 하거나, “여자들은 작품내기 어려우니 내가 여성작가 콜렉션을 만들어 줬다.”라고 이야기하는 출판사 사장들.
- “나는 여자들하고는 악수 안 해, 그 대신 엉덩이를 만지지!”와 같은 성희롱적인 농담을 날리고, “여자 그림체다, 아니다.”, “여성적인 주제다, 아니다.” 혹은 “너희들은 우리와 다르다.”라고 말하는 남성작가들
- 여성작가의 책에 대해서는 “요염한”, “예쁘디 예쁜”, “감수성이 예민한”, “부드러운”과 같은 단어를 쓰는 비평가들.
- “만화계에서 여자로 사는 것은 어떤가요?”, “여성의 전형적 특징이란 게 있지 않나요?” 같은 해묵은 질문을 던지며 여자들의 작품은 여성적인 것, 일상적인 것, 아동만화 같은 것일 거라는 편견을 가진 기자들
- 사인회에서 벌거벗은 여자를 그려달라고 부탁하면서 여성 비하적 농담을 하고, 비즈(프랑스식의 볼인사)를 해달라고 조르기도 하는 남성독자들
- 장르적 연관성도 없는데 여자작가들의 작품이라는 이유로 “여성만화”라는 테마로 뭉뚱그려 전시하는 페스티발
들에 대해 비판한다.
이들은 ≪여성만화≫라는 명칭이 여성 비하적이라 지적한다. ≪남성만화≫라는 명칭은 한 번도 설정된 적이 없는데, 여자작가들이 그린 만화는 ‘여성의 작업과 사고방식에 관한 상투적인 특징’에 기반을 둬 ≪여성만화≫로 분류된다는 것이다.

△ 성차별에 맞서는 여성만화 창작자 연합(collectif des creatrices de Bande dessinee contre le sexisme) 사이트 초기 화면에 있는 그림. (http://bdegalite.org/)
또한, 서점에서 여성용 컬렉션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나오는 책들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여성컬렉션의 책은 다른 문학작품과의 구별과 등급화를 만들어내고, 특히 남성독자를 위한 책들은 남성용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나오지 않아 보편적인 책으로 인식되는 반면에, 여성용 컬렉션은 ≪여성만이 읽는≫, ≪보편적이지 못한≫의 의미를 내포한다는 것이다. 고정관념에 따라 구분되어진 이런 책은 여성의 자신감과 능력, 자신에 대한 인식에 부정적 인식을 미치고, 이것이 계속된다면 남성이 표준이 되고 여성은 하류적 특징을 가진 존재로 이미지가 굳어질 것이라고 지적한다.
모임의 작가들은 심리학과 신경학적 연구에 따르면 인지발달 과정에서 남성과 여성간의 차이는 없으므로 취향과 적성이 생물학적 성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는 것은 편견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여성이라고 해서 감성적인 내용과 쇼핑, 요리에 관한 것에 관심을 더 두게 되는 것도 아니고, 모험만화나 형사, 사이언스 픽션 작품들을 남자들보다 덜 좋아하게 되는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이들은 《성차별 주의에 대항하는 여성창작자 헌장》을 통해
- 평등주의적인 문학을 장려하고,
- 만화 안에서 더 많은 여성과 다양한 가족 모델, 인종. 민족과 사회계층이 나타나야 하며,
- 창작자, 출판사, 서점, 학교, 도서관, 언론들이 성차별, 인종차별, 동성애 차별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간행물을 펴내는 것에 대해 도덕적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 서점과 도서관에서 여성작가의 창작물 혹은 여성독자용이라는 명목으로 책을 따로 배치하는 관행과 여자주인공이 남성 등장인물보다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거나 더 활동적이라고 해서 남성독자들이 인물에 동화하기 힘들다거나 이야기를 좋아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도서 관련자들의 선입견도 바뀌기를 희망한다.
- 마지막으로 우리 안의 남성성과 여성성의 확고한 구분은 사회나 종교가 우리에게 강요하는 것일 뿐이고 남성, 여성이라는 개념의 사이, 주변, 혹은 그것을 넘어서는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의 자원이고 문학은 그 내면의 풍부함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오래전부터 순정만화가 굳건히 존재해 왔던 아시아의 만화계와 여성작가, 여성 독자를 위한 만화가 거의 없어서 오랫동안 만화의 창작과 소비가 남성중심으로 이루어졌던 프랑스의 만화계의 모습은 많이 다르다. 성차별에 맞서는 프랑스 여성작가들의 주장들을 들어보니 그들이 우리나라의 순정만화 장르를 보았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지 무척 궁금해진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나라의 여성작가들이 느끼는 성차별적 상황들이 존재하는지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한국 여성 작가들에게, 프랑스 여자작가들이 지겨워하는, “만화계에서 여성작가로 사는 것은 어때요?” 라는 질문을 해야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