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체이탈(幽體離脫)”같은 느낌이라면 왠 뜬금없는 소리라고 할까? 생각해보면, 만화라는 매체는 그 얼마나 단순한가. 기껏해야 종이에 그림과 글자를 끼적대는 것. 결코 오해는 말 것. 폄하를 위한 말이 아니다. 다른 예술표현 양식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간단한 도구들을 가지고 작업한다는 뜻이다.

물론 그렇지 않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여기선 대부분만을 가지고 이야기하자. 그 간단한 도구로 만들어내는 세계는 어떤 것인가? 물론 더 간단한 표현양식이 아주 옛적부터 존재해왔다. 글. 좋다. 글이건 또는 글과 그림의 결합이건, 여하간 우리는 이런 양식들이 만들어내는 세상에 매혹 당해왔다. 내가 대면하고 있는 이 세계는 가로세로 몇 센티미터에 불과한 2차원의 종이를 넘어서 있다. 아니, 이 현실적인 공간에 가득 차있는 특정한 물질적인 선과 글들은 나의 더듬이들을 자극해서, 나를 언제나 어디론가 날려보낸다. 그곳은 완벽하게 꿈도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완전한 현실도 아니다.
바로 그곳을 쉬이텐은 “꿈과 현실의 경계선”이라고 표현한다. 그렇다. 쉬이텐이 하고 싶었던 것은, 자신의 작품 속의 한 칸 한 칸, 또는 각 플랑쉬(planche: 페이지로 인쇄되기 전의 오리지널 종이) 들이 아니라, 독자들이 그의 작품을 대할 때 형성하는 가상적 공간을 실질적인 공간 속에서 재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앙굴렘 원래의 극장을 통째로 빌려서 전시를 설치한 쉬이텐은 자신의 공언대로, 지금 제작중인 플랑쉬 이외의 어떤 플랑쉬도 내걸지 않았다. 극장의 입구에 들어서면, 일단은 발을 멈출 수 밖에 없다. 통로의 양쪽에 설치해둔 인간형상의 조각들은 그 앞을 가로막고 있는 몇 겹의 천과 조명의 움직임으로 인해, 마치 끊임없이 사람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처럼 환각을 부여한다. 그 환각을 따라 극장으로 들어가면 필름을 상영하고 있다. 쉬이텐이 무얼 생각하는가를 보여주는 이 필름은 상영이 끝났을 때 또 하나의 환영을 마련한다. 극장의 벽에 거대하게 설치된 바벨탑과 같은 <암울한 도시(쉬이텐의 대표작 시리즈물)> 의 한 전경은 조명에 따라서 새들이 날아가는 것이 바뀐다. 마치 살아있는 새들이 날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다른 공간으로 넘어가면 다른 상영이 진행중이다. 쉬이텐이 작업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상물이며, 그 밑엔 쉬이텐이 사용하는 책상과 필기구 등등이 그대로 설치되어 있다. 뭐, 이 부분은 딱히 관심을 끌진 않았다.그리고 컴퓨터 상에서 3D를 사용한 실험적인 어쩌구 하는 것도 별로 나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사실은 컴맹인 것이다...)
이어서 이번의 전시회를 위해 완전히 새로 건립한 극장외부에 붙인 테라스로 올라가면서 본래의 투덜거림이 시작되었다. ‘대체...돈을 얼마나 들인거야, 뭐 얼마나 대단한 걸 하겠다고 건물까지 새로 지어서 올리고 말야...’하고 말이다. 그러나 그 테라스에 발을 내디딘 순간, 나는 나의 전 투덜거림을 모조리 잡아내어 입으로 넣어버리고 싶었다. 테라스의 오른쪽은 원래 극장의 벽이고, 왼쪽은 가건물로 만든 벽이다. 극장의 창문이 있던 곳에 쉬이텐의 플랑쉬를 안쪽에서 걸어두고, 그 이외의 부분은 극장벽과 동일한 벽지로 발라버렸다. 내 발이 있는 곳과 왼쪽의 벽, 그리고 오른쪽의 벽까지 그 모든 곳은 갑자기 <암울한 도시> 가 되어버린 듯 했다. 왼쪽의 벽엔 군데군데 마치 감옥창문과 같은 조그마한 창이 나 있고, 앞서 입구에서 보았던 인간 형태의 조상들은 하나같이 그 창을 통해 외부세계를 욕구하고 있었다. 내가 혼자서 형성했던 <암울한 도시> 의 유체이탈적 공간은, 이제 명백히 자신의 물질성을 내세우면서 나를 압도해 들어오고 있다. 서있는 조상들은 이 도시의 거주민들이며, 움직이지 않는 그들 사이를 걸어가는 나는 역시 타세계의 거주민일 뿐이다. 그들은 내게 의해 영향받지 않지만, 나는 그들의 존재에 의해 숨이 막혀간다...

프랑소와 쉬이텐의 전시는, 앙굴렘 조직위(FIBD, Festival International de la Bande Desssinee)가 세계 최대의 페스티발로 거듭나기 위해 몸부림 친 결과의 하나이다. 작년의 그랑프리 수상자로 올해 전시를 열 권리를 가지게 된 프랑소와 쉬이텐은, 시시껄렁하게 플랑쉬 몇 개 내거는 것이 아니라, 이 극장 전체를 도배해버린 것이다. 아마도 앙굴렘 측에서도 쉬이텐이 직접 전시설치를 할 것을 예상하고 작년에 그랑프리를 쥐어준 것이리라. “쉬이텐의 전시설치는 비판의 여지가 없다. 단 하나 가능한 비판이라면 돈이 많이 든다는 것 뿐이다”라는 세간의 평가가 다시 뇌리에 새겨질 뿐이었다. 그는 이 전시에서 그의 “만화전시, 그 자체에 대한 고민” 이외에도, 벨기에 만화의 과거에서 미래까지 제시하려고 했다.
극장의 지하에는 벨기에 만화가들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끌로드 르나르(Claude Renard)의 갈릴레오 갈릴레이에 관한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이 전시는 이미 르나르가 벨기에에서 한번 조직했던 것인데, 전시 자체를 갈릴레이에 대한 그의 작품으로 해석하고 있다. 계단에서 지하로 내려가면서 보이는 검은 4각 기둥의 배열과, 각 윗면에 묘사된 우주행성들에 대한 촉각적인 묘사-손을 대어 만지고만 싶어지는-는 아주 흡인력이 있었다. 2차원적인 만화의 플랑쉬이건, 또는 3차원적인 조각이건, 또는 전시 자체를 통해서건, 갈릴레이가 “보던 것과 생각하던 것”에 관한 이미지를 관객들에게 선사하려고 노력한 것이다.
그리고 제일 윗층은 프레모크(Fremok)라는 벨기에의 새로 생긴 독립출판사 작가의 작품들을 전시했다. 거의 3방향의 벽에서 영상화시킨 만화의 페이지들이 보여지는 건 좀 산만했지만, 만화의 오리지널한 페이지를 벽에 붙여서가 아니라, 천장에서부터 매달아서 위에서부터 보게 하는 특이한 방식이 꽤나 흥미를 끌었다. 전시적인 보는 방식-벽에 플랑쉬를 줄줄이 걸러놓는것-에서 벗어난 것만 해도 즐겁기 그지없다. 보기에 따라 의미없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굉장한 성의가 들어간 전시였던 것이다. 플랑쉬 밑에는 야광염료가 들어간 통으로 플랑쉬의 균형을 잡고 있었는데, 그것이 빛을 받음에 따라서 아주 차분하게 빛남으로써, 멀리서 보면 마치 우주공간같은 느낌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플랑쉬를 차분히 쳐다보기엔 너무나 어둡고 어지럽다라는 비판에선 벗어날 수 없다.
페스티발 기간이 지나면 모두 사라질 이 전시는 정말 아깝다. 하지만 전시를 해체하지 않으면 이 극장은 극장으로서의 용도를 하지 못할 것이니-창문이란 창문은 다 도배를 해버렸고, 빈 공간은 모두 전시물로 차있으니 말이다-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앙굴렘 시민에게 1년 내내 극장에 가지 말라는 건 폭력이니까 말이다. 그 때문에 최대한 많은 관객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오로지 이 전시만 행사기간 내내 오전 9시부터 밤 11시까지 계속되었던 것이다. 비록 쉬이텐의 전시가 만화전시에 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