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현재, 꾸준히 작품을 그리는 만화가 중에 이현세, 이희재 화백에게 “현세야”, “희재야”라고 말을 놓을 수 있는 작가가 얼마나 있을까. 장태산(64)이 그렇다. 1980~90년대 ‘야수라 불린 사나이’, ‘나간다 용호취’, ‘스카이 레슬러’ 등의 작품을 통해 힘이 넘치고 세밀한 극화체로 유명했던 그다. 지금도 타의추종을 불허한다. 전설, 거장, 화백이라는 호칭보다 그저 만화가로 불리기를 바라는 그를 지난 6월 말 경기 부천 한국만화영상진흥원 내 작업실에서 만났다. 일생의 마지막 장편이 될지도 모르는 대하 서사극 ‘몽홀’의 연재를 포털사이트 네이버에서 시작한 지 1년 반가량 됐다. 대본소 시대를 거쳐 잡지 시대를 경험했던 만화가가 웹툰으로 활동을 이어가는 것은 매우 드문 사례다. 그 스스로도 평생 씨름할 것으로 여겼던 종이 원고지와 펜을 놓고 디지털 세계에 뛰어들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고 했다. 올해 예순 넷. 환갑이 넘어 신인으로 돌아간 그에게 반백년에 다가가는 만화 인생을 들어봤다.
△ 장태산 작가가 자신의 대표작 중 하나인 ‘야수라 불리운 사나이’의 단행본을 옆에 두고 활짝 웃고 있다.
A. 웹툰을 한다는 게 굉장히 낯설었죠. 유리판 위에서 그리는 것 같은 이질감이 있었어요. 무엇보다 연출 방식을 바꿔야 하는 게 어려웠어요. 종이 만화나 스크롤 형식의 웹툰이나 만화라는 건 같은데 들어가 보니 판이하게 다르더라고요. 책은 펼치면 두 페이지에 커트 수가 적게는 10개, 많게는 20개가 들어가 독자가 한눈에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데, 스크롤은 하나씩 내리잖아요. 40년 넘게 확신을 갖고 나름대로 해오던 방식으로 그리면 요즘 독자들은 이게 무슨 소리냐, 못 알아먹겠다고 말해요. 그런데 습관은 바꾸기 쉽지 않죠. 처음엔 페이지로 작업하고 잘라서 올렸어요. 그 연출이 페이지에서 봤을 땐 괜찮았는데 스크롤에서는 잘 안 맞아 떨어졌죠. 나중에 단행본을 낼 때 고생하더라도 스크롤을 배워야겠다고 마음먹게 됐어요. 27회부터는 아예 스크롤로 작업했어요. 열 달 쯤 됐는데도 뭐가 뭔지 지금도 헤매요. 스틱을 오래 운전하다 보니 편리한 오토가 나왔는데도 익숙하지 않은 기분인 거죠. 시골집 재래식 부엌의 가마솥에서 밥을 하다가 최신식 아파트 주방에 간 느낌이랄까.
A. 서글픈 이야기지만 종이 책이 살아 있었으면 조금 가난하더라도 그걸 계속 그렸을 거예요. 그런데 종이 만화 시장이 거의 없어져 생활도 할 수 없게 되어버렸죠. 저는 나름 계속 그려왔는데 노출이 안 되니까 몰라요. 은퇴했냐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친척 아이들은 만화가라니까 어느 웹툰을 그리느냐고 물어요. 어차피 만화 그리며 살기로 한 거 바닥이 바뀌었어도 해봐야겠다 싶었죠. 새로 적응해보려고 애는 쓰는 데 요즘 독자들이 우주인인지, 제가 우주인인지 모르겠어요. 세태를 따라가는 게 정말 쉽지 않아요. 창이나 뽕짝 세대인 제가 힙합을 억지로 이해할 수는 있지만 공감은 되지 않거든요. 작품 속에서 그런 게 알게 모르게 많이 나타나는 것 같아요.
△ 작업실 벽에 붙여진 ‘몽홀’의 종이 원고들. 장태산 작가는 ‘몽홀’ 연재 초기엔 전통적인 방식으로 원고를 그린 뒤 잘라 붙이는 방식으로 웹툰을 연재했다.
A. 저를 비롯한 기성 세대들은 웹툰이 성공하지 못할 거라 판단했어요. 원고가 팔려야 작가와 출판사가 먹고 사는 데 공짜라는 게 마음에 안 들었죠. 원고료를 준다 쳐도 자존심 상한다는 생각이었어요. 시대를 너무 몰랐던 거죠. 웹툰 초창기에는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처럼 하루가 다르게 많은 회사들이 웹툰하자며 드나들다가 99%는 어그러져 믿음이 가지 않았던 점도 있어요. 과거 몇 십 년 동안 배운 틀을 기준으로 보면 웹툰은 정상이 아니라 엉터리였어요. 그런데 막상 직접 하면서 보니까 나름대로 포석이 있는 건데 제 기준, 제 눈에 낯설다고 해서 평가절하 한 것은 제 안목의 실수라는 것을 깨닫게 됐죠. 얼마 전까지만 해도 립싱크를 하면 가수가 아닌 것처럼 매도당했는데 요새 아이돌 그룹이 전 세계를 휩쓰는 것을 보면 꼭 틀렸다고 볼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웹툰도 마찬가지죠. 일본에선 말도 안 되는 작가가 툭 튀어나오면 기성 작가들이 살려주는 분위기라고 해요. 우리도 그런 시기가 오지 않았나 싶어요. 우리 기성 작가들은 기초를 다지고 시작하는 게 맞는 것으로 배웠지만 요즘은 기초가 없더라도 표현력과 전달력만 있으면 된다고 보잖아요. 강풀이 그러더라고요. 자신은 실력이 없다고 선생님들이 문하생으로 받아주지 않아 독창적인 작가가 될 수 있었다고. 그게 맞아요. 그런 작가들이 계속 나와 주면 하는 바람입니다. 과거 세대는 너무 무겁고 신중하고, 정신을 따졌다면 요새는 재미와 인기를 먼저 따지는 데 절충된다면 보기 좋을 것 같아요.
A. 우리 웹툰도 K팝처럼 외국으로 무대를 넓혔으면 좋겠어요. 독자층이 5배, 10배 늘어난다는 건데, 그렇게 되면 작가들에게 대가가 많이 주어진다는 거니까 좀 더 나은 작품으로 나아갈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있죠. 만화를 업으로 먹고 살 수 있는 나라가 몇 군데 안 되더라고요. 아예 없는데도 많고요. 그런 면에서 우리 웹툰이 선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장태산 작가는 과거에는 의도치 않게 휘갈긴 선에서 멋진 그림이 나오는 맛을 느끼곤 했는데
그림 그리는 도구를 종이와 잉크 펜에서 태블릿과 전자 펜으로 바꾼 뒤에는 그 맛이 사라져 아쉽다며 웃었다.
A. 웹툰을 하기 전에도 컴퓨터를 활용했어요. 노안 때문이에요. 예순 즈음이 되니 작은 그림을 그리기가 힘들어졌어요. 돋보기를 끼고 한 시간만 그려도 머리가 너무 아팠죠. 컴퓨터는 그림을 확대해서 그리게 되니까 하루 종일 작업을 해도 무리가 없었어요. 거부감만 없다면 활용도가 정말 높아요. 종이에선 90% 이상 그렸어도 실패하면 다시 시작해야 하는데 컴퓨터에선 레이어로 쉽게 수정할 수 있죠. ‘몽홀’도 종이에 연재했으면 어시 2~3명에도 허덕였을 텐데 디지털 작업이라 혼자 할 수 있지요.
A. 작품을 준비하며 공부하는 마음으로 괜찮다는 웹툰을 몇 달 동안 섭렵했어요. 그때 좀 절망스런 기분이 들었던 게 제가 괜찮다고 생각한 작품은 인기가 없고, 이게 뭐지 싶은 건 인기가 있는 거 에요. 그래서 세대 벽은 있겠구나 싶었죠. 작품이라는 게 옛날에도 그랬지만 작가가 죽어라 해도 반드시 좋은 반응을 얻는 것은 아닌 데 제가 나이가 있다 보니 그런 부침이 있는 게 사실이에요.
△ 작업실 벽에 붙어 있는 그래픽 노블 ‘라반’의 아트워크. 장태산 작가가 2010년 선보였던 ‘라반’은 한국의 도깨비를 소재로 한 SF판타지물이다.
A. 1년 반 동안 고비도 있었죠. 제 그림이 원체 복잡해요. 처음엔 스마트폰이 없었는데, 큰 컴퓨터 화면으로 작업하고 또 컴퓨터 화면으로 보니까 괜찮다 싶었는데 이놈의 작가가 숨은 그림 찾기 하냐고 댓글에서 난리가 난거에요. 그래서 스마트폰으로 다시 보니 선도 많고 컬러도 덧칠이라 작은 화면으로는 힘들겠더라고요. 연재하며 이미 올려놓은 거를 수정해 나갔는데 워낙 시간이 걸리다 보니 20편 준비한 거 다 까먹고 휴재할 수밖에 없었어요. 지금도 100%는 아니에요.
A. 한 회 올릴 때마다 작가의 말을 한 줄 남겨요. 남들은 소통이라고 하는데 솔직히 하소연이에요. 고리타분한 제가 답답하게 느껴지는 게 많거든요. 한 장면 한 장면 애썼다는 반응도 있지만, 재미도 없는 데 왜 이렇게 그리고 있냐는 댓글도 있어요. 결과만 좋다고 좋은 게 아니라는 그런 저런 느낌을 이야기하고 싶고, 한편으로는 스스로 마음 다짐을 하는 것이기도 해요. 늙은 선배 귀찮다 안하고 이것저것 도와주던 후배들이 절대 댓글은 보지 말라고 했죠. 옛날로 치면 독자 페이지라는 생각에 들여다보다가 컴퓨터에 대고 욕한 적도 있어요. 물론 고마운 댓글도 많아요. 오타도 찾아주고. 저도 잊어버린 작품, 한 두 권 나오다 중단된 작품까지 기억해주는 독자들을 만나면 울컥하죠. 인기 웹툰 작가들은 10대 독자 비중이 크지만 전 거꾸로 에요. 50대, 40대, 30대 순으로 많지요.
△ 2010년 즈음 경기 부천 한국만화영상진흥원 내 만화비즈니스센터에 입주한 장태산 작가는
이웃한 후배들 덕택에 웹툰에 적응할 수 있었다고 소개했다.
A. 오래 하고 있다는 자부심까지는 아닌데 흡족한 것 하나는 코흘리개 시절부터 만화가로 살겠다는 마음먹은 게 지금까지 오고 있으니 어떻게 보면 미련한 거지만 나름대로 조금은 흐뭇한 기분은 들어요.
A. 후배들에게 노파심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느낀 그대로 표현하기 보다는 한 번은 걸러보라는 거예요. 그렇게 하는 게 독자들에 대한 작가적인 책임감의 최하선이 아닌가 싶어요. 웹툰 독자들이 적게는 몇 천 명에서 많게는 몇 십 만 명이니 거기에 대해 한 번쯤은 생각해보라는 거죠. 느낀 대로 그리면 통쾌할 수는 있어요. 그런데 보는 사람 입장을 생각하면 한 번쯤은 걸러 보는 게 좋지 않나 싶어요. 그렇다고 위축될 필요는 없죠. 젊은 친구들이나 저나 똑같이 같은 만화가로서 갖고 가야 하는 화두인 것 같아요.
△ ‘야수라 불리운 사나이’ 단행본이 담긴 꾸러미. 조만간 복간 예정이다. ‘몽홀’의 단행본 발간 계획은 아직까지는 없다.
작품이 중반 정도 진행된 뒤 순차적으로 낼 계획이다.
A. ‘몽홀’을 구상한지는 꽤 오래 됐어요. 열 몇 살 때 본 영화에서 출발했죠. 한 번에 두 편씩 보여주는 싸구려 영화관에서 존 웨인이 나오는 ‘테무친’을 봤어요. 지금은 내용이 거의 기억나지 않는데, 굉장히 충격적이었죠. 만화가가 되겠다는 바보 같은 생각을 가졌던 때라 언젠가 만화로 만들겠다고 마음먹었죠. 그러다가 1990년대 말쯤 더 늦기 전에 해봐야겠다 싶어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어요. 출판 제안도 여러 번 받았는데 출판 시장이 꺾어질 때라 자꾸 무산되는 거예요. 그렇게 10년이 지나며 잊었었는데 습작을 우연히 보게 된 네이버 쪽 제안으로 연재를 시작하게 됐죠.
A. 허영만 선배가 같은 소재로 ‘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를 그려 제가 땡깡을 부리기도 했어요. “아니, 형, 내가 그거 하려고 10년 준비했는데 먼저 치고 나오면 어떡해?”라고요. 그랬더니 “야, 인마. 삼국지는 수 십 권 나왔어도 또 나오고 있잖아. 너도 너 나름대로 하면 되지. 그런데 웬만하면 하지 마라. 그리기 힘들어 미치겠다.”고 하더라고요. 허허허.
△ 장태산 작가는 일주일에 하루 정도 집에 다녀올 뿐 대부분의 시간을 작업실에서 보내며 ‘몽홀’ 연재에 골몰하고 있다고 한다.
여러 작품을 동시에 했던 잡지 시절의 작업량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웹툰 연재가 녹록지 않다고.
A.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파주서 살았어요. 그때만 해도 만화가게는 꿈도 못 꿀 정도로 완전 시골이었죠. 며칠에 한 번 장이 설 때 만화 좌판이 펼쳐지곤 했어요. 전 원래 만화라는 게 있는지도 몰랐어요. 3학년 때인가 열병 비슷하게 걸려 누워만 있었던 시기가 있었는데 잠들면 헛소리를 하니까 어머니가 잠들면 안 된다며 장에서 만화책을 가져다 줬죠. 그렇게 만화를 접했어요. 서울에 와서 초등학교 6학년 때 ‘요술소년’이라는 일본 만화 영화를 봤다가 빠져들었어요. 당시엔 일본 애니메이션이 상영될 수 없었는데 아마도 대만 작품으로 둔갑해서 상영됐던 것 같아요. 단체 관람 갔는데 끝나고 나면 화장실에 숨었다가 나오는 방식으로 하루 온종일 봤어요. 그러면서 막연하게 만화가가 될 거라는 마음을 품게 됐죠.
A. 집이 가난해서 학교를 못 가게 되고 16살 때 쯤 오래 전 돌아가신 최상록 선생님 밑에서 문하생 생활을 시작했죠. 요새 친구들이 부럽기도 한 게 문하생 생활 10년 만에 자기 책을 내면 실력도 좋고, 운도 좋은 편에 속한 거예요. 보통 십 몇 년에 내게 되는데 심한 경우는 평생 못할 정도로 열악했죠. 전 실력은 별로 없었는데 운이 좋아 1982년 ‘불꽃’이라는 작품으로 데뷔했습니다. 허허허.
△ ‘몽홀’ 연재를 시작했을 때 선배인 백성민 작가에게 화선지에 붓으로 그린 말 그림을 선물받고는 힘이 났다는 장태산 작가는
최근 네이버 한국만화거장전에 올라온 백성민 작가의 단편 ‘고래’를 올린 것을 보고는 정말 감사하다고 덕담을 나눴다고 소개했다.
경지를 뛰어넘은 선배의 작품을 보고는 자신도 부지런히 해야겠다는 자극을 얻었다고.
장태산 작가는 선배, 동료 작가들이 보다 많이 디지털 만화에 도전했으면 하는 바람도 전했다.
A. 만화가로서 남은 목표가 있다면 인기가 있으면 좋겠지만 인기가 없더라도 ‘몽홀’을 혼자서 제가 생각한 모양대로 온전하게 마무리하는 거예요. ‘몽홀’은 6~7년 이상 걸릴 작품이니까 예순 중반인 제게 마지막 장편이 될 수 있거든요. 그 뒤에 살아 있더라도 새 작품을 장담 못하죠. 그래서 그런 마음이 드는 것 같아요. 40여 년 동안 못나면 못난 데로, 잘나면 잘난 데로 갈고 닦은 제 실력이 있다면 그것을 오롯이 쏟아 붓고 싶어요. 다른 목표는 없어요. 그래서 인기가 얻어지면 고마운 거고요. 저 자신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제 스스로 수긍할 수 있는 타협점은 찾아갈 거예요. 그런데 욕심만큼 잘 안되네요. 처음에 화두는 과연 문명이 야만보다 떳떳할 수 있느냐 그런 것을 묘사해보고 싶었는데 막상 드라마로 들어가니까 쉽지 않더라고요. 실력이 딸려서. 허허허,
A. 웹툰을 한다는 게 굉장히 낯설었죠. 유리판 위에서 그리는 것 같은 이질감이 있었어요. 무엇보다 연출 방식을 바꿔야 하는 게 어려웠어요. 종이 만화나 스크롤 형식의 웹툰이나 만화라는 건 같은데 들어가 보니 판이하게 다르더라고요. 책은 펼치면 두 페이지에 커트 수가 적게는 10개, 많게는 20개가 들어가 독자가 한눈에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데, 스크롤은 하나씩 내리잖아요. 40년 넘게 확신을 갖고 나름대로 해오던 방식으로 그리면 요즘 독자들은 이게 무슨 소리냐, 못 알아먹겠다고 말해요. 그런데 습관은 바꾸기 쉽지 않죠. 처음엔 페이지로 작업하고 잘라서 올렸어요. 그 연출이 페이지에서 봤을 땐 괜찮았는데 스크롤에서는 잘 안 맞아 떨어졌죠. 나중에 단행본을 낼 때 고생하더라도 스크롤을 배워야겠다고 마음먹게 됐어요. 27회부터는 아예 스크롤로 작업했어요. 열 달 쯤 됐는데도 뭐가 뭔지 지금도 헤매요. 스틱을 오래 운전하다 보니 편리한 오토가 나왔는데도 익숙하지 않은 기분인 거죠. 시골집 재래식 부엌의 가마솥에서 밥을 하다가 최신식 아파트 주방에 간 느낌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