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여행 경품에 당첨되어 결혼한 후 여드레 만에 이혼하는 부부 이야기. 의지할 곳 없는 첫사랑. 상대의 감정을 헤아리고 보듬는 것에 서툰 두 연인. 여자 둘, 그리고 남자 하나의 동거. 원조교제. 불륜. 이 단어들에서 풍겨 나오는 공통분모는 하나다. 섹스라는 단어다.여러분에게 ‘섹스’는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심장이 쿵쾅거리는 하룻밤? 사귀는 이들의 최종적인 관문? 사랑의 결실? 물론 백인백색(百人百色), 누구나 느끼는 바가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하지만 그 의미가 모두에게 화려한 것만은 아니다. 때로 섹스란 지독한 여상스러움으로 다가온다. 특히나, 그녀의 작품에서 표현되는 섹스는 빛바랜 풍경화처럼 무심하다.
그녀는 67년 1월 26일 후쿠오카(福岡) 현에서 태어났다. 미야자키대학(宮崎大) 농학부를 졸업하고 후쿠오카의 컴퓨터 소프트웨어 회사에 다니던 중, 잡지 ‘영 애니멀’에 투고한 작품 「あそぼゼ」로 평범하게 데뷔를 끝마친다. 1994년의 일이었다.
사실은 별로 평범하지는 않았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보아도 ‘농학부’와 ‘소프트웨어 메이커’라는 단어는 만화가라는 직업과 10만 광년 정도 동떨어졌으니까. 통상 만화가가 되고자 하는 이들은 고교를 졸업하고 유명한 작가의 문하생으로 들어가거나, 그래픽 학원으로 발길을 옮기는 쪽이 대부분이었다. 전형적인 출발점과는 애초에 거리가 있었던 게다. 더구나 장르도 마찬가지였다. ‘영 애니멀’은 「베르세르크(劍風傳奇 ベルセルク)」,「러브 다이어리(ふたりエッチ)」, 「손끝의 밀크티(ゆびさきミルクティ-)」등의 작품이 연재됐던 잡지다. 요컨대 성인 잡지. 무엇을 숨기겠는가. 즉, 그녀는 애초부터 성인 만화가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성인만화’라는 단어에서 포르노를 연상했다면 완전히 틀렸다. 최소한 그녀의 만화는 성욕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책에 적어넣은 ‘몸과 몸이 겹치는 것만이 작품의 끝은 아니’라는 코멘트처럼, 니노미야 히카루는 섹스를 철저한 일상으로 치환해놓는다. 야하지 않다는 폄하가 아니다. 작품에서의 섹스는 아름답고 매력적이지만 그것으로 완결이라는 얘기다. 어디까지나 일상에서 살아가며 겪는 여럿의 이정표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쇼핑하듯이, 편의점에서 물건을 사듯이, 밥을 먹고 잠을 자듯이. ‘평범한 일상을 달려가는 사회인이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경험할 수 있는 소재이기 때문’이라고 니노미야 히카루는 털어놓는다. 그래서 섹스는 그녀의 작품에서 실재(實在)한다. OL(오피스 레이디) 생활을 했던 그녀가 경험했을 법한, 누군가에게 언제든 어디에서든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흔한 사건으로 책 구석구석 살아 숨쉰다.
△ 「연인의 조건」
사실 성인만화라 해서 서로 맺어지는 둘의 땀방울만을 그려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작가는 섹스 이후의 일상을 그리는 데 더욱 공을 들인다. 첫 섹스 이후 소심한 연인들의 관계는 어떻게 달라질까, 동거중인 그들의 잔잔한 일상은 어떤 식으로 변해갈까. 이런 식의 조그맣지만 신경 써야할 법한 소소한 이야기들, 뒤를 알고 싶게 만드는 에피소드들이 우리의 옷소매를 만화책 앞에 못박아놓는다. 작가가 나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작품. ‘내 생각과 꼭 같다’고 느끼게 해주는 작품. 그녀의 작품은 그러하다. 그녀의 작품들이 성인만화라는 ‘마이너’ 장르에 속해 있음에도 많은 이들의 지지를 쉽게 얻어낼 수 있었던 이유다. 그러한 만화는 국적과 장르를 불문하고 재미있다. 누군가에게 공감을 얻어낸다는 사실은 그러한 지점에 위치한다.
물론 불만도 나온다. 때때로 ‘만화가라면 상상의 힘을 보여 달라’는 독자들도 있다. 성인만화라면 좀 더 환상을 도입해도 되지 않느냐는 물음이다. 작가는 그런 질문에 질문으로 답한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현실은 드라마틱하지 않은 거죠?”라고. 그리고 자답한다.
『"응, 그래-그래"라고 지금 고개를 끄덕이신 여러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사실은 전혀 반대입니다. 현실은 소설보다도 영화보다도 만화보다도 훨씬 드라마틱해요(SF, 판타지 같은 건 빼고요). 그리고 그것은 대개 이상과는 동떨어져 있죠. 사실에 근거를 두고 만화를 그릴 때일수록 "이런 건 있을 리가 없어"라는 말을 들을 때는 무척 곤란함을 느끼죠. 저도 이상적인 만화가가(그런 게 있을까요?) 되고 싶어요. -하하.』 니노미야 히카루는 처음부터 끝까지 작품 속에서 외치고 있다. 섹스는 일상이라고. 그렇게 받아들이자고.
PS> 해적판까지 합치면 국내에 발간된 그녀의 작품들은 제법 수가 된다. 「연인의 조건(1996 白泉社)」, 「유혹(誘惑)」, 「최저(最低)」, 「둘이서 아침까지(ふたりで朝まで)」, 「허니문 샐러드(ハネム-ンサラダ)」가 니노미야 히카루의 그것들이다. 하지만 작품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아도, 작가로서의 그녀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의외로 적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녀가 일본에서의 가진 유명세를 생각한다면, 장르가 성인만화라 해도 마이너 아닌 마이너다. 성인만화를 아직 접해보지 않은 분이라면, ‘허니문 샐러드’ 정도의 작품은 한번쯤 읽어봐도 괜찮으리라. 좋은 작품에 담긴 뜻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전해지는 법이니까. 그리고 꽤 야하니 걱정하지 말고(?) 보시라.