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는 천년 묵은 구미호다. 한 무당집 족자에 천 년 동안 갇혀 살면서 자신을 족자에서 꺼내줄 이른바 ‘환생인’을 찾고 있다. 무당 할매의 귀여운 손녀 ‘이소윤’은 세습무의 운명의 타고났다. 강력한 영능력 탓에 연일 잡귀가 꼬이지만, 반야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나곤 한다. 포털사이트 네이버에서 인기리에 연재중인 기량 작가의 ‘천년구미호’다.
이 작품에 재주를 넘고, 남자를 홀려 간을 빼먹는 소복 입은 구미호는 없다. 대신 꽃미남 구미호를 필두로 전통 무속신앙에 기반한 참신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도깨비를 비롯해 성주신과 조왕신, 산신 백호와 뱀선비, 그슨새, 신수 불가살이, 허주 등의 낯선 존재들을 알아가는 재미가 꽤 쏠쏠하다. 게다가 반야를 향한 소윤의 감정이 커지면서 앞으로 이들의 관계가 어떻게 이어질지 기대하게 한다.
“공기 좋고 여유로운” 고향 제주도에서 조용히 ‘천년구미호’를 집필중인 기량 작가를 서면으로 만나봤다.
“
제주도에 만화 행사가 있었는데, 거기에 넣을 일러스트를 그리게 됐거든요. 당시 케이블 채널에서 무당과 퇴마 관련 프로그램을 엄청 좋아라 하며 보고 있었는데, 온갖 화려한 색의 무당 옷이 참 예뻐서 그리다 보니….”
시작은 단순했다. 무당 그리기에 빠져 지내다 총각귀신을 주인공으로 한 만화를 생각하게 됐고, 조금 밋밋한가 싶어 꼬리도 그려 넣었다. 나아가 구미호와 무당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보던 중 구미호가 천년을 살면 신이 된다는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반야’가 탄생하던 순간이다.
우리 전통 무속신앙을 젊은 감각으로 코믹하게 풀어낸 이야기 ‘천년구미호’는 우리 것에 대한 작가의 남다른 애정에서 출발했다. 한옥, 한복, 고풍스런 풍경은 물론, 특히 설화와 전래동화, 신과 관련한 이야기에 무한한 애정과 관심을 가진 그녀다.
“예전부터 일본만화에는 자신들의 전통 이야기를 만화에 잘 녹여 그려 놓는데, 우리나라에는 그런 이야기들이 많이 없었던 것 같아요. 좀 밝고 코믹하게 우리나라 전통 이야기를 다뤄보는 만화가 있으면 하는 마음에 ‘천년구미호’를 그렸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극 초반부터 지금까지 듣고 있는 이야기는 ‘이누야샤’와 비슷한 분위기라는 것. 실제로 그녀가 영향받은 작품이 다카하시 루미코의 ‘란마 1/2’이라니 독자들이 ‘이누야샤’를 떠올리는 것도 무리가 아닐 듯싶다.
“흔한 설정을 차용한 것뿐인데 초기 부분만 보고서 많이 오해하신 분들이 계시기도 했어요. 내용 진행이 된 지금은 조금 덜하긴 하지만 여우구슬이나 전통적인 요괴 같은 소재 부분들이 비슷해서 그걸 가지고 오해하지 않게 풀어나가야 하는 게 제게 주어진 과제죠.”
기량이라는 필명은 ‘구기자 기’에 ‘어질 량’. 그녀답게도(?) 데뷔 전, 작명소에서 스님에게서 받은 이름이다. 사실 만화가는 오래된 꿈이었지만 데뷔는 엄두를 내기 어려운 일이었다고 한다.
“습관적으로 낙서하고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다 보니 자연스레 만화를 그리게 됐습니다. 정확하게 (만화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것은 중학교 3학년이었던 걸로 기억나네요.”
이후 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그녀는 일러스트 등 틈틈이 외주 일을 해왔다. 하지만 막상 만화 연재 기회는 번번이 놓쳐 아쉬움이 크던 차에 용기를 내어 네이버 베스트 도전에 ‘천년구미호’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약 9월까지 대략 10여 회 가량 네이버 베스트도전을 통해 선보였던 이 작품은 팬들의 성원에 힘입어 정식으로 웹툰 코너에서 연재되기 시작했다. 운도 따랐다. 때마침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진행했던 만화매니지먼트 사업에 지원작으로 선정됐던 것.
“예전부터 항상 재밌고 밝고 유쾌한 만화를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습니다. 막상 만화가가 되고 보니 역시 어렵긴 하지만 그만큼 노력해서 좀더 재미있고 기억에 남을 만한 만화를 그릴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어요.”
‘천년구미호’ 속 각종 소재와 정보는 그녀가 발품을 팔아 공부한 것들이다. 무속신앙에 대한 방대한 자료로 ‘멘탈붕괴’가 올 때도 있었고, 때론 남성도 여성도 아닌 그림을 즐긴 대가(?)로 ‘작화붕괴’를 겪기도 했다. 그래도 만화가가 되길 참 잘했다. 특히 작품에 달린 댓글이나 블로그에 남겨진 ‘반야 팬’들의 흔적(?)을 접할 때면 그녀는 “든든한 지원군이 있다는 느낌”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작가가 되는 걸 꿈만 꿔왔는데 결국 이뤄졌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많은 독자분들이 제 만화를 봐주고 재미있다고 해줄 때 가장 보람을 느낍니다.”
‘천년구미호’는 이제 소윤과 반야의 가슴 설렌 로맨스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과연 소윤의 사랑은 이뤄질까? 아마도 앞으로의 관전 포인트가 될 듯하다. 또, 조만간 환생인에 대한 열쇠를 쥐고 있는 캐릭터가 등장할 예정이어서 기대를 모은다.
“현재 여주인공이 짝사랑하는 단계인데요, 반야가 이를 알아채고 받아주느냐 마느냐와 반야가 찾는 환생인이 누구인가, 환생인과 반야가 과거 어떤 관계였는지가 관전 포인트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 항상 감사하다는 그녀. 그 사랑을 더 좋은 작품으로 보답하겠다며 굳센 의지를 드러낸다.
“아직 많이 부족한 작품입니다. 그저 재밌게 봐주시는 분들께 감사한 마음만 가득합니다. 좀더 재밌는 ‘천년구미호’를 만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 시즌 2까지 연재하고 싶고, 무사히 성공한다면 짧은 과거편까지 보여 드리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