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환타지의 시대, 라고 한다. 문학도 영화도 만화도 머리띠 질끈 동여매고 환타지로 질주하고 있다고 한다. 오호라, 이에 덩달아 온갖 곳에서 달뜬 환타지 담론이 춤을 추고 있다. 저기 한 구석, 미관말석에 엉덩이 반쯤 겨우 들이밀었던 환타지가 드디어 ‘장원급제’했다는 감동의 멘트도 흘러나온다. 여기에 최근 ‘대박’을 터뜨렸던 『해리 포터 시리즈』나 『반지 제왕』의 열풍도 한 몫 단단히 했으리라. 아니 어쩌면 열풍이란 말은 부족한 듯 보인다. 태풍이라고, 그것도 순식간에 휘몰아친 당당한 폭풍이라고 해야 만족스러워 할지 모르겠다.
여기서 퀴즈 하나. 이 폭풍은 난 데 없는 바람이었을까? 밑도 끝도 없이 솟아 오른 고원이었을까? 많은 이들이 이 점을 크게 잘못 알고 있다. 물론 『해리 포터 시리즈』가 강력한 진앙이 되기는 했다. 그러나 진앙이 퍼질만한 지형이 마련되지 않았다면, 찻잔 속의 태풍이 되지 않았을까. 이렇게 말하면, 손쉽게 이우혁의 『퇴마록』을 기점으로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를 발판으로 삼아, 한국 환타지 소설이 나오기 시작한 십여년 안쪽이라고 단정짓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정확히 틀린 답이다. 이 보다 훨씬 오래 잡아야 한다. 왜냐하면 한국에 ‘무협’의 전통이 엄연히 존재했기 때문이다.
무협지라고? 뚱딴지같이 어인 무협지 이야기냐고 반문할 지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한국에서 주로 ‘환타지라고 명명되는’ (일본의 소설이든 만화든, 한국의 소설이든 만화든) 텍스트의 구조는 무협지와 별반 다르지 않다. (여기서 ‘환타지라고 명명하는’이라고 따옴표를 친 까닭이 있다. 왜냐하면 그 텍스트들은 환타지의 작은 지류, 일부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하겠다) 그 구조란 바로 로망 서사, 모험 이야기를 의미한다. 자연의 법칙을 어느 정도 넘나드는 영웅, 성배(聖杯)와 비전(秘典)을 찾아 헤매는 모험, 이것들이 로망 이야기의 요체다. 혹여 의심스럽다면, 환타지 소설과 무협 소설의 주인공과 배경을 바꿔 보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해서 최근에 나타난 무협과 환타지의 혼종적 결합은 매우 자연스러운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환타지의 젖줄이 된 서구의 로망 이야기란 게 묘하다. 언뜻 서구 로망은 꿈처럼 매력적인 모험이다. 그러나 속내를 살펴보면 씁쓸한 역사가 자리잡고 있다. 도대체 왜 암흑의 시대에 매혹적인 기사의 모험담이 등장했던 것일까? 사실 그 이면에는 추악한 십자군 전쟁이 자리잡고 있다. 애초 이슬람에 빼앗긴 성지를 탈환하고자 했던 십자군 전쟁, 그러나 십여 차례의 원정을 거치며 전쟁은 변질된다. 아득해지는 성지 탈환을 뒤로 한 채, 그들은 안면몰수하야 약탈과 노략질로 원정길을 채우기 시작한다. 하지만 성스러운 전쟁을 노략질의 역사로 그려낼 수야 없는 법, 그네들은 동방을 이국으로, 전쟁의 시간을 모험의 시간으로, 이슬람 사람을 괴물의 일족으로 뒤바꿔 버린다. 즉, 동방의 이슬람을 타자로 삼아 약탈의 역사를 서구 로망으로 상상적으로 미화시키게 된다. (이 모험은 조셉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과 이를 영화로 변주한 프랜시스 코폴라의 『지옥의 묵시록』에서 비극적으로 되풀이된다. 각각 식민지 아프리카와 공산정권 베트남을 타자로 삼아, 성배 없는 모험을 하염없이 되풀이한다. 잔치는, 아름답게 치장된 약탈은, 적어도 미개인을 교화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던 노략질은 끝난 것이다. 윌러드 대위(찰리 쉰)가 고단한 모험 끝에 만난 것은 광기에 사로잡혀 공포를 삼연발하던 커츠 대령(마론 브란도)이 아니었던가. 그의 육중한 육체는, 공허한 낱말을 내뱉던 목소리는 벌거벗은 서구를 극명히 표현한다. 그렇게 해서 그들의 성스러운 성배 찾기는 막을 내린다)
물론 톨킨의 텍스트를 간단히 중세 로망의 재판으로 보기는 어렵다. 로망과 비교했을 때, 변주의 폭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가령 명민하지만 영웅이라고 보기 힘든 호빗족 프로도, 성배를 찾아가는 모험이 아니라 절대 반지를 봉인하는 모험, 이것들은 중세 로망과 차이를 크게 벌린다. 평범한 프로도는 독자 대중의 손쉬운 이입을 보장하는 장치로 볼 수도 있지만, 강화된 대중의 정치적 입지를 반영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절대 반지의 봉인은 명백히 반전의 메시지로 읽힐 수 있다. 톨킨이 텍스트를 구상하던 때는 과학기술이 동원된 전면전의 시기, 일거에 세계를 몰살시킬 수 있는 핵 위협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덧붙여 당시 몰락해 가던 영국이란 맥락도 놓칠 수 없는 부분이다. 미국에 세계의 헤게모니를 빼앗기고, 민족해방의 물결에 식민지를 잃어버리던 때가 아니던가. 이는 로망의 역사에서 결코 낯설지 않은 모습이다. 그것은 (권력의) 긍정적 표현이든 (쇠락의) 부정적 표현이든 상관없는 일이다.
이제 이야기를 환타지로 좀더 집중해 보자. 앞서 따옴표로 강조했던 표현이 기억이 날지 모르겠다. ‘환타지로 명명하는’ 텍스트의 구조 로망이라고 했을 때 썼던 말이다. 두말의 여지없이, 로망이 현재 환타지에서 중요한 지류를 형성하고 있긴 하다. 다만 문제는 현재 한국에서 오로지 톨킨을 원용하고 변형한 텍스트만 환타지로 명명하고 있는 실정 때문이다. 즉 영웅이 나오고, 이국이 배경이 되고, 성배 찾기 비스무리한 모험이 있어야만 환타지로 여겨진다. (정말이지 용이 나온다고 환타지라면, 개가 말을 해도 환타지로 봐도 될 것 같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서 정작 중요한 텍스트가 환타지 바깥으로 퉁겨져 나가는 엉뚱한 결과를 빚게 된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 같은 과정에서 만화의 형식이 원래부터 환타지에 딱 알맞다는 얼토당토 않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다. 그런 정도라면 모든 재현은, 모든 예술은 환타지로 몽땅 환원할 수 있을 것이다. (덧붙여 만화 잡지가 편한 대로 나눈 장르 분류는 제발 피하자. 소재로 나눈 것인지, 서사로 나눈 것인지, 그림체로 나눈 것인지,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일단 중세의 로망과 근대의 환타지를 구별하는 일에서 실마리를 찾아보자. 이는 마술의 시대와 마술이 사라진 시대의 구별에 일치하며, 타자로 내세우는 질서의 구별과도 일치한다. 전자는 종교, 즉 기독교의 질서고 후자는 과학, 즉 물리학의 질서다. 가령 『아더 왕의 모험』의 아더 왕과 『변신』의 (바퀴벌레가 된) 그레고리는 그 점을 극명하게 대비시킨다. 그 둘의 차이는 생각해 보면 어렵지 않다. 세계의 측면에서 전자는 (어느 정도는) 조화롭게 창조된 이국의 세계지만, 후자는 기묘하게 병치?조립된 현실의 세계다. 주체(주인공)의 측면에서 전자는 자연 법칙을 넘나드는 영웅이지만, 후자는 평범하다 못해 찌그러든 인간이다. 그것도 현실 세계와 비현실 세계의 중간에 끼여있는, 그리고 양쪽의 세계에서 철저히 배제된 타자다. 바퀴벌레 그레고리도, 프랑켄슈타인도, 투명인간도 모두 버려진 타자들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묘사된 현실과 주체는 무엇을 의미하고 있을까? 의심, 자명한 이 세계에 대한 의심이다. 유리알처럼 투명한 자연 법칙이 지배하고 있는 현실, 엄격한 논리가 자리잡고 있어 더 이상 설명되지 않을 것은 하나도 없는 현실, 그에 따라 조금도 의심받지 않는 지금의, 근대의 사회 구조가 뿌리내리게 된다. 따라서 환타지는 그런 법칙과 질서와 구조를 극한?한계에서 의심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지점에서 미하일 바흐찐의 이야기가 적잖이 도움이 되겠다. “환상성은 여기서 진실의 적극적인 구현이 아니라 진실을 추구하는 과정에서의 자극이며, 보다 중요하게는 진실을 시험하는 것이다.” 즉 진실을 추구하지 않고 진실을 시험한다. 바로 이것이 근대적 환타지의 요체인 셈이다.
이 같은 시험이 저 너머에 창조된 세계가 아니라, 기괴하고 낯설게 조합된 이 세계를 겨냥한다는 점, 그 때문에 그레고리는 자기 집에서 바퀴벌레가 되었고, 프랑켄슈타인과 투명인간은 인간의 세계를 정처 없이 떠돌게 되는 셈이다. 그러면서 이 세계의 갖가지 질서를 끊임없이 의심한다. 즉 리얼리즘이 끝끝내 억눌렀던 자명한 현실의 이면을 폭로하며, 리얼리즘의 세계에서 불가능한 것을 욕망한다. (환타지가 비교적 현실의 투명한 질서를 의심했다면, 범죄 소설은 주체의 명민한 이성을 의심했다. 이 같은 의심에서 비롯된 불안은 범죄 소설의 주체가 (추리 소설의) 명민하고 논리적인 홈즈에서 (하드 보일드 소설의) 우울하고 고독한 샘 스페이드로 바뀌는 면면에서 엿볼 수 있다. 이후 범죄 소설의 주인공은 아예 선악을 초월해 버리기도 한다. 이는 근대 부르주아 윤리에 대한 명백한 부정이자 비판이다. 덧붙여 최초로 추리 소설 『모르그 가의 살인』을 썼던 에드가 앨런 포가 『어셔가의 몰락』란 환타지를 썼던 사실도 흥미로운 점이다)
자 이야기를 만화로 돌려, 어떤 만화에서 근대적 환타지를 엿볼 수 있을까? 무엇보다 이토 준지의 만화를 꼽을 수 있다. 흔히 그의 만화를 공포로 분류하지만, 이는 부당한 일이다. 아주 헐겁게 본다면, 어찌해서 공포로 분류할 수도 있겠지만, 헐거운 만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게 많다. 사실 공포물은 범죄물의 하위 장르다. 기존 범죄물(추리, 서스펜스, 미스테리)의 주인공이 문제의 ‘능동적인’ 해결자로 설정되는 반면, 공포물은 ‘수동적인’ 해결자로 자리매김된다. 왜냐하면 범죄물에서 주인공이 어찌됐든 사건에 능동적으로 개입한다면, 공포물에서 주인공은 수동적으로 휘말리게 되기 때문이다.(이 사실 역시 근대 주체의 명백한 후퇴의 징후다) 물론 날이 갈수록 환타지와 경계가 희미해지기는 하나, 아주 지워져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사실 이토 준지의 만화에서 공포를 느끼기란 용이하지 않다. 사건이 있다고는 하지만, (범죄물이나 공포물과 같은) 해결의 과정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 보다는 긴장감,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분 나쁜 감정이 솟구치기 일쑤다. 즉 온통 어울리지 않는 결합 때문에 늘상 기묘한 불안을 불러일으킨다. (비교적) 현실적인 그림체는 비현실적인 이야기들과 어긋나고, 과거 현재 미래의 단선적인 시간 흐름은 파괴되어 있으며, 한 곳에 존재할 수 없는 여러 차원의 공간이 중첩돼 있으며, 속내 깊숙이 숨겨 두고 억눌러 두었던 욕망이 여과 없이 분출되며, 주체의 정체성은 갈기갈기 분열되며, 짜임새 있는 사건의 인과 관계는 먼지처럼 사라진다. 차라리 ‘기’자 돌림으로 묘사하는 게 정확할 지 모르겠다. 기괴하고, 기묘하고, 기이하고 등등. 바로 이 곳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이지만,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고, 그 때문에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지만, 그렇다고 배제해 버릴 수도 없는, 일말의 불안.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바로 곁에서 은밀히 속삭인다. 세상은 너무나 자명하다고, 설명할 수 없는 것이란 하나도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목소리는 그래서 위태로워진다. 언제든 벽에서 손이 불쑥 튀어나와 당신의 목을 움켜잡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끝내기 전에 한 가지 점만 유념하자. 텍스트의 계보를 그리는 것, 좋다. 만화가들을 일렬로 늘어 세우는 것, 이해할 수 있다. 분명히 필요할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왜 그런 계보가 형성됐는지, 왜 그런 텍스트가 형성됐는지, 즉 컨텍스트를 묻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지도는 탐험에 쓰라고 있는 것이지, 보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 지도도 똑바로 그려야 그나마 볼만도 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