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35년, 프랑스의 어느 작은 시골 마을. 평화로운 풍경과는 다르게 이 마을은 12년 전, 마녀가 나타나 사람들을 해치고 공포로 몰아넣었던 곳이다. 마을의 아름다운 소녀 ‘로즈’는 이웃 소년 ‘페터’를 남몰래 사랑하고 있지만, 로즈와 어머니 ‘레아’는 마녀로 몰려 이웃의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
한편, 최근 들어 매일 밤 양이 사라지고, 사람까지 잡혀 먹힐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도는 데다 마녀의 시종인 ‘레몬’까지 나타나 마을은 공포에 휩싸인다.
이런 가운데 페터가 마녀의 성으로 잡혀가고, 로즈와 페터의 형인 ‘테오도르’ 등이 그를 찾아 떠나면서 상황은 극으로 치닫는다. 포털사이트 다음에서 매주 목요일 연재되고 있는 추혜연 작가의 ‘창백한 말’이다.
다소 이상하게 들리는 이 제목은 성경 계시록에 나오는 것으로, 죽음을 태우고 온다는, 즉 죽음의 상징 같은 존재를 일컫는다. 이 작품에서는 주인공이자 마녀인 로즈의 별명을 의미한다. 첫 작품으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무서운 신인’ 추혜연 작가를 만났다.
“슬프고 아름답고 잔인한 이야기죠”
‘창백한 말’의 인기가 뜨겁다. 긴장감 넘치는 스토리, 최고의 퀄리티로 “눈이 호강하는” 이 보석 같은 작품에 독자들의 탄성이 이어지고 있다. 댓글은 물론 작가의 팬 카페에 올라온 수많은 팬아트와 팬픽이 그 증거.
“데뷔작이다 보니 멋도 모르고 시작했어요. 웹툰이고, 컬러니까 최대한 제가 할 수 있는 한 해드리고 싶어요. 하루에도 몇십 편씩 (웹툰이) 쏟아지는데 살아남아야죠.(웃음)”
대학 1학년 때쯤이었던 것 같다. 추혜연 작가는 강의 시간에 깜박 딴 생각에 접어들었는데, 불현듯 평범하게 살던 한 여자아이의 정체성이 위협받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자신은 이제껏 알고 있던 자신이 아니고, 옛날에도 내가 있었고, 그 모든 사실로 혼돈에 빠진다는 설정이었다. 이야기는 머릿속을 맴돌다 그해 겨울방학에 콘티로 만들어졌다. 그 뒤로 계속해서 살을 이어붙인 이야기는 마침내 ‘창백한 말’로 탄생하였다.
용기를 내어 포털사이트 다음과 네이버의 아마추어 만화가 연재란에 동시에 작품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반응이 꽤 괜찮았다. 14화 정도 연재됐을 때 다음 쪽에서 먼저 연락이 왔고, 지난해 9월 정식 작가로 데뷔를 했다.
“준비기간이 길었는데, 연락이 오니까 문득 사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어요. 새로고침 하다 (제 작품이) 딱 뜨는 것을 보면서 야, 신난다, 진짜 데뷔했구나 싶었죠.”
그렇게 연재를 시작하며 숨가쁘게 달려온 시간. 20화 정도를 예상했던 이야기는 최종 33화로 이어지게 되었고, 7월 중순께 곧 대단원의 막을 내릴 예정이다. 아쉽지는 않을까.
“4월에 끝났어야 해요.(웃음) 이야기는 비극일까요? 아마도 비극이겠죠. 처음부터 슬프고 아름답고 잔인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거든요.”
“아마도 《윙크》가 시작이었을 거예요. <노말시티>, <레드문> 등이 연재될 때 좋아했어요. 출판만화에 대한 꿈이 생긴 것도 그때쯤이고요.”
《윙크》를 보며 자란 소녀는 김진, 강경옥과 같은 만화가를 꿈꾸게 됐다.
“강경옥 선생님 같은 작가가 되고 싶어요. 작품 자체가 너무 좋죠. 방향 같은 게 저랑 맞아 떨어지는 것도 있고. 활동도 활발하게 하시고요. 그래서 닮고 싶은 분이에요.”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긴 했지만 처음부터 이렇게 ‘훈훈한’ 작화 실력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미술학원에서조차 ‘그림 잘 그린다’는 칭찬 같은 것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고. 좀더 좋아지기 전에 부단하게 노력하고 노력한 결과라고 한다.
이후 그녀는 경기예고 만화창작학과를 졸업, 한성대 애니메이션과에 진학하게 되었다. 습작품이 많지는 않지만 예고 시절에는 동인지 활동을 통해 책도 여러 권 냈다. 작품이 책으로 묶여 나와 손에 쥐었던 그 짜릿한 느낌을 그녀는 잊을 수가 없다. 그녀가 출판만화에 뜻을 둔 것도 이 때문일지도.
재학중 출판만화로 데뷔하고 싶어 꽤 공을 들여 준비했지만 이미 출판만화 시장의 진입로는 좁아진 지 오래였고, 대신 웹툰이라는 신세계가 활짝 열려 있었다.
“강풀의 ‘순정만화’ 때부터 점점 더 뭔가 나오고 인기도 있고, 비전도 있어 보여 흥미를 갖게 됐어요. 웹툰 한 번 해보고 싶긴 한데 마침 출판만화 공모에도 떨어진 상태였고, 그걸 기회로 하게 됐죠. 출판으로 다 표현 못하는 컬러감을 구현할 수 있는 것도 마음에 들었고요.”
회당 100컷이 넘어가는 방대한 작업량. 그럼에도 손에 꼽을 만한 퀄리티로 댓글에서는 벌써 작가를 안스럽게 여기는 추종자들까지 생겨났다. 힘들지는 않을까?
“처음엔 혼자 다 했는데 지금은 밑색 도와주는 어시가 한 명 있어요. 그게 제일 쉬운 건데도 그 분은 힘들어서 도망가려고 하죠.(웃음)”
솔직히 가끔은 고되기도 하지만, 그 많은 작업량이 오히려 자신의 연출 미숙에서 오는 게 아닐까 하고 걱정하는 그녀다.
“연출이 아직 부족한 거죠. 이야기를 좀더 압축적으로 보여줘야 하는데 약간 늘어지는 듯한 느낌이 저 스스로도 들어요. 하지만 순정만화다 보니 감성표현도 다 해줘야 하고…….”
‘욕심 많은’ 신인 추혜연.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만화를 봐줬으면 좋겠고, 좋아하는 만큼 계속 해나갈 수 있길 바라는 게 그녀의 작은 소망이다.
다음 작품은 무엇이 될까. 상황이 허락한다면 아마도 ‘창백한 말’ 시즌 2가 될지도 모르겠다. 요즘 관심은 사람들 사이의 감정변화와 그 안에서의 관계 변화다. 조금 불평등한 사회와 개인간의 관계 같은 것이나 사회 시스템으로 입는 개인의 일방적인 피해, 빈부격차 등에도 흥미를 느낀다. 그렇게 속에 있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풀어내면서 좋은 작가가 되고 싶은 것이 그녀의 꿈이다. 마감은 힘들어도 지켜보는 독자들이 있다면 언제나 힘을 낼 것이다.
“마감 때는 정말 많이 힘들어요. 하지만 후회한 적은 없어요. 팬 여러분들, 계속 아껴 주시고, 앞으로 아껴 주시는 만큼 열심히 할 테니까 지켜봐 주셨으면 좋겠어요. 무관심이 제일 무서우니까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