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안녕하세요. 작가님. 간단하게 자기소개 부탁드리겠습니다.
A. 안녕하세요. 만화가 하일권입니다.
Q. 2013년에 <방과후 전쟁활동>으로 오늘의 우리만화상을 수상하셨는데요, 올해는 <병의 맛>으로 2019 오늘의 우리만화상을 수상하셨습니다. 소감이 어떠신가요?
A. 오랜만에 상 받아서 기분 좋았어요. <병의 맛>이라는 작품을 이번 기회에 좀 더 많은 분들이 관심 가질 수 있는 기회가 되어서 더 기쁩니다.
Q. 지금은 <스퍼맨:현자단의 역습>으로 벌써 시즌3를 연재하고 계시죠. 쉬지 않고 매년 작품활동을 하시는데, 시간관리나 건강 관리는 어떻게 하시나요?
A. 사실 건강 관리를 잘 하는 편이 아니라서 어렵게 하고 있어요. 특히 스트레스 관리를 잘 하지는 못하는 편이라 체력적인 부분도 그렇지만 스트레스 관리가 힘들었죠.
Q. 스트레스 관리요?
A. 사실 꽤 예전부터 공황 증상이 있었어요. 거의 <목욕의 신> 전부터요. 동시 두 개 작품을 연재할 때도 있었고, 일을 너무 많이 했어요. 그런데 크게 스트레스 받거나 힘들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일 중독처럼 일만 하다가 스트레스가 점점 쌓였던 것 같아요. 저뿐만 아니라 만화가들이 다 힘들죠. 웹툰작가들 중에도 공황 장애 갖고 계신 분들이 꽤 있어요.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스트레스가 큰 직업인 것 같습니다.
Q. 그간 다수의 웹툰과 단행본을 작업하셨습니다. 작가님의 마음에 지금 당장 떠오르는 작품을 꼽으라면 무엇일까요?
A. 어려운 질문이네요. 제가 작품을 연재하는 동안에는 전 작품들은 머릿속에서 지우고 작업하는 편이라서요. 그래도 지금 생각나는 작품을 고르자면 최근에 작업했고 상도 받은 <병의 맛>이라고 해야겠네요. 지금 연재 중인 <스퍼맨>도 당연히 저에게 중요한 작품이지만. 병의 맛이 최근에 상도 받았고, 개인적으로 저에게 의미 있는 작품입니다.
Q. 그럼 작가님께 의미가 큰 <병의 맛>에 대해 구체적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병의 맛>은 색채부터가 <스퍼맨>이나 <목욕의 신>과는 분위기가 많이 다른데요. 학교 폭력, 가정 폭력, 공황장애를 소재로 선택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A. 제가 공황장애를 다년 간 경험하면서 이 얘기는 꼭 만화로 하고 싶다고 생각 했었어요. 지금은 매스컴을 통해 공황 장애에 관한 내용들이 알려지면서 사람들이 공황 장애를 생소하게 여기지 않게 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많은 분들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잘 모르더라고요. 일종의 기분의 문제, 의지의 문제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정보 부족으로 인한 그런 시선들이 공황장애 앓고 있는 분들에게는 더 상처가 되고요. 그래서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공황 장애에 대해 제대로 알면 주변에 공황 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Q. 공황 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A. 가장 중요한 게 인식인 것 같아요. 사실 공황장애는 갑자기 아픈 게 아니라 일종의 불안 장애에요. 불안하지 않은 상태인데도 신경 신호가 잘못되어서 계속 불안감을 느끼는 거죠. 그런데 이 상황이 심해지면 심장이 빨리 뛴다거나 체온이 올라가거나 하는 신체 반응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패닉 상태가 되죠. 그런데 겉으로는 티가 나지 않아요. 그러니까 주변 사람들에게 많이 알리고 이해해달라고 미리 도움을 요청하는 게 좋아요. 그래야 주변 사람들도 좀 더 편하게 배려해줄 수 있고요.
Q. 심리적 불안감과 공황의 느낌을 검은색 촉수 같은 것으로 표현하셨습니다. 날카롭고 역동적이면서 불안하고 공포스러운 느낌이 잘 전달되었는데요. 어떻게 비주얼화 하게 되었나요?
A. 공황 장애에 대해서 최대한 알리고 싶었어요. 제 지인들에게도 다년간 자세하게 설명을 해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사실 이게 정확하게 어떤 기분인지는 자신이 경험해보지 않는 이상 이해하기가 힘들잖아요. 그래서 막연하게 텍스트로만 설명하면 독자분들이 받아들이기가 어려울 것 같았어요. 직관적으로 “이런 느낌이다!”라고 보여줄 수 있는 게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최대한 이미지화 하게 되었습니다.
검은 무언가가 죄어오고, 공격하는데 본인도 그게 뭔지는 잘 모르는 거죠. 이런 감정과 불안이 잘 느껴지도록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Q. 작가님께서는 그 검은 물체를 뭐라고 부르시나요?
A. 딱히 부르는 명칭은 없습니다.
Q. <안나라수마나라>에서도 전반적인 흑백에 포인트 색채를 사용하셨습니다. <병의 맛>은 모두 흑백 색체를 선택하신 이유가 있으신가요?
A. 작품 분위기와 ‘이준’이의 감정을 표현하기에 검은 톤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을 했어요. 또 중요한 이유는 <스퍼맨>이랑 동시에 연재하다 보니 여력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웃음). 그런데 원래 다른 컬러나 톤을 생각했다가 여력이 안 되어서 흑백을 선택했던 건 아니고요. 원래부터 흑백톤을 염두에 두고 있었어요.
Q. ‘변이준’과 ‘이순이’의 이름에는 어떤 일화가 있었나요?
A. 전작도 마찬가지지만 캐릭터 이름을 깊게 생각을 하지 않는 편이에요. 유치하다 싶을 정도로 독자들이 직관적으로 기억하기 쉽게 이름을 지어요. ‘이준’이는 컨셉이 중학교 2학년이잖아요. 사춘기 시절의 느낌을 살리려고 중2병, 거꾸로하면 병2중. 그래서 ‘변이준’이 되었죠. ‘이순이’는 반에서 눈에 안 띄는 캐릭터잖아요. 정말 흔하디 흔한 이름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가 ‘순이’가 나왔습니다.
Q. ‘이준’이는 친구 관찰해서 시 쓰는 숙제에 “친구가 있는지를 먼저 물어봐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질문을 던질 정도로 은근한 폭력들을 예민하게 발견하고 지적할 줄 아는 성격입니다.
A. 공황장애를 앓고 있고 원래도 예민한 성격인데 과거에 학교 폭력을 당한 기억도 있죠. 그러다 보니 매사에 날카롭게 반응하고 어떻게보면 신경질적인 그런 캐릭터로 설정을 했습니다.
Q. 생각이 많고 예민한 ‘이준’이와 대조적으로, ‘순이’는 자신의 상황에 놀랍도록 의연해 보입니다.
A. 두 캐릭터가 서로 대비되는 효과를 주기 위한 설정이었습니다. 둘의 케미가 좋으려면 한쪽은 무뚝뚝하고, 굉장히 상처가 많지만 티를 잘 내지 않는 캐릭터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Q. ‘순이’가 축구를 좋아하는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을까요?
A. 둘이 친해지기 시작하면서 친해질 매개체가 필요했어요. 뭐가 좋을까 고민하다가 그 나이대의 애들이 대부분 다 좋아하는 거 말고 둘만 좋아할 만한 게 뭐가 있을까 생각했어요. 그러다 마침 제가 축구 보는 걸 좋아해서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순이’에게 안 어울리는 것 같은데 그래서 더 매력 있게 다가오는 느낌이 있었어요.
Q. 극중 등장하는 ‘순이’의 글씨는 작가님께서 쓰신 건까요?
A. 제가 쓴 건 아니고요. 여자 글씨여야 해서 와이프한테 부탁했습니다.
Q. ‘이준’이도 그렇고 ‘순이’도 그렇고 학교를 자주, 그것도 장기로 빠집니다. 주인공들의 진급에는 문제가 없나요?
A. 저도 신경을 못 쓰다가 나중에서야 알아챘어요. 미처 생각을 못 했네요. 개인적인 사정이 있으면 학교 측에서도 봐주지 않을까요?ㅎㅎ
Q. '이준'이가 거의 한 달을 하염없이 누워만 있는데도 부모님의 개입이 없던 것으로 묘사됩니다. 부모님 얼굴도 나오지 않는데, 이유가 있을까요?
A. 의도적으로 부모님의 무관심을 표현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고요. 공황장애라는 게 심각해지면 활동 범위가 줄어들게 되거든요. 사람 많은 곳이나 사회생활을 피하게 되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우울증이 동반이 된다고 해요. 그러면 집, 심하면 방 밖으로도 못 나가는 히키코모리가 될 수 있거든요. 심각할 땐 그렇게까지 될 수 있다는 것을 극단적으로 표현하려다가 그렇게 됐습니다. 특별히 부모님의 무관심을 의도한 건 아니었습니다.
Q. <병의 맛>은 가해자들이 얼마나 나쁜지를 고발하기보다는 피해자들의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에 더 초점을 맞춘 이야기 같습니다.
A. 어떤 사건이 있을 때 사건의 심각성을 제대로 보여주려면 사실은 피해자의 시선을 보여주고 이야기를 하는 게 더 훨씬 깊이 있게 와 닿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Q. <병의 맛>은 어떤 독자층을 대상으로 기획한 작품인가요?
A. 주요 독자층은 10대부터 3-40대까지 넓게 설정했습니다. 사회적인 폭력을 한 번이라도 경험해 본 사람들이요. 딱히 공황 장애가 아니더라도 사회 생활을 하다 보면 물리적인 폭력 말고도 여러가지 상처를 받잖아요. 그런 모든 분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이야기였어요. 그런데 밝고 재미있는 톤을 가져갈 수 없어서 대중에게 쉽고 가볍게 읽히는 만화는 아니었죠. 어쩔 수 없었던 것 같아요.
Q. 실제로 가장 많은 독자층은 어떤 연령대였나요?
A. 나이대는 알 수 없지만 댓글을 다 읽어 보니 과거에 학교폭력이나 그런 상처를 입었었는데 위로 받았다는 글도 있었던 걸 보니 학생들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가늠은 할 수 없지만 의외로 성인 독자분들도 많았던 것 같아요.
Q. <병의 맛>은 불안과 우울을 껴안고 살아가는 학생들, 나아가 현대인 전체가 공감할 포인트가 많은 것 같습니다. 가령 뭐가 그렇게 불안하냐는 질문에 “불안해질 까봐 불안”하다는 답을 내 놓는 것처럼요.
A. 공황장애를 한 줄로 요약하자면 이 문장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불안감이 올 까봐 불안해하는 거죠. 이런 걸 예기불안이라고 하는데. 불안할 까봐 불안하고. 불안이 심하면 공황 증상이 나타나는 식이니 악순환의 연속이 되는 거죠.
Q. 작중에서 ‘불안할 까봐 불안한’ 상황을 표현하신 장면은 어디인가요?
A. 달리기 하는 장면이요. ‘이준’이가 달리기 끝나고 나서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해요. 사실 달리기 후에 심장이 뛰는 건 신체적으로 당연한 증상인데 공황장애 환자들은 “왜 심장이 뛰지? 불안해서 그런가?” 하는 식이 돼 버려요. 그래서 거기에서 공황에 잡아 먹히는 장면이 나오죠.
Q. 이 운동장 장면에서 공황에 잡아 먹힌 ‘준이’를 ‘순이’가 구해주는 장면에 대한 해설이 끝내 나오지 않았습니다. 순이는 어떻게 알고 그렇게 대처할 수 있던 걸까요?
A. 다른 독자분들도 많이 궁금해하시는 부분인데요. 독자분들 해석하기 나름일 것 같아요.
사실 조금 상징적인 장면이기도 해요. 운동장 장면 말고도 ‘순이’가 ‘이준’이의 망상 이야기에 장단을 맞춰주잖아요. 꽃이 보였다고 한다거나, ‘이준’이 방에 놀러가서도 검은 물체가 마치 다 보인다는 듯이 같이 놀고요. 후반에 순이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오히려 ‘이준’이에게 먼저 실재하지 않는 꽃잎을 보여 달라고 하죠. 이런 장면들이 정서적인 교감에 대한 상징적인 장면이라는 의도였어요. 그런데 그건 독자분들이 해석하시기 나름이에요. 이준이가 검은 촉수에게 공격당하는 것을 알았을 수도 있고, 시늉을 한 걸 수도 있죠. 독자분들이 상상하시는 대로 받아들이시면 될 것 같아요.
Q. '이준'이가 '순이'에게 검은 물체로 꽃을 잔뜩 만들어 보여준다거나, 마지막 장면에서 눈이 휘날리는 식으로 ‘꽃’과 ‘눈’이 자주 등장합니다. <삼단합체 김창남>, <두근두근두근거려>, <안나라수마나라>, <목욕의 신>, <스퍼맨>에서도 ‘꽃’과 ‘눈’은 단골 소재였는데요. 작가님께 ‘눈’과 ‘꽃’ 또는 ‘눈꽃’은 어떤 의미가 있는 소재인가요?
A. 글쎄요. 사실 큰 의미를 갖고 의도해서 넣은 것은 아니었어요. 처음에 삼봉이발소에서 처음 나왔었고 그 다음에 김창남에 나왔죠. 이렇게 넣다 보니까. 엔딩에서 눈이 와야 될 상황이 계속 생기더라고요. 그러다 보니까 다음에 또 넣어볼까? 또 넣어볼까? 이런 식으로 제 작품의 공통점처럼 특징처럼 자리를 잡게 된 것 같아요. 제가 특별히 의도한 건 없고 독자분들이 생각하시기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셨으면 좋겠어요.
Q. 작가님께서 작품 활동을 하시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A. 만화의 본질은 어쨌거나 재미라고 생각해요. 만화는 사실 재미를 위해서 만들어진 거잖아요. 사람들에게 재미를 주기 위해서.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재미있는 거죠. 항상 작품을 기획할 때마다 놓지 않고 있는 부분입니다. 재미라는 게 웃기는 것뿐만 아니라 여러 종류의 재미가 있잖아요. 공포 장르에도 특유의 재미가 있고. 그런 식으로 이야기에 맞는 재미를 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Q. <스퍼맨3> 이후로 차기작은 혹시 구상 중에 있으신가요?
A. 구체적인 구상은 아니지만 여러가지 아이디어는 있어요. 어떤 걸 다음에 해야겠다는 계획은 아직까지 없고…일단은 쉬고 싶어요. 길게 쉴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차기작은 잘은 모르겠지만 다음에는 전체 연령가를 해야 할 것 같아요.
Q. <스퍼맨>이 19금이라서 어려운 점이 있었나요?
A. <스퍼맨>은 시즌3까지 3-4년간 하고 있는데 성인 대상 작품은 전혀 다른 장르라고 해야되나? 저도 해보지 않은 작품이고 나름의 전문적인 분야라서 어려움이 있었어요. 일단 많이 해봤던 장르와 익숙한 스토리 구조가 아니라서 제작하면서도 어려웠구요. 이외에도 수위에 대한 문제가 있었어요. 포털 사이트에 19금 연령제한을 두고 연재를 해도 어느 정도의 수위까지 허용이 되는지를 가늠하기가 힘들어요. 성에 관련된 내용이라서 어쩔 수 없이 나오는 용어나 장면 등을 네이버측 편집자와 조율하는 과정에서 논의할 내용이 많았어요.
Q. 쉬는 동안은 무엇을 하실 예정이신가요? 여행 계획이 있으신지?
A. 여행을 좋아했었어요. 여행가는 게 유일한 취미라고 할 정도로. 그런데 공황 장애를 얻고 나서부터 사실 여행을 가기도 어려워지더라고요. 먼 해외에 갔을 때 공황 증상이 오면 어떡하나 불안하니까 비행기부터 꺼려지더라구요. 최근 몇 년 동안에는 거의 어디를 못 갔었는데 다시 추스리고 가보려는 노력을 해야겠죠? 공황 장애가 사실 회복이나 완치가 된다는 개념은 아니라서 계속 관리하고 다스리면서 같이 평생 가져가야 하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다른 공황장애를 앓고 있는 분들을 보면 용기를 내서 오히려 대외활동을 하는 분들도 있어요. 그런 분들을 보면서 저도 그렇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Q. 작가님께서 건강하셔서 계속 좋은 만화를 만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끝으로 독자분들에게 한말씀 부탁드립니다!
A. 추운데 감기 조심하시고요, 열심히 준비해서 또 좋은 만화로 찾아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